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제동·스닉플레이션 맞닥뜨린 美 관세 정책, 트럼프 행정부는 여전히 "관세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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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통상 참모 "관세 정책 무효화되면 미국 끝날 것" 막대한 美 재정 적자, 관세 수입으로 메꾼다? 관세發 물가 상승 흐름 가시화, '스닉플레이션' 공포 확산

미국 연방 정부 측 인사가 관세 정책이 무효화될 경우 미국이 '끝날 것'이라는 강경 발언을 내놨다. 미국 법원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한 관세 부과가 위법이라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정책에 제동을 걸자,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비판적 견해를 드러낸 것이다. 이는 관세 수입이 재정 적자 해소의 열쇠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판단에 따른 행보로 풀이된다.
트럼프 '관세 정책' 암초 맞닥뜨려
지난달 31일(이하 현지시각) CNBC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통상 참모인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 고문은 이날 폭스뉴스에 출연해 연방순회항소법원이 최근 내린 관세 관련 판결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이번 판결은 최악의 무기화된 당파적 불의였으며, 정치인들이 법복을 입고 나온 것과 같다”면서 “만약 우리가 이 사건에서 패소한다면 트럼프 대통령 말대로 미국의 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달 29일 연방순회항소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부과한 상호관세를 7 대 4로 위법이라 판단했다. 재판부는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면 대통령에게 여러 조치를 할 수 있는 상당한 권한이 부여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관세나 세금 부과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짚었다. 지난 5월 1심 법원인 미 연방국제통상법원은 같은 법리를 들어 상호관세 발효를 금지했고, 트럼프 행정부는 이에 반발하며 항소한 바 있다.
이번 판결은 상호관세뿐만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 펜타닐 유입을 이유로 중국·캐나다·멕시코에 부과한 관세, 중국에 보복성으로 부과한 관세 등 총 5개 관세에 적용된다. 다만 항소법원은 정부에 상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오는 10월 14일까지 판결 효력 발생을 유예하기로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재정 적자 해소 전략
미국 정부 측이 법원의 판결에 강하게 반발하는 이유는 관세가 재정 적자를 메꿔줄 '핵심 열쇠'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지난 23일 미국 의회 산하 의회예산국(CBO)은 관세 조치가 유지될 경우 향후 10년 동안 미 연방정부 재정 적자가 3조3,000억 달러(약 4,570조원), 재정 적자에 따른 연방정부의 이자 지급액이 7,000억 달러(약 969조원) 줄어들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앞서 CBO가 지난 6월 제시했던(재정 적자 2조5,000억 달러, 이자 지급액 5,000억 달러 감소) 추산치 대비 상향 조정된 수치다.
미 재무부에 따르면 현시점 연방정부의 부채는 약 37조1,800억 달러(약 5경1,487조원)에 달한다. 지난해 11월 말 36조 달러(약 4경9,853조원)를 돌파한 지 8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37조 달러를 넘어선 것이다. 이에 더해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공약과 핵심 국정 과제를 반영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OBBBA)이 통과됨에 따라 향후 10년간 미국 재정 적자는 3조4,000억 달러(약 4,708조 원) 추가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추가 수입이 절실한 상황인 셈이다.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의 구상과는 달리 관세 수입 확대 속도가 재정 적자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회계연도 첫 10개월 동안 미국이 거둔 관세 수입은 총 1,357억 달러(약 188조7,59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116% 늘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노인을 위한 메디케어와 빈곤층을 위한 메디케이드를 포함한 정부 의료 프로그램 비용은 1,410억 달러(약 194조7,400억원) 증가했고, 사회보장 연금 프로그램 비용과 공공 부채 이자 역시 각각 1,080억 달러(약 150조 2,280억원), 570억 달러(약 79조2,870억원) 확대됐다. 사실상 관세 수입이 연방 정부 지출을 상쇄하지 못한 것이다.

美 뒤덮는 스닉플레이션의 그림자
관세 정책으로 인해 미국의 인플레이션 위기에 다시 불이 붙었다는 점 역시 악재다. 소위 스닉플레이션(Sneakflation)’이 현실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닉플레이션은 비용 부담이 기업과 유통망을 거쳐 소비자에게 조금씩 전가되며 서서히 체감되는 가격 인상을 가리키는 용어다. 경제에 즉각적인 충격은 없지만, 장기적으로 가계 부담을 늘리는 보이지 않는 인플레이션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인플레이션 흐름이 점진적으로 심화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지난달 10일 골드만삭스는 6월까지는 소비자가 관세 비용의 22%를 지불했지만, 10월에는 그 비중이 67%로 치솟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연구팀도 지난달 8일 수입품 가격이 관세 이전보다 평균 5%, 국내 생산품 가격은 3%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연구를 이끈 알베르토 카발로 교수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효과가 바로 드러나지 않고 1~2년에 걸쳐 서서히 소비자 가격에 반영된다”며 “소비자들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언제 이렇게 비싸졌지?’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짚었다.
미국의 물가 상승 흐름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달 14일 미 노동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7월 미국의 생산자물가지수(PPI)는 전달 대비 0.9% 상승했다. 이는 월가 전문가들의 예상치(0.2% 상승)를 대폭 웃도는 수치이자, 2022년 6월(0.9%) 이후 최대 상승 폭이다. 변동성이 큰 식품과 에너지, 무역 서비스를 제외한 PPI도 전달보다 0.6% 올라 2022년 3월(0.9%) 이후 가장 큰 상승 폭을 기록했다. 이와 관련해 한 시장 전문가는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 정책을 최대한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소비자와 기업의 비용 부담을 빠르게 완화할 필요가 있다"며 "시장이 한동안 요동치는 걸 피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연착륙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