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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기업 부채 규모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보다 2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또한 상황이 비슷한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금융당국이 가계 대출 비대화의 주원인을 주택담보대출로 꼽으면서 은행권에 관련 압박을 가하자, 수익 유지를 위해 은행권이 기업 대출 영업 강화에 나서면서 해당 대출 규모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한편 전문가들 사이에선 부채로 쌓아 올린 경제의 버블이 터질 경우 그 충격이 글로벌 금융위기에 필적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심지어 일각에선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경기 침체가 훨씬 장기화될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비대해져가는 전 세계 기업 부채
12일 닛케이신문에 따르면 금융사를 제외한 글로벌 7,689개 기업 올해 2분기 부채 잔액은 총 12조758억 달러(약 1경6,910조원)로,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8년 4분기의 6조6,000억 달러(약 8,747조3,760억원)보다 92% 증가한 규모다.
급격히 가중되고 있는 이자비용도 기업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2020년 2분기 이자비용 증가율은 전년 동기 대비 1%에 불과했으나, 올해 2분기엔 약 1,250억 달러(약 165조6,306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약 20% 증가했다. 이자비용 증가율은 최근 5분기 연속 두 자리 수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일수록 이자 상환 부담은 더 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 신용평가사 S&P 글로벌에 따르면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의 경우 변동 금리 부채가 전체 대출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미 연준(Fed)의 긴축 재정이 계속됨에 따라 이자비용 대비 영업이익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채무 불이행 기업도 늘고 있다. 신용평가사 무디스에 의하면 전 세계 기업 중 48개 기업이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40% 증가한 것으로 3년 만에 최고치에 해당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각에선 장기 부채로 쌓아 올린 경제 성장 거품이 곧 꺼질 것이란 예측도 나오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 정부는 신용경색에 대응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앞다퉈 낮춘 바 있다. 특히 벤 버냉키 당시 미 연준 의장은 2008년 12월 금리를 0% 가까이 떨어뜨리면서 무너지는 통화승수에 대응하고자 했다. 한국 또한 당시 5.25%이던 기준금리를 2%까지 낮추는 등 적극적인 통화 완화 정책을 펼쳤다.
이에 자금 조달이 용이해진 기업들은 차입을 통해 적극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거나, 인수합병(M&A)을 통해 몸집을 불리면서 채무는 꾸준히 증가해 왔다. 심지어 여기에 코로나19로 인해 이른바 '유동성 파티'가 한 번 더 이어지면서 기업들의 부채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크게 늘어났고, 더 이상 커져가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디폴트 상태에 빠지면서 본격적인 경기 침체 국면에 접어들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한국 기업 대출 규모도 늘어나고 있는 상황
우리나라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우리 금융당국이 급증하는 가계 대출에 대응하기 위해 은행권을 옥죄고 있는 가운데, 은행들이 활로를 찾고자 기업대출 잔액을 늘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2분기 가계부채 잔액은 1,862조8,000억원으로 전 분기 대비 9조5,000억원 늘었다. 이는 올 2분기에만 전 분기보다 14조원 늘어난 주담대 급증이 주원인으로 꼽힌다. 이에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유관기관과 함께 은행권에 대한 연이은 현장점검을 나서면서 50년 만기 주담대에 대해 연령 제한을 걸게 하는 등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예대마진 수익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은행권이 기업 대출 영업을 강화하면서 관련 대출 규모가 커졌다는 설명이다.
13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의 기업대출 잔액은 지난달 말 기준 737조4,893억원으로 전달 대비 8조5,794억원 늘었다. 지난 2월엔 전월 대비 3조3,195억원 증가했는데, 3‧4월엔 오름폭이 4조원대로 확대된 데 이어 7월에는 6조원대, 지난달에는 8조원대의 증가폭을 보이면서 기업대출 규모가 올해 들어 꾸준히 커지는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들어 국내 회사채 시장이 위축돼 은행 문을 두드리는 기업이 증가한 것도 기업 대출 규모 급증의 원인으로 꼽힌다. 한국은행의 고금리 여파로 인해 기업들이 아무리 높은 채권 금리를 제시해도 회사채 발행을 통한 자금 확보가 어려워 자금 조달의 대안으로 은행을 찾았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6월 연 4.3%대였던 신용등급 AA-회사채 금리는 지난달 4.5%를 기록한 데 이어 이달 들어선 4.6%까지 치솟았다. 이와 관련해 정광명 DB금융투자 연구원은 "시장 참여자들의 회사채 수요가 줄면서 기업의 은행 대출 수요는 늘고 있다"며 "특히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에 대해서도 리파이낸싱이 이뤄져야 하는 만큼 기업대출 증가세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現) 부채 사이클 국면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처럼 최근 전 세계 기업 부채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두 배 이상 커진 점을 두고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부채로 쌓아 올린 경제 버블이 터지면 2008년보다 더 큰 경제적 충격이 찾아올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이들은 올해 3월 미국 SVB 은행을 필두로 시작된 시그니쳐은행,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의 연쇄 디폴트가 2008년 금융위기 발발 당시의 피해 규모액를 훨씬 상회하는 점을 논리로 삼는다. 올해 문제가 된 세 은행의 자산규모는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개입 직전 기준 총 5,490억 달러(약 727조1,175억원)로, 25개 은행이 파산한 2008년 금융위기 당시 FDIC가 인수한 은행 자산 규모는 3,740억 달러(약 495조3,405억원)을 웃돈다.
반면 일각에선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올해 SVB발 연쇄 디폴트 피해 규모와 2008년 금융위기 피해 규모가 큰 차이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예컨대 2007년 10월 CPI를 100으로 두고 2023년 8월 기준 현재 CPI는 146.4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촉발 당시 물가보다 46.4% 상승했다. 다시 말해 2008년 피해 금액인 3,740억 달러의 현재 가치는 약 5,475억 달러(약 725조1,966억원)임을 감안하면 규모 차원에선 올해의 은행 위기와 별다를 부분이 없단 얘기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기업 부채 급증으로 촉발될 경기 침체가 2008년 금융위기보다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부분에선 대부분 합의가 이뤄지고 있는 분위기다. 이와 관련해 전직 IB 업계 관계자 A씨는 "과거 1980년대 산유국의 오일머니를 기반으로 유동성이 풍부해진 금융기관이 대출 촉진을 위해 기업 부채를 급격하게 늘리면서 터진 경제 위기는 10년간 지속됐고, 현재는 당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버블이 터지면 기업과 가계의 자본지출 감소가 지속되고 이는 결국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