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제조업 중심국 독일, 산업 경쟁력 와해 탈원전으로 인한 에너지 정책 실패가 주원인 산업계, 강력한 에너지 정책 개혁 촉구

유럽연합(EU)의 주축인 독일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독일 자동차 회사들이 대규모 인력 감축을 발표하는가 하면 자동차 화학 기계 등 주요 산업에서는 생산과 투자가 감소하고 있다. 이를 두고 독일 내부에서는 제조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 등과 함께 탈원전으로 인한 에너지 정책 실패가 주원인으로 지목된다. 친환경 에너지 확대와 기후변화 대응을 목표로 했던 정책이 독일 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있으며, 에너지 안보 및 산업 경쟁력 저하 등의 문제까지 초래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독일 에너지 전환 정책 한계
3일(현지시간) 에너지 전문매체 오일프라이스에 따르면 독일은 탈원전 이후 재생에너지 확대를 추진했으나 신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 때문에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어려워진 상태다. 특히 이번 겨울 동안 둥켈플라우테(Dunkelflaute·햇빛과 바람이 거의 없는 기후 현상)로 인해 풍력 발전량이 급격히 줄어들고, 하늘이 흐려 태양광 패널도 제 역할을 못하는 등 이른바 ‘녹색정전’이 발생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독일의 원전 가동 완전 중단은 EU 전체의 에너지 수급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탈원전 이후 독일 정부는 전체 전력수요의 70%를 원전으로 생산하는 ‘원전 강국’ 프랑스로부터 전력 수입 비중을 늘려왔다. 또한 탄소 배출 저감을 목표로 했던 정책이 오히려 석탄 사용 증가로 역효과를 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무탄소 에너지인 원전이 중단되면서 전체 탄소 배출량이 오히려 증가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독일은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는 사태를 맞았다.
높은 에너지 비용, 독일 경제 회복의 핵심 과제
높은 에너지 비용을 낮추는 것은 2022년 에너지 위기 이후 3년 동안 전력 및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고 변동성이 컸던 독일 경제 회복의 핵심 과제다. 유럽 천연가스 가격은 2022년 MMbtu(100만 열량 단위)당 60달러를 훌쩍 넘는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극적으로 하락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후 유럽의 에너지 위기가 해소됐다고 판단했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에너지 위기 이전 평균치에 비해 여전히 40% 이상 높은 천연가스 가격은 뉴노멀로 자리 잡았고 대부분의 재생에너지가 전력을 생산하지 못하면서 전력 가격이 다시 급등했다.
독일 도매전력 가격 역시 평상시 MWh당 20~40유로 수준을 훌쩍 벗어난 1,000유로를 기록하는 등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극단적인 요금보다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독일의 에너지 시스템은 풍력과 태양광의 변동성을 고려해 유연하게 설계됐지만, 기후 변화 속도는 예상보다 빨랐다. 지난해 5~8월까지 독일은 전체 전력의 25%를 태양광에서 조달했으나 11월에는 4.3%로 급격히 떨어졌다. 이론적으로는 가을과 겨울철에 풍력이 향상하면 태양광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는데, 에너지 소비가 가장 많은 겨울철에 되레 둥켈플라우테가 발생한 것이다.

독일 경제 버팀목 '제조업' 쇠퇴
에너지 비용 부담이 확대되자 독일 산업 전반에서도 부작용이 발생했다. 자동차 제조, 제강, 화학제품 생산 등 독일의 주요 산업은 지난 몇 년 동안 높은 에너지 비용으로 인해 경쟁력을 잃고 있으며, 많은 제조 현장이 일시적 또는 영구적으로 폐쇄된 상태다. 심지어 독일의 자동차 회사들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독일 내 일자리 감축을 제안하고 있다.
철강, 알루미늄, 조선과 같은 핵심 산업 부문 또한 유럽의 에너지 비용 증가에 따른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는 유럽의 국방 준비 태세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실제로 크럽스(Krups), 타타 스틸(Tata Steel), 폭스바겐(Volkswagen), 데이먼 조선소(Damen Shipyards), VDL과 같은 기업들은 유럽의 방위 역량을 강화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런 기업들을 지원하지 않으면 유럽이 군사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한국, 미국, 이스라엘 등에 계속 의존하게 될 것이란 경고까지 나온다.
무엇보다 제조업의 붕괴는 독일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연방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독일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전년 대비 0.2% 하락해 2년 연속 위축을 기록했다. 이에 대해 루스 브랜드 연방 통계청 회장은 "주기적이고 구조적인 압력이 더 나은 경제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며 "여기에는 주요 판매 시장에서 독일 수출 산업의 경쟁 심화, 높은 에너지 비용, 높은 금리 수준, 불확실한 경제 전망 등이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이에 독일의 주요 기업들은 정부가 에너지 비용을 낮추고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신속하고 단호하게 행동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독일의 최대 전력회사 RWE의 최고경영자(CEO) 마르쿠스 크레버는 최근 비즈니스 전문 소셜미디어(SNS) 링크드인을 통해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을 확보하는 것이 독일 경제를 되살리고 산업을 강화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말했다. 지멘스 에너지(Siemens Energy)의 크리스티안 브루흐 최고경영자(CEO)도 "산업 성장 지원 정책, 탈석탄 계획을 위한 최소 12기가와트(GW)의 신규 가스 화력 발전소 입찰, 풍력 에너지 및 전력망 확대, 원자재 공급 확보를 위한 전략적 정책 등이 필요하다"며 구체적인 에너지 정책 조치를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