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미·중 조선업 생산력 차이 '232배' 美 해상안보 위해 상선 250척 운용키로 국내 업체들 수주 기회 확대 기대
미국이 중국 해운력 견제를 위해 한국과 일본 조선소 활용을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국내 조선업계에 다시 한번 훈풍이 불고 있다. 현재 미국은 80척의 원양 화물선을 보유하고 있는 데 반해, 중국은 232배 큰 조선 능력을 바탕으로 5,500척을 운영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 선박은 국제 상업 화물의 2% 미만만을 운송하고 있어, 해상 운송의 대외 의존도가 심각한 상황이다.
美 의회, 조선업 경쟁력 강화 방안 추진
2일 닛케이 아시아에 따르면 최근 미국 공화당 및 민주당 소속 상·하원 의원 4명은 미국 선적 상선을 10년 내 250척까지 늘려 '전략상선단'을 운영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미국의 번영과 안보를 위한 조선업과 항만 시설법’을 발의했다.
이와 관련해 윈스턴 앤 스트론의 찰리 파파비자스 해양실무의장은 "아시아 조선소들에 두 가지 기회가 될 것"이라며 "중간 선박 수주 기회와 함께, 250척의 안정적 수요가 미국 조선소 투자 유인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한화그룹은 지난해 12월 19일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1억 달러(약 1,460억원)에 인수한 데 이어 추가 인수도 검토 중이다. 필라델피아 조선소는 미국 마지막 상선 생산업체 중 하나다.
법안은 이 외에도 백악관 해양안보보좌관 신설, 정부 화물의 미국 선박 운송 의무화, 2029년부터 중국발 상업 화물의 일부 미국 선박 운송 의무화, 미국 조선소 투자에 대한 25% 세액공제 등을 담고 있으며, 이달 3일 새 회기에서 재상정될 예정이다.
해양 패권·함정 규모, 中이 앞서
이번 법안 발의는 표면적으로는 상선 해운을 활성화하겠다는 게 목표지만 진짜 속내는 중국에 밀린 해상 안보 강화를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비등하다. 2022년 말 기준 미국의 건조 중인 원양 선박은 5척에 불과한 반면, 중국은 1,794척을 건조 중이다. 더군다나 현재 미국에 수입되는 재화의 2%만 미국 선적 선박을 이용하는 수준이다. 미국 선적 국제무역 상선(해군 지원선 포함)은 80척 수준으로 감소했고, 미국 내 조선소 수도 20개 규모다.
이에 반해 중국은 막강한 조선업 인프라를 구축한 상태다. “반세기 만에 미국이 해상에서 패배(defeat at sea)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 국방부의 ‘중국 군사력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해군이 현재 세계 최대 규모 함정을 보유하고 있으며, 2030년엔 보유량이 더 늘어날 전망이다. 2020년 양(함정 수)에서 미국을 처음 추월한 중국 해군이 이제 항공모함과 핵추진 잠수함 등 첨단 군함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있어 질의 차이도 좁혀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세계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해군 규모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2년 집권한 이후 10여 년 동안 빠르게 팽창했다. 1999년 이후 증강된 중국 해군력의 70% 이상이 시진핑 1·2기(2012~2022년) 때 누적된 것이다. 앞서 중국 지도부는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해군 강화, 해외 군사기지 확보를 목표로 하는 ‘해양 강국’ 건설을 국가 발전 전략으로 채택했다. 2017년 19차 당대회 때 시진핑이 해군 증강을 ‘중국몽 실현의 필연적 선택’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중국 해군 전략도 ‘방어’에서 ‘확장’으로 기조가 바뀌었다. ‘제1도련선’ 안에서 적을 방어하는 ‘근해(近海) 방어 전략’이 그 너머로 해군력을 확장하는 ‘원해(遠海) 호위 전략’으로 진화했다. 도련선은 중국이 설정한 가상의 대미 방위선으로, 제1도련선은 규슈~오키나와~대만~필리핀, 제2도련선은 오가사와라 제도~괌~사이판~파푸아뉴기니를 잇는다. 중국 해군이 제1도련선 밖으로 나아가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은 2차 대전 이후 태평양을 장악해 온 미 해군에 정면으로 맞서며, 남중국해부터 서태평양까지 진출하겠다는 의미다. 2차 대전 이후 압도적 해군력을 유지하며 세계 패권을 놓치지 않았던 미국 입장에선 큰 위협일 수밖에 없다.
트럼프, 한국에 ‘선박 협력’ 손 내민 배경
문제는 이 같은 격차가 더 벌어진다는 데 있다. 조선업의 역량 차이 때문이다. 미 해군정보국의 ‘중국 해군 건조 추세와 미국 해군 건조 계획(2020-2030)’ 자료를 보면, 중국은 미국 최대 조선소보다 규모와 생산성이 더 큰 상업용 조선소를 수십개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유출된 미국 해군 브리핑 자료에는 미 해군정보국이 평가한 미·중 조선업 역량 차이가 그래픽으로 등장하는데, 한 국가가 1년에 건조할 수 있는 총톤수 기준으로 중국 조선소의 생산능력을 약 2,325만 톤으로 평가하고 있다. 미국은 10만 톤 이하로, 중국의 생산 역량이 미국의 최소 232배에 이른다는 의미다.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하며 '한국의 세계적인 군함·선박 건조 능력'을 협력 희망 분야로 지목한 배경에도 이 같은 위기감이 작용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얘기한 협력은 크게 두 가지를 뜻한다. ‘수리’와 ‘조선소 인수’다. 미국 번스-톨리프슨 수정법(USC 8679)은 외국 조선소에서 함정 건조를 금지하는데, 이는 안보 문제 때문이다. 이 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한국·일본 등 외국 조선소가 미 해군의 배를 만들 순 없다.
하지만 선박 유지·보수·정비(MRO), 즉 수리는 예외 조항을 통해 일부 가능하다. △해외에 배치된 미 해군의 군함을 한국·일본 등 동맹국 조선소에서 빠르게 수리하고 △이들 나라 기업이 미국 조선소를 인수해 미국 조선업의 생산성을 끌어올려 주길 기대한다. 미국 선주들이 내년부터 한국 및 일본 조선사와 2029년 납기 상선 건조 계약을 체결할 것으로 전망되는 배경이다.
더불어 외국 주체가 미국 내 상선 및 군함 조선소, 기자재 업체, 강재 제작 시설에 투자할 경우 이를 적격 투자로 분류하고 금융이나 고용 지원 등의 인센티브도 제공한다. 이와 관련해 한국해양전략연구소는 ‘미 해군 부활을 위한 한국의 역할’ 보고서에서 “한국이 미국에서 미 해군 함정을 건조하고 한국에서 미군 함정을 정비하는 데 참여한다면, 한-미 안보협력을 강화하고 미국의 전략적 계산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