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發 공급망 연쇄 쇼크, 팬데믹 넘어서는 역대급 경제 충격
중동發 공급망 연쇄 쇼크, 팬데믹 넘어서는 역대급 경제 충격
입력
수정
지정학적 위기가 촉발한 원자재 전쟁 주요 산업 원재료 공급망 파괴 팬데믹 때보다 물자 부족 심각

이란 전쟁의 불길이 호르무즈 해협을 집어삼키면서 글로벌 공급망이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알루미늄과 석유화학 원료를 비롯한 핵심 소재의 수급이 막히면서 세계 제조업은 전례 없는 수급난에 놓였고, 이는 곧바로 전방위적인 가격 폭등과 산업 현장의 마비로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에너지와 산업 기초 원자재가 동시에 차단된 이번 사태가 과거 지정학적 위기를 뛰어넘는 복합 타격이 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알루미늄 수급 비명, 4년 만에 최고가 경신
23일(이하 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전쟁 영향으로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하며 글로벌 기업들이 알루미늄을 수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알루미늄은 전기차 경량화, 배터리 케이스, 휠, 차체 부품, 전장 부품에 폭넓게 쓰인다. 대체가 쉽지 않은 소재라는 점에서 수급 차질은 세계 제조업에 직접적인 부담이 된다. 중동은 전 세계 알루미늄 제련 능력의 약 9%를 차지하는 핵심 생산 거점으로, 연간 생산량은 700만 톤(t)에 이른다.
글로벌 원자재 중개사 머큐리아(Mercuria)는 중동 전쟁으로 글로벌 알루미늄 시장이 심각한 '블랙스완(일어날 가능성은 작지만 발생 시 치명적인 돌발 사건)' 상황을 겪고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올해 말까지 글로벌 알루미늄 시장이 최소 200만 톤의 공급 부족(Deficit)에 직면할 것으로 추산했다. 머큐리아의 닉 스노든(Nick Snowdon) 금속·광업 연구책임자는 “이 추정치조차 낙관적”이라며, 원료인 알루미나(Alumina)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원활히 공급돼 2분기 중 일부 제련소가 가동을 재개한다는 보수적인 가정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전 세계 가시적 재고는 약 150만 톤, 비가시적 물량을 합쳐도 300만 톤 수준에 불과하다. 시장을 방어할 완충 재고(Buffer)가 사실상 한계치에 다다른 셈이다. 만약 중동 분쟁이 장기화해 알루미나 공급망이 완전히 차단될 경우 공급 부족 규모는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중동발 공급 물량을 단기간에 대체할 수단이 없다는 점은 사태의 심각성을 더한다. 세계 최대 생산국인 중국은 연간 생산 한도를 4,500만 톤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 내 유휴 설비 역시 즉각적인 가동 재개가 어려운 처지다.
이 같은 수급 불안은 실물 거래 가격에 붙는 추가 비용인 ‘프리미엄’ 폭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 내 알루미늄 물리적 프리미엄은 톤당 약 2,521.50달러(약 373만원)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유럽 또한 톤당 599달러(약 88만8,000원)로 4년 만에 최고 수준을 나타냈다. 런던금속거래소(LME) 알루미늄 가격은 지난 16일 톤당 3,672달러(약 544만원)까지 치솟았는데, 이는 역대 최고치였던 2022년 3월(4,073달러·약 603만원)에 근접하는 수치다.
이에 알루미늄 수입의 30%를 중동에 의존하는 일본 산업계는 러시아산 알루미늄으로 눈을 돌리는 고육지책까지 검토 중이다. 러시아는 세계 알루미늄 생산 5%를 차지하는 주요 공급국이다. 러시아 알루미늄 업체 루살(Rusal) 일본 사무소에 따르면, 최근 일본 제조업체들로부터 제품 사양과 조달 가능 여부에 대한 문의가 급증하고 있다. 러시아산은 호르무즈 해협의 폐쇄 여부와 상관없이 내륙 운송이 가능해 지정학적 리스크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강점이 있다. 일본은 2021년까지만 해도 러시아로부터 상당한 양의 알루미늄을 구매했으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사회 제재에 동참하며 수입량을 90% 이상 감축했다. 러시아산 수입 확대는 '전쟁 자금 지원'이라는 서방 국가들의 비판을 불러올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루살 외에 대체할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다.
나프타·요소·황·헬륨 등도 공급망 단절
알루미늄뿐만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필수 소재들이 호르무즈 해협 너머에 갇히면서 파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특히 중동이 글로벌 공급의 45%를 담당해 온 석유화학의 뿌리 나프타의 수급이 끊기면서 글로벌 주요 석유화학사들은 ‘공급 불가항력’까지 선언하고 나섰다. 나프타에서 파생되는 에틸렌·폴리에틸렌은 식품 포장재와 PET병, 배터리용 도전재와 분리막, 의료용 고무장갑·합성섬유에 이르기까지 소비재 전반의 원료다. 이 때문에 세계 전역에서 비닐 포장재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식량 생산의 근간인 비료와 차량용 요소수의 원료인 요소 공급도 동시에 차단됐다. 지난 2월 미국의 이란 공습 이후 이후 비료의 원료가 되는 국제요소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요소의 핵심 원료는 천연가스인데, 전 세계 요소 수출 물량의 31%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공급이 중단됐다. 최근 한 달 사이 중동 지역 요소 가격은 이집트 항구 출하가 기준으로 2배 이상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석유·화학 기반 제조업은 물론 농업 등 식량 생산 분야에서도 타격이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석유와 가스 생산 과정에서 부산물로 생성되는 황의 수급에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황은 황산으로 전환되는데, 황산은 ‘화학의 왕’으로 불리며 비료·금속·제약 산업 전반을 떠받친다. 에너지 생산을 압도적으로 주도하는 중동은 세계 황 공급도 좌우한다. 세계 황 수출의 절반 가량이 중동에서 나오며, 주로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미국 등으로 수출된다. 그러나 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교착 상태가 이어지면서 이런 흐름은 사실상 차단됐다. 황의 공급 차질은 황→황산→니켈·코발트 제련→전기차 배터리로 이어지는 연쇄 고리를 타고 충격이 번지고 있다.
반도체 소재 충격도 현실화하고 있다. 세계 헬륨 공급의 30%를 차지하는 카타르발 수출이 중단되면서 반도체 웨이퍼 냉각·식각과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 공정에 필수적인 고순도 헬륨 수급이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관련 기업들은 재사용 시스템 구축과 공급망 다변화에 나서고 있지만, 사태가 길어지면 일정 수준 이상의 공급 차질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이 밖에도 화석연료에서 원재료를 뽑아내는 플라스틱 제품, 그것과 직·간접 관련이 있는 백신과 주사기, 즉석 식품, 스포츠웨어 등 그동안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제품들까지 공급 차질이 빚어지는 형국이다.

건설·제조·의료·여행 동시 충격, 전 세계로 확산 예고
중동발 공급 차질에 따른 충격파는 이미 산업계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내달 중 전국 건설 현장이 멈춰설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자재별 수급 상황을 보면 도로 포장의 주원료인 아스콘의 타격이 가장 크다. 아스팔트 생산량 감축으로 지난달 기준 공급량이 전년 동기 대비 70% 급감했으며, 가격은 중동 전쟁 이후 30% 가까이 치솟았다. 다른 부자재 가격도 오름세다. 레미콘 혼화제는 최대 30%, 단열재는 40% 이상 올랐고, 접착제는 30~50%의 인상 폭을 기록했다. 철근과 플라스틱 창호 등 주요 자재들도 10% 내외의 가격 상승이 파악됐다.
운송 부문의 타격도 크다. 전쟁 발발 직후 아시아 전역에서 항공·해운·육상 운송이 급격히 위축됐고, 항공업계는 혼란 상태에 빠졌다. 지난달 전 세계 항공편 취소는 9만2,000편을 넘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집중됐다. 항공유 가격 급등과 공급 불안으로 주요 항공사들은 노선을 대폭 축소하거나 중단하고 있다. 일부 저가 항공사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으며, 항공 수요는 이미 3분의 1가량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운송 차질은 관광과 서비스업에도 직격탄이 됐다. 항공료가 세 배 가까이 급등하면서 호텔과 여행업, 외식업은 수요 붕괴를 겪고 있다. 호주 내륙이나 히말라야 산악 지역 같은 외딴 지역은 더욱 고립되고 있으며, 일부 지역 호텔의 객실 점유율은 80~90% 급감했다.
제조업 역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아시아 주요 수출 산업은 중동산 에너지와 원자재에 크게 의존하는데, 전쟁 7주 만에 재고가 바닥나면서 생산 축소가 잇따르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니켈 산업은 천연가스와 황 부족으로 생산량을 최소 10% 줄였고, 방글라데시 의류 산업은 원자재 가격 급등과 공급 지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석유에서 파생되는 폴리에스터와 나일론 생산 차질도 이어지며 글로벌 의류 공급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같은 경제 충격은 곧바로 시민들의 삶을 압박하고 있다. 국제연합(UN)은 최근 보고서에서 전쟁 장기화 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최대 880만 명이 빈곤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사회 안전망이 취약한 국가에서는 의약품과 백신 공급 차질, 교육 중단, 환경 오염 증가 등 복합적인 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인도에서는 연료 부족으로 산업 단지가 멈춰서면서 노동자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필리핀에서는 연료 가격 급등에 항의하는 운송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지고 있다.
아시아가 특히 큰 타격을 받는 이유는 구조적 취약성 때문이다. 아시아는 중동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고, 국경을 넘나드는 복잡한 공급망 역시 화석연료에 크게 의존한다. 여기에 전쟁 이전부터 전력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충격이 증폭됐다. 중국 등 일부 국가는 상대적으로 높은 비축량과 재정 여력을 갖추고 있으나, 지역 전체로 보면 미국이나 유럽에 맞먹는 경제 규모를 가진 아시아 국가들이 광범위하게 압박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충격이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보다 더 심각하다고 입을 모은다. 코로나 팬데믹 때는 수요가 무너졌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는 에너지 공급이 흔들렸지만, 이번에는 에너지와 산업 공급망 모두 충격을 받은 복합 타격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 사태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에너지 공급 차질’로 규정했고, 하버드대 케네스 로고프(Kenneth Rogoff)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50년간 가장 큰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충격’이라고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