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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 비용 절감 위해 직원 100명 감축 '진보 성향' 고정 독자층 및 스타 기자 이탈 중립 선언 CNN도 시청률 45% 폭락
재정 악화에 시달리는 미국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가 비용 절감을 위해 전체 직원의 4%(약 100명)를 해고한다. 제프 베이조스(Jeff Bezo) 아마존 의장이 소유하고 있는 WP는 지난 대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진보 성향의 고정 독자층과 스타 기자들의 이탈이 가속화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의 대선 중립 선언과 여파
8일(현지시간) CNN 등에 따르면 WP 대변인은 전날 “여러 비즈니스 부문에 걸쳐 변화를 꾀하고 있다"며 "이번 감원이 뉴스룸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업계의 요구를 충족하고, 보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구축, 독자들이 있는 곳에 다가가기 위한 변화를 계속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WP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2023년 월스트리트저널(WSJ) 발행인 출신으로 경영 능력이 검증된 윌리엄 루이스(William Lewis) 발행인 겸 최고경영자(CEO)를 영입했지만 그해에만 7,700만 달러(약 1,123억원)의 손실을 입는 등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
WP는 특히 지난해 10월 미국 대선 기간 동안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지지 사설을 준비했다가 사주 베이조스의 결정으로 철회한 이후 독자 20만 명(전체 구독자의 8%)이 구독을 취소한 것이 결정타가 됐다. 베이조스 의장은 당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기로 한 결정을 옹호하며 신문 사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론이 편향적이라고 생각한다”면서 WP를 포함한 다른 신문들은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이조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측과의 관계 회복에는 공을 들이고 있다. 그는 지난달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트럼프 저택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취임식 행사에 100만 달러(약 14억6,000만원)를 기부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베이조스의 결정 배경을 둘러싼 논란도 확산되고 있다. WP의 전직 편집장 마커스 브라우칠리는 미 공영방송 NPR과의 인터뷰에서 "결정 이유가 불투명하다"며 의구심을 나타냈다. 특히 베이조스 소유의 우주항공사 블루오리진 경영진이 결정 발표 당일 트럼프 당선인과 면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기업 이익을 위한 정치적 거래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스타 기자들도 WP를 떠나고 있다. 지난달 편집장인 마테아 골드는 뉴욕타임스(NYT)로, 정치 기자 애슐리 파커가 마이클 셰러는 더 애틀랜틱으로 옮겼다. 백악관 담당 기자 타일러 페이저 역시 NYT로 이직했으며 정치 분야 탐사 기자 조쉬 도지는 WSJ로 영입됐다. 지난주에는 WP에서 오랫동안 만평가로 활동하고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앤 텔네스가 베이조스를 비꼬는 자신의 만평이 신문에 게재되지 않자 사임했다.
'우클릭 시도' CNN도 주 시청층 이탈
‘뉴스의 제국’ CNN도 시청자 이탈로 위기의 늪에 빠져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감소했던 CNN의 시청률은 지난해 11월 5일 대선 이후 더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 특히 CNN은 광고주들이 선호하는 25~54세 연령대 시청률에서 크게 뒤처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선 이후 CNN의 프라임타임(황금 시간대) 시청자는 45% 감소해 39만4,000명을 기록했고, 추수감사절(11월 17일) 기간에는 29만7,000명으로 30만 명 선마저 무너졌다. 2020년 대선 당시만 해도 CNN 프라임타임 평균 시청자 수는 180만 명에 달했다.
CNN은 이번 대선 당일 시청률 경쟁에서도 같은 진보 성향의 MSNBC에 밀렸다. 시장조사기관 닐슨데이터에 따르면 대선 당일인 지난달 5일 미 동부시각 기준 오후 8~11시 CNN 시청자 수는 510만 명으로, 600만 명을 기록한 MSNBC에 크게 뒤처졌다. 같은 시간 대 보수 성향의 폭스뉴스 시청자 수는 CNN의 두 배 수준인 1,030만 명이었다.
CNN의 시청률이 하락세를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전 최고경영자(CEO) 크릭스 릭트의 ‘우클릭’ 시도다. 릭트는 “편향적인 보도를 줄이겠다”면서 지난해 5월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주자의 ‘타운홀 행사’를 독점 중계했다. 당시 행사는 트럼프와 CNN 진행자가 좌담하는 방식으로 중계됐는데, 300만 명이 시청한 방송에서 트럼프는 “2020년 대선은 부정선거”라고 주장하거나 ‘1·6 의회 난동 사태’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방송이 끝나자 진보 진영에서 “왜 CNN이 트럼프에게 자기 주장을 펼칠 판을 깔아주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해당 방송을 계기로 CNN의 전통적 시청자층으로 꼽히는 진보 성향 이탈이 심화되면서 트럼프를 출연시킨 릭트는 타운홀 행사 한 달 뒤인 지난해 6월 경질됐다.
CNN은 이번 대선 과정에서도 트럼프에 대한 사실 확인을 소홀히 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CNN은 지난해 6월 트럼프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첫 TV 토론을 주관했다. 이 TV토론에서도 트럼프는 여러 차례 사실과 다른 발언을 했는데, 방송 이후 진보 진영에서 CNN이 트럼프의 발언을 정정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런 가운데 CNN과 대립각을 세워 온 트럼프가 곧 새 임기를 시작한다.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 2020년 CNN이 대선이 조작됐다는 자신의 주장을 보도하며 이를 ‘큰 거짓말(Big Lie)’이라고 표현한 것을 문제 삼아 4억7,500만 달러(약 6,950억원)의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2018년엔 CNN 백악관 출입기자 짐 아코스타의 출입을 정지시켰다. 두 사건 모두 법원에서 뒤집혔지만, 업계에선 트럼프가 CNN을 다시 공격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다가올 정리해고의 그림자도 CNN 직원들의 사기를 꺾고 있다. CNN은 지난 2022년 말 전 세계 수백명 규모의 감원을 단행했고, 지난해 7월에도 약 100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한 CNN 정치부 기자는 “모두가 초조해하고 있다”고 했고, 익명의 고위 프로듀서도 “정리해고가 언제, 얼마나 이뤄질지 혹은 실제로 있을지조차 명확한 신호가 없다”고 말했다.
'팬덤 독자' 늪에 빠진 기성 언론
WP와 CNN 모두 중립을 객관성 확보의 방편이자 독자층 외연 확대의 전략으로 삼았지만 이는 결국 패착이 됐다. 전문가들은 시대에 맞지 않는 저널리즘 규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객관과 주관의 이분법은 철학, 심리학은 물론 사회과학에서도 폐기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관점'을 갖게 되는데, 객관은 관점을 초월(view from nowhere)한다는 뜻이고 현실 사회에서 불가능한 개념이다. 이런 이유로 20세기 저널리즘은 상반된 관점을 균등하게 소개하는 중립을 객관의 실행기준으로 삼곤 했다.
하지만 관점과 이해관계가 파편화된 디지털 시대에는 이런 방식으로 객관을 묶어내기가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몇 가지 관점을 단순 나열하는 기계적 중립은 객관으로 수용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는 개념이 부상하는 배경과도 일맥상통한다. 간주관성 혹은 상호주관성은 각자의 주관이 부딪치면서 생기는 공통 부분을 말한다. 검증된 자료에 기반해 내린 해석이 논리적 정합성을 갖고 있다고 다수가 인정하면, 그걸 객관적이라고 수용해 주는 것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뉴스 산업도 중립의 강박보다는 팩트 기반의 논리적 정합성을 갖고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관점의 보도를 추구하는 편이 시대 상황에 맞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뉴스 산업의 역사를 통틀어 정보를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며 가치의 우선순위를 어떤 기준으로 매기느냐는 늘 경쟁력의 핵심이었다. 대중 매체 시대에 통용됐던 객관이라는 환상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다. 산업 혁명으로 도시화가 진행되던 초기에도 새로운 중산층의 관심사와 관점 역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다. 당시 신문들은 여기에 부응해 깨알 같은 정보를 빽빽이 나열했다. 그러다 부가가치가 높은 뉴스는 단순 나열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일부 언론사들이 관점을 제시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대도시의 강력한 파워를 가진 신문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지금은 디지털 데이터 분석을 통해 독자들의 다양한 관점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어느 지점에서 가장 큰 공통분모를 이루는지 정확하고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을 얻는 것이 고품질 뉴스를 정립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 AI(인공지능)나 챗GPT 활용도 이런 맥락에서 이뤄져야 한다. 문제는 중간에서 보도하지 않았을 때가 아니라 제시한 관점이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 중립에 대한 강박은 디지털 시대 뉴스 혁신을 추진하는데 자칫 독이 될 수 있다. 릭트를 비판했던 어느 기자의 표현처럼 중립에는 독자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