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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로그 특사 "평화협정 관한 모든 것은 여전히 논의 대상" 동맹국 대사들 만나 '더티 딜' 우려 불식 "모든 국가가 협상 테이블에 앉는 건 비현실적", 유럽 참여 부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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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우크라이나·러시아 특사가 “우크라이나에 평화협정을 강요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협상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오롯이 우크라이나가 결정할 일이라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러시아의 요구 사항만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더티 딜'(dirty deal)을 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미국, ‘유럽 패싱’ 우려 진화
17일(이하 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벨기에 브뤼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본부를 방문한 켈로그 특사는 기자들에게 협상 결과를 받아들일지는 우크라이나가 결정할 일이라며, "아무도 주권 국가의 선출된 지도자에게 그것(평화협정)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모든 것이 여전히 논의 대상(on the table)"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이 나토 가입이나 영토 수복 등 우크라이나의 종전 요구사항에 선을 그었던 것과는 대비되는 발언이다.
켈로그 특사는 이날 나토 북대서양이사회(NAC) 회의에 참석해서도 우크라이나의 항구적 평화 보장을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러시아의 요구 사항만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발언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유럽도 '패싱'할 것이라는 우려를 의식한 발언이라는 해석이다. 또 켈로그 특사는 기자들과 문답 과정에서 러시아의 북한·이란·중국과 관계를 언급하면서 협상 과정에서 '글로벌 현안'이 거론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이 러시아 측에 파병 북한군의 완전한 철수, 북·러 무기 거래 중단 등을 협상 조건으로 요구할 가능성이 점쳐지는 대목이다.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 유럽이 참여하는 것에 대해선 "모든 사람이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은 합리적이거나 실행 가능하지 않다"며 재차 선을 그었다. 그는 앞서 15일 뮌헨안보회의에서도 유럽의 이해관계가 반영되고 역할이 있을 것이라면서도 "대규모 토론장(large group discussion)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켈로그 특사는 당시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의 속도를 내기 위해서라며 '이중 트랙(dual-track)' 방식을 언급하기도 했다. 자신은 미국과 우크라이나·동맹국 간 협의를 맡아 우크라이나와 유럽 동맹들의 얘기를 듣고 스티브 위트코프 미 대통령 중동특사가 미·러 간 협의를 맡는다는 것이다.
트럼프 종전 드라이브 급물살, 미·러 사우디 회담
켈로그 특사의 이번 발언은 미국과 러시아 간 고위급 회담이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진행되는 가운데 나왔다. 러시아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17일 브리핑을 통해 “18일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열리는 러시아와 미국 대표단 회의 참석을 위해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과 유리 우샤코프 크렘린궁 외교담당 보좌관이 이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사우디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휴전 협상 관련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확인했다. 아울러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회담을 조직하는 문제도 18일 논의할 것”이라며 양국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시사했다.
라브로프 장관도 사우디 회담 참가 계획을 확인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미국과 러시아 정상은 비정상적인 관계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데 합의했다”며 “(사우디 회담에서) 미국 대표들이 어떤 얘기를 하는지 주로 듣겠다”고 말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지난 12일 전화통화를 통해 ‘우크라이나 종전 논의 개시’를 승인한 점을 강조한 발언이었다.
유럽의 협상 참여를 원하는 우크라이나 측 요구에는 “초대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일축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그들이 협상 테이블에 초대된다고 해도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점령지를 반환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런 생각을 하길 원하느냐. 어떻게 양보하겠느냐”고 핀잔을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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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한 젤렌스키, 사우디 급방문
미국과 러시아 간 고위급 회담에 초청되지 못한 우크라이나는 중동 지역을 찾아 미·러 중심의 현 구도를 타파하기 위한 외교전에 나섰다. 16일부터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 등 중동 순방에 나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텔레그램을 통해 “우선순위는 더 많은 포로를 귀환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UAE 방문을 시작으로 사우디와 튀르키예를 잇달아 방문한다. 그동안 러시아·우크라이나군 포로 교환을 중재한 이들 중동 국가를 상대로 젤렌스키 대통령은 종전 협상에서도 중재자 역할을 부탁할 가능성이 높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사우디에서 진행되는 고위급 회담이 예비적인 성격을 띠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러시아와만 협상을 진행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를 보여준다고 전했다. 이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16일 NBC뉴스와 인터뷰에서 “미국 국민이 뽑은 트럼프 대통령을 믿는다”면서도 자국을 협상 테이블에 포함하지 않은 미국과 러시아 간 종전 협정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또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이 종전 협상에 유럽 동맹국들이 동참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나토가 미국의 지원을 얻지 못하면 러시아가 올여름께 유럽의 특정 지역을 침공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이 보복할 위험이 없다고 러시아가 믿으면 옛 소련 지역 등 유럽 일부를 점령하기 시작할 것”이라며 “작은 나라들부터 시작할 것이고 리투아니아, 폴란드 등이 될 위험도 있다”고 주장했다.
앞마당에서 발생하는 전쟁의 종전 협상에조차 배제될 처지에 놓인 유럽도 황급히 움직이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7일 파리에서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스페인, 네덜란드, 덴마크 정상과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을 초청해 긴급회의를 열었다. 유럽 지도자들은 이번 회담에서 미국이 유럽과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협상을 진행하는 것에 반대하는 뜻을 모았다. 유럽은 러시아에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이 끝날 경우 향후 역내 안보 위협이 더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유럽은 또 우크라이나 안보를 위해 평화유지군 창설에도 속도를 내는 분위기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일간 텔레그래프에 보낸 기고문을 통해 “유럽은 자체적인 안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큰 노력을 해야 한다”며 평화유지군 창설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당초 유럽 주도의 평화유지군 구상은 마크롱 대통령이 먼저 제안했는데 침묵을 지켜왔던 스타머 총리가 이 주장에 동조하면서 유럽 주도의 평화유지군 창설이 현실화할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통신은 유럽이 방위비 지출을 늘리는 등 새로운 군사 강화 정책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달 23일 독일 총선이 끝나면 발표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