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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B "유로화 1.20달러 넘어서면 상황 복잡해져" 추락하는 달러 가치, 대체 안전자산 가격 폭등 제조업 부흥 꿈꾸는 트럼프, 약달러 반긴다

유럽중앙은행(ECB)가 유로화 강세 흐름을 경계하고 나섰다. 미국의 극단적인 통상 정책으로 인해 약달러 기조가 본격화한 가운데, 유로화 가치가 지나치게 절상될 경우 몰려올 '후폭풍'을 우려하는 양상이다. 반면 미국은 달러 가치가 나날이 하락하고 있음에도 불구, 자국 경제가 조만간 회복세를 보일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강유로' 경계하는 유럽
3일(이하 현지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ECB의 루이스 데 귄도스 부총재는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열린 ECB 연례 콘퍼런스에서 “지나친 유로화의 오버슈팅을 피해야 한다”면서 “현재 환율인 1.18달러는 ECB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1.20달러를 넘어서면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가 ‘글로벌 유로’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고, 유로화가 달러를 대체할 수 있는 기축통화로 부상할 수 있다고 발언한 이후 불과 몇 주 만에 ECB 내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들어 유로화 가치는 달러 대비 약 14% 급등하며 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의 정책 불확실성으로 인해 유럽 자산으로 자금이 대거 이동한 결과다. 이에 따라 연초 시장에서 예상됐던 ‘1달러 = 1유로’ 수준의 패리티(등가) 전망은 완전히 빗나가게 됐다. 특히 미국과 유럽 간 금리 격차가 확대되고 있음에도 유로화가 강세를 이어가는 것은 전통적인 외환시장 역학을 뒤엎는 이례적 현상이다.
유로화 가치가 지나치게 절상되면 유럽 외환시장 혼란이 가중될 위험이 있다. 익명의 한 ECB 고위 관계자는 FT에 “유로화가 지나치게 강세를 보이면 물가상승률이 목표치를 밑돌 위험이 커진다”면서 “ECB가 이를 원치 않는다는 점을 더 분명히 시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FT는 “유로화 강세는 수입 물가를 낮춰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지만,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려 수출 중심인 유럽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면서 “유로존과 미국의 무역 갈등 가능성까지 맞물리면 ECB의 통화정책 운신 폭이 좁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ECB가 환율 안정을 위해 기준금리 인하 카드를 꺼내 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글로벌 투자 관리 회사 T. 로우 프라이스의 유럽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 토머스 비엘라덱은 FT와의 인터뷰에서 “유로화 상승 속도가 너무 빨라 시장에 불안감을 주고 있다”면서 “이는 민간 부문 투자자들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유럽 자산으로 포트폴리오를 전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이어 “유로화가 현재 수준인 약 1.18달러에서 6%가량 추가 상승해 연내 1.25달러에 도달할 시, ECB가 인플레이션과 경기 둔화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0.5%P 인하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달러 수요 금으로 이동해
문제는 이 같은 흐름이 지속될 경우 향후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주요 6개국 통화(유로화·엔화 등)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올해 상반기 10.8% 하락했다. 이는 상반기 기준, 브레턴우즈 체제하의 금본위제가 무너지고 변동환율제가 도입됐던 1973년 상반기(-14.8%) 이후 최대 하락 폭이다. 상·하반기 상관없이 연속 6개월 기준으로는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이후 가장 낙폭이 크다.
향후 약달러 기조는 한층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 감세와 불법 이민 차단 강화 등을 골자로 한 이른바 '크고 아름다운 법안'이 미국 연방 상원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이 법안은 올해 말 종료될 예정인 개인 소득세율 인하,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표준소득공제 및 자녀 세액 공제 확대 등 각종 감세 조치를 연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감세 법안'으로도 불린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은 해당 법안이 통과될 시 향후 10년간 연방정부의 재정 적자가 약 2조8,000억 달러(약 3,850조원) 증가할 것이라 추산했다. 감세로 인해 적자가 늘고 재정 건전성이 흔들리면 자연히 안전자산,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도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에 외국 중앙은행 등 대형 해외 투자자들은 달러 보유량을 줄이고 금과 같은 대체 안전자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의 분석가들 사이에서 금 가격이 온스당 4,000달러(약 546만 2,000원)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할 정도다. 월가의 대표 리서치 회사인 야데니 리서치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금값이 온스당 4천 달러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고 분석했다.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등 주요 투자은행(IB)들도 수개월 또는 수년 내 금값이 4,000달러까지 뛸 것이라는 예측을 쏟아내고 있다. 현재 금값은 온스당 3,360달러 안팎에서 오르내리는 중이다.

美, 약달러가 오히려 호재?
다만 미국은 약달러 흐름이 지속돼도 기축통화 지위에는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3일(현지시간)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달러 가격은 ‘강한 달러 정책’과 무관하다”며 "달러화 가치 하락으로 달러의 세계 기축통화 지위가 약화될 수 있다는 전망은 근거 없는 우려"라고 일축했다.
그는 ‘강한 달러 정책’에 대해 “장기적으로 미국 달러가 세계의 기축통화로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어떤 조치를 취하느냐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트럼프 행정부가 강한 달러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베센트 장관은 “공화당 감세 법안으로 경제 성장 토대가 마련됐으며, 인플레이션은 억제되고 있다"며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을 글로벌 자본의 최적 투자처로 만들고 있고, 이런 흐름은 지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미국이 약달러 상황에서 태연한 발언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현재 외환시장이 사실상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던 대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달러 강세가 자신이 추진하는 미국 제조업 부흥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본다. △국내 제조업 부양 △공장 일자리 회복 △수출 확대 △무역 적자 감소 등을 위해서는 달러 가치가 낮아야 한다는 논리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약달러야말로 자국 제조업의 영광을 회복하고, 지지자들이 말하는 미국의 '황금기'로 돌아가기 위한 핵심 열쇠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