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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십야드 명의·한미 공동건조 방식
기술 전수 박차, MRO 시장 겨냥 포석
미래 먹거리 관건은 ‘지속 가능성’

한화오션이 미국에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수주를 따내며 연간 최대 74억 달러 규모에 달하는 미 군용 함정 정비·보수·운영(MRO) 시장 진출에 시동을 걸었다. 지난해 인수한 미국 현지 조선소에 한국의 기술을 이식해 경쟁력을 높이고, 현지 인프라를 기반으로 장기 프로젝트 수주를 노리는 전략이다. 이에 한국 정부도 전방위적 지원을 모색하는 가운데, 현지 협력 생태계와 기술 신뢰 구축 여부가 지속 가능성의 핵심 변수로 떠오르는 양상이다.
기술 전수·노하우 이전, ‘한화표 조선소’ 구축 본격화
22일 공시에 따르면 한화오션은 최근 한화필리십야드(Hanwha Philly Shipyard)로부터 2억5,000만 달러(3,480억원) 규모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1척에 대한 건조 계약을 체결하고, 추가 1척에 대한 옵션 계약도 함께 확보했다. 한화그룹은 “이번 계약은 미국 조선·해운산업 재건 및 에너지 안보 강화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됐다”며 “미국 연방정부가 2029년부터 단계적 시행 예정인 미국산 LNG 수출 운송 의무화 정책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 가치가 크다”고 강조했다.
이번 계약은 필리십야드가 한화오션 계열사인 한화해운이 발주하는 LNG운반선을 수주하고, 이를 다시 한화오션에 하청하는 구조로 이뤄졌다. 실질적인 선박 건조는 대부분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에서 이뤄지고, 필리십야드는 미국 해양경비대(USCG)의 미국 법령·해양안전 기준을 충족하기 위한 인증 작업을 지원한다는 설명이다. 한화오션은 이 같은 협력 건조 체계를 기반으로 미국에서 LNG 운반선을 건조할 수 있는 역량을 확충하는 것은 물론 한국의 고도화한 조선 기술을 필리십야드에 단계적으로 이양할 계획이다.
업계는 이번 수주를 두고 한화오션의 미국 진출 전략과 필리십야드의 재정비가 맞물린 결과로 해석했다. 필리조선소를 전신으로 하는 필리십야드는 지난해 한화에 인수된 이후 대규모 시설 투자와 현대화 작업을 통해 상선 건조 역량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 왔다. 기술 전수와 인력 재교육, 생산 공정의 디지털화 등을 통해 필리십야드를 ‘한국형 조선소’로 재탄생시킨다는 게 한화의 구상이다.

MRO 시장, 단가·수익률 높고 안정적 장기 수주 가능
한화오션이 미국에서 대형 선박 수주에 성공하면서 군용 함정 MRO 시장 공략도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이번 LNG 운반선 수주가 상징적 의미를 가진 첫발이라면, 향후 이뤄질 대규모 MRO 프로젝트는 본격적인 수익성 확보를 위한 ‘진검승부’란 분석이다. 미 회계감사원(GAO)에 의하면 미 해군은 전함 MRO 사업에 연간 60억∼74억 달러(약 8조8,000억∼10조8,000억원)를 지출하고 있으며, 자국 조선 인프라의 한계로 인해 해외 업체나 다국적 기업이 수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구조다.
한화오션은 필리십야드 내 생산 및 정비 인프라를 적극 활용해 미 해군의 다양한 선박 유지보수 입찰에 참여할 계획이다. 동시에 기존 한국 본사의 조선 기술과 운영 노하우를 미국 현지 조선소에 전수하는 형태로 기술 신뢰도 확보와 조달 효율성 강화도 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기술 이전을 앞세운 정비 패키지 세일즈’ 전략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향후 미국 해군과의 장기 공급 계약 확보 여부에 따라 북미 시장 내 한화의 입지 또한 강화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실제로 한화오션은 이번 LNG 운반선 수주와 동시에 필리십야드의 설계 및 생산 능력을 단계적으로 고도화하는 작업에 착수한 상태다. 기존 미국 조선소들이 디지털 조선 기술과 고속 선박 건조 시스템 등에서 뒤처졌다는 점을 고려해 한국의 최신 조선공학 기술을 접목한 필리십야드를 ‘미국형 조선 혁신 모델’로 선보이겠다는 포부다. 이 같은 기술 중심의 투자 전략은 단순한 외형 확장을 넘어 고부가가치 프로젝트를 장기적으로 유치하기 위한 밑그림으로 풀이된다.
수주 낙수효과 기대한 정부도 지원사격
나아가 한화오션은 단기 수주 실적에 머물지 않고 미국 내 MRO 생태계의 핵심 공급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장기 전략 또한 가다듬는 중이다. 최근 인도·태평양 지역 15개 중소 조선사 및 해양기업들과 함께 ‘MRO 클러스터 협의체’를 구축한 것도 장기 전략의 일환이다. 해당 협의체는 선체 정비, 부품 공급, 시스템 점검 등 복수의 역할을 분담하며 한화오션 중심의 지역 정비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기존의 독립형 외주 운영 구조에서 벗어나 협업 기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입찰 경쟁력은 물론 실질적인 운영 효율을 확보하려는 취지다.
정부도 이 같은 전략을 지원사격하고 나섰다. 일례로 산업통상자원부는 국내 기업들이 미국의 사이버보안인증(CMMC)을 취득하도록 돕는 지원 사업 확대를 검토 중이다. CMMC는 미국 국방부와 계약하려는 기업이 사이버보안 수준을 인증받아야 하는 제도로, 군함 정비 업체들에도 필수 관문으로 꼽힌다. 정부는 이를 간소화해 대형 조선사는 물론 이들의 협력업체인 중소기업들이 CMMC를 수월하게 받게 하고, 종국에는 MRO 수주 물량을 원활하게 확보하도록 돕는다는 구상이다.
전문가들은 진정한 성과 창출을 위해선 단기 수주 실적을 넘어서는 장기 프로젝트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미국 정부의 국방 예산 집행 구조상 단일 발주보다 다년간 유지·보수가 수반되는 MRO 계약이 기업에 더 높은 안정성과 수익률로 이어진다는 판단에서다. 이는 곧 단가 경쟁보다는 기술력과 신뢰 기반의 장기 공급 관계를 맺는 것이 북미 시장 내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한화오션의 미국 MRO 전략은 조선소 자체 경쟁력뿐 아니라 물론 현지 파트너들과의 유기적인 협업 네트워크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구축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릴 전망이다. MRO사업은 조선·정비 시스템의 기술력과 속도, 비용 효율성은 물론 인력 운용과 공급망 체계, 규제 대응 능력 등 종합적 역량이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현지 생산-정비-지원이 하나의 사이클로 연결되는 구조가 구축되고, 여기에 정부의 전략적 후방지원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고부가가치 산업 주도권 확보가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