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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탈퇴’ WHO에 5억 달러 추가 기부 美 우선주의 행보 속 국제사회 존재감 확대 영향력 이용, 국제사회서 대만 배제 의도도

중국이 국제 무대에서의 영향력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미국이 국제기구 및 협약에서 한발 물러서자 이 틈을 노려 무게 중심을 바꿔놓는 모습이다. 아직은 다자주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신중한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중국이 실질적 부담은 피하면서 영향력 확대에 주력할 것으로 전망한다. 여기엔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국제기구의 최대 기여국으로 자리매김한 뒤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형성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美 “WHO 불필요, 동반 탈퇴하자”
21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폴리티코 등에 따르면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미 보건장관은 전날 스위스 UN(국제연합) 제네바사무소에서 열린 WHO 연례 회의인 세계보건총회(WHA) 영상 연설에서 “미국의 (WHO) 탈퇴가 각국의 보건부 장관들과 WHO에 경고의 신호가 되길 바란다”며 “이미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과 접촉 중이다. 다른 나라들도 우리와 함께할 것을 고려해 달라”고 밝혔다. 미국과 함께 WHO에 탈퇴한 것을 촉구한 것이다. WHO의 최대 재정 후원국이었던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첫날 서명한 행정명령에 따라 2024년과 2025년 분담급 납부를 중단하고 탈퇴 절차를 밟고 있다.
미국이 WHO 회원국에 탈퇴 동참을 촉구하고 나선 것은 이미 중국의 영향력이 막대해진 WHO를 축소시키고, 이에 대항하는 새로운 국제 보건기구 설립을 구상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케네디 장관은 “우리는 제약회사, 적대국, 그리고 그들의 (비정부기구) 대리인들의 부패한 영향력에 의한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국제 보건 협력을 해방시키기 원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폴리티코는 “WHO에 대항하는 국제적 보건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케네디 장관은 또 중국을 겨냥해 “국제적 보건 협력은 트럼프 대통령과 나에게 여전히 매우 중요하지만, 코로나19 시대의 실패에서 알 수 있듯이 WHO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코로나19의 기원과 관련 ‘중국 실험실 유출설’을 언급하며 WHO가 중국의 정치적 압력에 굴복해 이를 은폐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했다. WHO가 중국 정부의 영향을 과도하게 받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中 “5억 달러 더 지원”, 소프트파워 강화 목적
반면 중국은 미국의 탈퇴 선언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한 WHO의 구원투수를 자처하고 나섰다. 같은 날 류궈중(劉國中) 중국 국무원 부총리는 WHA 연설에서 "중국은 앞으로 5년간 WHO에 5억 달러(약 6,900억원)를 추가 지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어 “일방주의와 힘의 정치가 세계 보건 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다자주의뿐”이라며 “이번 기부를 통해 WHO가 독립적이고 전문적이며 과학적 원칙에 따라 운영될 수 있도록 보장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WHO에 따르면 2024-2025년 미국은 WHO 전체 예산의 10% 이상인 7억 달러(약 9,663억원) 이상을 지원했다. 같은 기간 중국의 기여액은 2억 달러(약 2,760억원) 수준이었다. 중국의 이번 추가 기부가 확정되면 미국의 탈퇴 이후 중국은 WHO의 최대 기부국으로 올라서게 된다. WHO는 최근 재정난으로 2026-2027년 예산을 21% 삭감했으며, 회원국 분담금을 2년간 20%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중국의 추가 지원을 계기로 중국의 '소프트파워'가 한층 더 막강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영국 비영리 학술 매체인 더컨버세이션은 "중국은 의료 인프라에 대한 자금 지원과 의료 전문가 양성으로 세계 보건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 중 하나로 성장했다"며 "앞으로 중국은 WHO에서 양자 및 지역 개발 강화에 계속 참여하고, 특히 서하라 이남 아프리카 전역에서 글로벌 건강 소프트파워 의제를 확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통상 국제 정치에는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 두 가지 힘이 작용한다. 하드파워는 전통적 국력의 요소인 군사력과 경제력 등 물리적 힘을 뜻하며, 소프트파워는 상대방을 압박하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상대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힘이다. 소련 해체 후 미국을 견제할 세력으로 떠오른 중국은 소프트파워에 주목했다. 군사·경제·인프라 등 하드파워의 약점을 보완할 동안 비교 우위를 가질 강점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UN·파리기후협약서도 기여 확대
중국의 소프트파워 확대는 WHO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국은 UN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중 UN 평화유지군에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있는데, 지난주 둥쥔 중국 국방부장은 유럽을 방문해 중국이 평화유지 활동에 더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미 중국은 2019년 일본을 제치고 UN 분담금 액수가 두 번째로 많은 나라가 됐고, 분담금 비율도 지속적으로 높이고 있다. 이는 2001년 이후 22%를 유지하는 미국에 근접한 수치다. 특히 트럼프 1기 행정부 마지막 해인 2021년과 비교하면 8%포인트 늘었다. UN 측에서도 중국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UN 기후 책임자인 사이먼 스틸은 앞서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COP29(29차 UN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정상회의에서 "우리는 중국의 지속적인 리더십이 필요할 것"이라며 기후 산업에서 중국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또한 미국이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한 반면, 중국은 파리기후협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재생에너지 전환도 지원하고 있다. 앞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국제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중국은 적극적인 기후변화 대응을 늦추지 않을 것이고 국제 협력을 촉진하려는 노력을 약화하지 않을 것"이라며 "인류 운명공동체 구축을 추진하는 실천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다자주의 수호와 국제 협력 심화, 공정한 녹색 전환, 실질적 조치 강화 등 4가지를 당부하면서 중국이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 참여할 것임을 피력했다.
중국이 국제기구에서 소프트파워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데는 국제 규범을 자국 기호에 맞게 재형성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현재 중국은 영향력을 이용해 대만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만은 중국의 압박으로 지난 9년간 WHO 총회 참석이 금지된 상태다. 지난 19일 중국 외교부는 성명을 통해 “중국의 대만 지역은 중앙 정부의 승인 없이는 WHA에 참여할 근거, 이유 또는 권리가 없다”고 다시 한번 밝혔다.
최근 중국 정부가 ‘국제조정원(國際調停院)’ 설립을 추진하고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중국 정부 발표에 따르면 오는 30일 국제조정원 설립과 관련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의 서명식이 홍콩에서 열린다. 서명식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유럽 등 세계 60여 개국 및 20여 개 국제기관 대표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마오닝(毛寧)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조정을 통해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세계 최초의 정부 간 조직이 될 것”이라며 국제조정원이 UN 헌장의 원칙을 지키는 데 있어 중요한 기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