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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기 정부, 교수·관료 대신 실리콘밸리 인사들이 접수 연방 정부 조직과 인원 감축·예산 삭감 등 핵심 업무 수행 AI·가상자산·제약·바이오·금융 등 규제완화 기대
미국 실리콘밸리와 워싱턴DC가 가까워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테크업계와 벤처캐피털 부문 인사들을 주요 행정부 담당자로 지명하면서다. 이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테크업계와 긴장 관계였던 것에서 변화한 모습이자, 교수나 관료 출신들이 요직을 차지하던 과거 분위기와도 상반된다.
트럼프 행정부-실리콘밸리 밀착
1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정부효율부(DOGE)를 이끌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경영자(CEO)가 최근 정부 예산 삭감 업무 책임자로 실리콘밸리 인사들을 집중적으로 채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DOGE는 미 연방 정부의 불필요한 지출과 규제를 혁신적으로 개편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곳으로, 머스크와 함께 지난 대선 당시 공화당 후보 경선에 나섰던 비벡 라마스와미(Vivek Ramaswamy)가 공동 수장을 맡는다. 머스크와 라마스와미는 정부 관료주의 해체와 재정 지출 감축 등을 핵심 과제로 삼을 예정이다.
NYT에 따르면 실리콘밸리의 피터 틸(Peter Thiel) 페이팔 공동창업자, 벤처캐피털 안드레센 호로위츠 인베스트먼트 CEO인 마크 안드레센(Marc Andreessen), 세쿼이아캐피털 글로벌 파트너인 숀 맥과이어(Shaun Maguire) 등 머스크 CEO와 친분이 있는 인사들이 DOGE 지원자를 대상으로 면접 심사를 했다.
머스크는 DOGE에 자신의 핵심 측근인 스티븐 데이비스(Steven Davis) 보링컴퍼니 사장도 투입한다. 데이비스는 머스크가 가장 신뢰하는 측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스페이스X, 보링컴퍼니, 소셜미디어 X와 같은 기업에서 비용을 절감하는 업무를 맡아왔다. 그는 항공우주 엔지니어 출신으로 특히 스페이스X와 보링컴퍼니에서 비용과 인력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트럼프 당선인의 최측근인 스테판 밀러(Stephen Miller)의 아내 케이티 밀러(Katie Miller)도 합류한다. 케이티 밀러는 펜스 전 부통령 대변인을 지낸 인물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DOGE를 '우리 시대의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고 지칭한다. DOGE는 백악관과 관리예산국과 협력해 대규모 구조 개혁을 추진하고, 연방 정부에 기업 경영 방식을 접목한다. 머스크는 428개에 달하는 연방 기관이 너무 많고, 중복돼 99개면 충분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트럼프 집권 2기가 시작되면 DOGE 직원이 두 명씩 정부 주요 부처에 배치된다. 이들은 각 부처에서 불필요한 예산과 인력을 찾아내는 임무를 맡게 된다. 다만 DOGE가 직접 정부 부처 인원이나 예산을 감축할 권한은 없다. DOGE가 권고안을 마련하면 미 의회가 입법을 통해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해야 한다.
규제 시달려 온 빅테크 거물들, 트럼프와 새판
테크업계의 백악관 침투는 DOGE에 그치지 않는다. J.D 밴스(J.D. Vance)을 비롯해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장, 복지부 차관, 암호화폐·AI(인공지능) 최고책임자, 인사관리처 책임자 등을 모두 실리콘밸리 출신이 차지했다. 최근 트럼프 당선인은 스리람 크리슈난(Sriram Krishnan) 앤드리슨호로위츠 총괄파트너를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 인공지능(AI) 수석 정책 고문(policy advisor for AI)으로 지명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메타, 트위터, 스냅, 야후 등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크리슈난은 머스크가 2022년 트위터를 인수한 직후 한동안 트위터 경영을 돕는 등 머스크와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또 페이팔과 파운더스펀드 공동 창립자이자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스웨덴대사를 지낸 켄 하워리(Ken Howery)를 덴마크 주재 미국대사로 지명했으며, 최근까지 미 테크 스타트업인 스케일AI에 몸담고 1기 백악관 최고기술책임자(CTO)를 역임한 마이클 크라치오스(Michael Kratsios)를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장으로 임명했다. 아울러 우버 임원이었던 에밀 마이클(Emil Michael)을 국방부 연구·공학 담당 차관에 발탁했으며, 백악관의 AI·크립토차르(가상화폐 총괄)로 데이비드 색스(David Sacks) 전 페이팔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지명하기도 했다.
이는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캘리포니아주가 전통적인 민주당 강세 지역이고 테크업계가 민주당을 주로 지지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엔 조 바이든 행정부의 빅테크 때리기가 있다. 그간 바이든 대통령은 테크업계와 ‘전쟁’을 벌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리콘밸리와 대립각을 세웠다. 빅테크 기업은 독점 폐해를 일으키는 수술 대상으로, 암호화폐·AI 등 신기술은 규제가 시급한 분야로 여겼다.
이에 반해 트럼프 당선인은 취임 전부터 신기술 규제를 풀고 지원은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앞서 트럼프는 바이든 정부의 법무부가 구글을 독점 기업으로 보고 강제 분할을 검토하자 “중국과의 기술 전쟁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밝힌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팀 쿡 애플 CEO가 EU(유럽연합)의 반독점 과징금에 대해 불만을 호소하자 “우리 기업들이 (앉아서) 당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강경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트럼프의 기조엔 대선 캠페인 때부터 거액을 기부한 실리콘밸리 갑부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빅테크 주요 기업들이 거액의 정치 자금을 후원·기부한 만큼, 업계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실제 머스크는 트럼프 당선인에게 최소 2억5,000만 달러(약 3,700억원) 이상을 쏟아 부었고, 최근엔 알파벳, 메타, 애플, MS 등이 트럼프 당선인의 취임식에 각각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트럼프 2기 내각 핵심인사 대부분 '親가상화폐'
전문가들은 막강한 자금력과 탄탄한 인맥을 발판으로 미 정계의 실세로 부상한 테크계 인사들이 AI, 가상화폐, 우주 기술, 바이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트럼프 2기의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분야는 가상화폐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핵심 인사 대부분이 가상화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법무법인 디엘지에 따르면 포브스가 선정한 트럼프 이너서클 20명 중 11명은 가상화폐와 친밀한 인물들로 알려졌다. 비트코인과 도지코인을 지지하는 머스크뿐만 아니라, 틸은 가상화폐와 AI 분야에서 중요한 투자자며, 색스는 가상화폐 기업들과 관계가 깊다. 색스는 가상화폐인 솔라나(Solana, SOL)에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상자산에 우호적인 것은 증권거래위원회(SEC)위원장, 상무부 장관도 마찬가지다. 신임 SEC 위원장으로 지명된 폴 앳킨스(Paul Atkins)는 디지털 상거래 상공회의소 자문위원회에서 근무했는데, 앳킨스 근무 당시인 지난해 11월 리포트를 보면 스테이블코인이 미국의 달러 지배력을 확대하는 데 유용한 솔루션이라는 게 명시적으로 언급돼 있다. 이에 따라 SEC에서도 가상화폐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칠 공산이 크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 2기 내각 상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하워드 러트닉(Howard Lutnick)은 CEO로 있던 금융 서비스회사 캔터피츠제럴드를 통해 테더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자에 투자해 5%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헤지펀드 운용사 대표를 거친 스콧 베센트(Scott Bessent) 재무부 장관 임명자는 가상자산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은 작지만, 경제 성장 및 GDP(국내총생산) 대비 부채 비율 축소 등을 목표로 하는 3·3·3 전략을 통해 디지털 가장 자산을 금융 정책에 통합할 가능성이 있다.
가상자산 중복규제 없애는 법안들도 이미 하원을 통과한 상태다. 가장 주목받는 법안은 ‘21세기 금융 혁신 및 기술 법안(Financial Innovation and Technology for the 21st Century Act, FIT21)’이다. FIT21 법안은 블록체인의 분산화 수준을 기준으로 SEC(증권거래위원회)와 CFTC(상품선물거래위원회)의 권한을 명확히 정의하고, 시장 거래를 규제하며 규제의 중복을 줄이는 데 중점을 둔다. 이와 함께 ‘CBDC 반감시 국가 법안(CBDC Anti-Surveillance State Act)’도 미 의회를 통과했다. 해당 법안은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개인용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를 발행하거나 직접 관리하는 것을 금지하고, 통화 정책에서의 사용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