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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화학 업계 ‘실적 악화·생산 축소’ 시름 이사회 승인만으로 간이·소규모 합병 가능 상시화한 기활법, 산업 특성 고려는 과제로
중국의 과잉 공급 여파에 시름하는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본격 구조조정에 들어간다. 정부는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기활법) 기준을 완화해 석유화학 업종에 적용하고, 선제적인 사업 재편을 유도하기로 했다. 다만 해당 법 적용을 위한 과잉 공급 판단 기준이 산업별 특성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지적 또한 쏟아지고 있어 개선이 필요한 실정이다.
실적 악화에 생산라인 멈춘 기업들
11일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경기 시흥시 한화오션 시흥 R&D캠퍼스에서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산업경쟁력 강화 방안을 제시했다. 당초 9일께 열릴 예정이었던 관계장관회의는 계엄 사태 등으로 연기돼 이날 진행됐다. 최 부총리는 “불안한 국내 정치 상황에도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산업경쟁력 강화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멈출 수 없는 필수 과제”라며 “정부는 우리 기업과 국익을 지키기 위해 가용한 정책 수단을 모두 동원하겠다”고 강조했다.
먼저 정부는 석유화학 등 글로벌 과잉 공급에 직면한 업종에 대해 완화된 기활법 기준을 적용한다고 밝혔다. 과거 기활법에서는 장기 10년, 단기 3년 실적을 기준으로 과잉 공급 업종을 판단했는데, 올해 8월부터는 과거 20개 분기 및 최근 4개 분기를 비교하는 방식을 추가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석유화학산업의 인수·합병(M&A) 등 사업 재편 속도를 높인다는 게 정부의 구상이다. 완화된 기활법을 적용하면 간이 합병이나 소규모 합병 시 주주총회 의결이 아니라 이사회 승인만으로 가능하고, 기업 간 보유 주식을 교환하는 경우에도 양도차익에 대한 소득세와 법인세 납부를 주식 처분 시점까지 늦출 수 있다.
이번 방안은 경영난에 시달리며 대규모 생산라인의 가동을 중단하는 기업이 늘어난 데 따른 조치다. LG화학은 알코올을 생산하는 나주 공장의 가동을 중단했으며, 4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한 롯데케미칼도 여수 제2공장의 일부 라인을 멈췄다. 이들 기업의 실적도 악화 일로다. LG화학의 3분기 누적 기준 영업이익은 370억원 적자로 기록됐으며, 같은 기간 롯데케미칼은 무려 6,600억의 적자를 떠안았다. 유일하게 금호석유화학이 2,628억원의 흑자를 기록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전년(3,238억원)보다 18% 넘게 줄어든 수준이다.
그리고 그 배경으로는 중국발 공급 과잉 문제의 심화를 꼽을 수 있다. 중국은 그간 국가 주도로 석유화학 산업에 대한 공격적인 시설 투자를 계속해 왔다. 특히 나프타, 에틸렌, 프로필렌 등의 범용 소재의 자급률은 100% 가까이 증가했다. 우리 석유화학 업계에는 견디기 어려운 악재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중국 시장이 사라진 것은 물론, 이제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산 범용 소재와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판단 기준 등 재정비 필요성 대두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 우리 석유화학 기업이 기활법 혜택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과잉공급 판단 기준 등을 재정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2016년 처음 도입된 기활법은 기업이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사업 재편을 추진할 경우 이를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한시적 특례를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법, 세법, 공정거래법 등 관련 절차와 규제를 간소화해 주고 세제, 자금, 연구·개발(R&D), 고용 안정 등을 일괄 지원해 ‘원샷법’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문제는 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해당 산업이 과잉 공급 상태에 있다는 것을 기업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생산시설 가동률과 재고율, 고용 대비 서비스 생산지수, 가격·비용 변화율, 기타 업종별 지표 등에서도 2가지 이상에 해당해야 한다. 산업별 특성을 감안하지 않은 일괄적 지표의 사용이 법의 실효성을 저하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석유화학 산업은 대규모 설비투자가 수반되는 자본 및 기술집약형 장치산업인 동시에 유가변동과 경기변동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특성을 가진다. 이에 일반적인 제조업 활용 지표인 가동률, 재고율, 비용 변화율 등을 과잉 공급 지표로 일괄 사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와 관련해 임기수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업 재편을 계획하고 있는 기업들이 기활법의 혜택을 용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과잉 공급의 판단 기준 확대가 필요하다”며 “산업별 특성이 반영된 과잉 공급 지표의 활용은 사업 재편을 계획하고 있는 기업의 과잉 공급 업종 증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기활법 상시화로 기업의 예측 가능성↑
기활법은 애초 3년짜리 한시법으로 시작했다. 이후 2019년 한 차례 개정을 통해 5년간 연장돼 올 8월 일몰을 앞두고 있었다. 정부는 산업계 사업 재편을 돕기 위해 제정된 해당 법이 한시법으로 시작된 탓에 기업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해 이를 상시화하기 위해 애써 왔다. 산업통상자원부가 2022년 말 ‘기업주도 혁신 활성화를 위한 기활법 개정 등 사업재편제도 개선방안 연구’ 용역을 발주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당시 산업부는 기활법 상시화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검토하고, 상시화에 대한 제약 극복 방안을 함께 모색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2020년 9월 발의돼 3년 넘게 국회에 계류하던 기활법 상시화 개정안은 지난해 12월 가까스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또한 법 적용 대상을 기존 산업위기지역 대응·신산업 진출 등에서 공급망 안정과 디지털 전환·탄소중립 목적의 사업 재편까지 확대했다. 간이합병 시 절차 간소화 등 일부에만 적용되던 상법·공정거래법 특례 범위는 모든 사업재편으로 넓어졌다. 해당 개정안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표됐고, 지난 7월 17일부터 시행됐다.
산업부에 따르면 기활법 시행 8년 차가 된 올해 9월 말 기준 사업재편계획 승인 기업은 500개 사를 넘어섰으며, 일자리 2만5,000여 개와 신규 투자 38조원 창출 등 성과를 거뒀다. 산업부 관계자는 “지난 7월 신(新)기활법 시행, 9월 동남권 사업재편 현장지원센터 개소 및 지역은행과의 금융협력 체결 등 지원체계 보강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우리 기업과 산업 구조의 신속한 재편을 한층 속도감 있게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