[딥테크] ‘친환경 에너지 효율성’ 높여야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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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 수입품에도 ‘탄소세’ 부과 아시아, 환경 기준 차이 축소 ‘안간힘’ ‘친환경 에너지 효율성’ 제고가 관건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한 차례씩 글로벌 경쟁의 양상을 바꾼 무역 규칙이 등장했는데, 이번에는 유럽연합(EU)의 ‘탄소 국경 조정 메커니즘’(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탄소 발생 수입품에 매겨지는 관세 및 부담금, 이하 CBAM)이 역할을 이어받을 것으로 보인다. 내년 1월부터 본격 시행 예정인 CBAM의 임무는 산업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탄소 배출 기준 가격을 설정하는 것인데, 유럽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을 타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 해외 기업들에도 동일 환경 기준 적용
현재 EU의 탄소 가격은 이산화탄소 1톤당 74유로(약 12만원)이니 1톤의 고로강(blast-furnace steel)을 생산하는데 150유로(약 24만원)의 추가 비용이 드는 셈이다. 이제 이론상의 가격이 아니라 유럽 시장 진출을 원하는 기업들의 수익성과 조달 정책, 제품 설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EU는 CBAM을 탄소 누출(carbon leakage, 엄격한 기후 정책을 시행하지 않는 국가들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이 증가하는 현상)을 막기 위한 기후 정책 도구라고 정당화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 유럽 기업들이 이미 적용받고 있는 탄소 배출권 거래제(Emissions Trading System, 이상 ETS)를 해외 기업에 적용해 에너지 낭비에 불이익을 주고 공정 혁신(process innovation)은 보상하는 것이다. 특히 유럽 진출을 원하는 아시아 기업들에게는 명확한 메시지가 되고 있다.
국경 간 탄소세 규모, ‘수백억 유로’
CBAM의 도입에 따라 내년부터 수출업체들은 ETS에 따른 탄소 가격을 지불하게 되며, 동시에 유럽 기업들에 제공되는 무료 배출권은 단계적으로 폐지된다. 탄소세가 유럽 기업들만 불리하게 만든다는 오래된 비판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고철을 사용하는 전기 아크 용광로(electric arc furnace, EAF)나 친환경 수소를 이용한 직접 환원 철(direct-reduced iron) 등 저탄소 기술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고 있다.

주: 용광로-염기성 산소로, 직접 환원 철-전기 아크 용광로, 고철 활용 전기 아크 용광로
영향력은 막대하다. 작년 CBAM의 적용을 받는 수입품이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2억 6,000만 톤을 넘었으니 톤당 70~80유로(약 11~13만원)로 환산하면 연간 수백억 유로에 해당한다. 작년과 올해 수입업체들에게 보고 의무만 적용한 것은 내년 시행 전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라는 의도도 있다.
아시아, 유럽 기준 맞추고자 ‘안간힘’
유럽이 변화의 속도를 설정하는 동안 아시아는 차이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중국은 ETS를 철강, 시멘트, 알루미늄 산업 등으로 확대해 1,500여 개 기업과 30억 톤의 이산화탄소가 해당 제도의 적용을 받는다. 한국의 K-ETS는 저렴한 탄소 가격으로 비판도 받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인 탄소 가격제로 평가받는다. 아직 자발적 참여 수준에 머무르던 일본의 GX-ETS도 내년부터 의무 시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싱가포르와 호주도 나름의 조치를 통해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아직 아시아의 탄소 가격은 유럽과 차이가 크다. 중국이 작년에 평균 13유로(약 2만원)를 기록한 가운데, 한국의 탄소세는 달러로 환산하면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각국의 탄소세 제도는 의미가 없지 않다. CBAM은 수출업자들이 국내에서 지불한 탄소 비용을 EU 국경을 통과할 때 상계해 주기 때문이다.

주: 유럽연합, 중국, 한국, 싱가포르(좌측부터)
그리고 해당 정책은 투자의 촉진제가 되고 있다. 동남아시아는 유럽 구매자의 수요에만 맞춘 친환경 철강 프로젝트를 출범시키고 있고, 태국이 새로 만든 전기 아크 용광로도 CBAM을 염두에 둔 것이다. 내년부터는 깨끗한 철강이 유럽 시장 진입과 수익성 향상을 동시에 가능하게 할 것이다.
‘관세 장벽’ 아닌 ‘친환경 정책 도구’로
CBAM이 친환경으로 위장한 보호무역주의라는 비판이 있는데, 아주 틀린 것은 아니고 실제로 유럽 생산자들이 상대적인 이익을 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EU가 국내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노하우와 자원을 해외에 나눈다면 CBAM을 관세 장벽에서 친환경 정책 도구로 전환할 수 있다.
EU의 혁신 기금(Innovation Fund)은 이미 탈탄소화와 신규 공정 기술 개발을 위해 수십억 유로를 지원하고 있다. EU 정부도 CBAM으로 인한 수익을 환급 및 기술 지원 등의 방법으로 상대국에 돌려주는 제안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CBAM이 유럽을 넘어 글로벌 친환경 산업 육성의 촉진제가 되도록 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다.
이러한 구상의 실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점은 규정 자체가 측정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간 배출량 감소에 대한 제품 단위별 기준을 설정하고, 친환경 철강산업을 떠받치는 전력망 탄소 집약도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각국의 탄소세 지출로 인해 어느 정도의 국경세가 상쇄됐는지에 대한 정보 역시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
유럽은 전 세계에 가격 신호(price signal)를 보내는 역할을 멈춰서는 안 된다. 기후 변화 무대응으로 인한 대가는 이미 숫자로 드러나고 있다. 작년 자연재해로 인한 재산 피해가 3,180억 달러(약 443조원)에 이르렀고, 2023년은 산업화 이전 수준과 비교해 지구 평균 기온이 섭씨 1.45 높아져 가장 더운 한 해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시스템적 충격과 비교하면 ‘더러운 철강’ 1톤에 부과하는 150유로(약 24만원)의 탄소세는 지나치게 싸 보일 정도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CBAM’s Hidden Race: Why Europe’s Border Carbon Price Is Really an Efficiency Compact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