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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계급별 인구 조사 착수 복지 정책 정밀도 제고 조치 교육 양극화, 미래 성장 좀먹어

인도가 차기 인구 조사 과정에서 신분제인 ‘카스트’ 구성을 확인하기로 했다. 영국에서 독립 후 80여 년 만에 공식적으로 계급별 인구 구성을 파악하는 시도가 이뤄지는 것이다. 복지 정책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한 조치지만, 계급 문제를 새삼 부각시켜 갈등을 야기할 것이란 비판도 적지 않다.
1931년 이후 처음으로 전 국민 카스트 세부사항 조사
29일 일본 경제신문 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인도 정부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상세한 카스트 인구조사를 시작한다. 아시위니 바이시나우 인도 정부 대변인은 “내각 정무위원회가 인구 조사에 카스트 항목을 포함하기로 결정했다”며 “이는 정부가 사회 전체의 가치와 이익을 중시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밝혔다.
카스트 정보가 인도 공식 인구조사에 포함된 것은 영국 식민통치 시기였던 1931년이 마지막이다. 1947년 독립 이후 인도 정부는 행정적 부담과 사회 불안 등을 이유로 카스트 조사를 미뤄왔다. 지난 2011년 별도 카스트 조사가 있었지만 신뢰도가 낮다는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다. 이번 조사가 예정대로 이뤄진다면 독립 이후 처음으로 인도 카스트 구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정부는 1947년 공식적으로 카스트제도를 폐지한다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수백 개로 분류된 신분이 유지되고 있다. 약 3,000년 전 시작된 카스트 제도는 11억 명의 인도 힌두교도를 브라만(성직자), 크샤트리아(귀족), 바이샤(상인), 수드라(노동자) 4계급으로 나눈다. 이들보다 아래인 불가촉천민 계층은 공식 분류조차 되지 않는다. 불가촉천민에 대한 폭력·살인은 범죄라고 인식하지 않을 정도다.

학생 2.6억 명 상당수 기초학력 미달
인도 정부가 카스트 인구 조사에 나선 건 인도의 빈부격차가 경제 성장을 좀먹고 있어서다. 인도는 상위 10%가 전체 부의 77%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세계은행(WB)은 “인도의 경제 성장이 지속 가능하려면 고용 창출과 소득 분배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인도의 경제 성장 모델이 양적 성장뿐만 아니라 질적 성장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빈부 격차에 따른 ‘질 나쁜 교육’은 성장의 장애물이 되고 있는 형국이다. 인도는 인구 평균 연령이 29세에 불과할 만큼 젊고 붐비는 나라다. 2023년 기준 총 학생 수는 2억6,523만 명, 각급 학교는 149만 개교에 이른다. 그러나 인도 전체 어린이의 4분의 3에 이르는 농촌지역 아동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간 교육 현황 보고서(ASER·2022)에 따르면 기초학습 능력이 심각한 수준이다. 수학의 경우 5학년(10세) 아동 26%만이 기본적인 나눗셈을 할 수 있었다. 8학년 읽기 시험에서는 2학년 수준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아동이 70%도 되지 않았다.
또한 인도는 고등교육 진학률이 상당히 낮다. WB에 따르면 인도 중부 차티스가르주(州)의 초등학교 등록률은 95%인 반면 고등학교 등록률은 57.6%에 불과하다. 이에 인도 정부가 교육의 양적 확장을 꾀하면서 최근 10년간 학교 시설 수준과 상급 학교 진학률을 꾸준히 높였지만, 성적 추이는 제자리걸음이다.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간 격차도 벌어졌거나 비슷하게 유지됐다. 2학년 수준의 글을 읽을 수 있는 8학년생이 사립학교에서는 80%였으나 공립학교에서는 66%에 불과했다. 2017년 공립학교에 대한 교육당국 불시 조사에서는 교사 4분의 1가량이 결석한 것으로 나타났다.
빈부-교육 격차 갈수록 심각
전문가들은 학력 저하의 주요 원인을 인도 특유의 엘리트 교육에서 찾는다. 영국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인도 정부는 빠르게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소수 명문대, 소수 엘리트를 키우는 데 교육의 초점을 맞췄고 지금까지 이를 유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인도 싱크탱크 정책연구센터(CPR) 야미니 아이야르 센터장은 인도 교육이 “줄 세우기 식”이라며 “맨 앞 두 줄만 가르치는 시스템”이라고 꼬집었다.
엘리트 교육의 최전선에는 델리인도공대(IIT Delhi)가 있다. 1951년 설립된 IIT는 순다르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해 미국 실리콘밸리를 주름잡는 수많은 인도계 엔지니어를 배출했다. IIT 입시 경쟁도 치열해 학부모들이 비싼 사교육비를 대기 위해 집을 팔거나 대출을 받는 일도 벌어진다.
반면 대다수의 학생들이 다니는 공립학교나 등록금이 저렴한 사립학교에서의 기초교육은 교육당국의 우선순위에서 벗어나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라지 쿠마르는 “카스트 제도의 잔재로 극심한 빈부 격차가 교육 격차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카스트별 수치를 공개할 경우, 계층 간 갈등을 부추기고 차별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다. 이미 인도는 독립과 함께 헌법을 개정하며 카스트에 따른 차별을 금지했다. 그러나 다른 계급 간 결혼이 금기시되는 등 여전히 인도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적폐로 지적돼 왔다. 여당 인도인민당(BJP) 역시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킬 것”이라며 그간 카스트 조사를 반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