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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밀림 지대에 있는 파나마 운하의 가뭄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 가운데, 미주 동부행 해상 운임이 급등하고 있다. 계속되는 가뭄에 수위가 낮아지자 파나마운하청은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 수를 기존 36척에서 32척으로 줄였다. 특히 건기가 절정에 달하는 내년 여름에는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더해지면서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에선 인플레이션 재상승 및 고착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계속되는 정체에 해운 운임 급등
12일(현지 시간) 리카우르테 바스케스 모랄레스 파나마운하청장은 심각한 가뭄으로 인해 내년까지 선박 통행의 제한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파나마운하청에 따르면 지난 10일 가툰 호수 수위는 79.65피트로 최근 5개년 9월 평균(85.5피트)보다 6.8% 낮았다.
파마나운청은 계속되는 가뭄에 수위가 낮아지자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 수를 기존 36척에서 32척으로 조정했다. 이 때문에 운하를 통과하려는 선박들이 정체되고 있다. 12일 기준 대기 중인 선박은 116척이었으며, 최근에는 최대 163척까지 운하 통과를 기다린 것으로 알려졌다.
대기 선박이 늘면서 운항 허가 입찰 경쟁도 치열해졌다. 중국 상하이발 미주 동부행 해운 운임은 지난 8일 기준 1FEU(길이 12m 컨테이너 1개)당 2,869달러(약 380만원)로 뛰었다. 이는 지난 3월 마지막 주(2,010달러)에서 절반 가까이 상승한 금액이다.
모랄레스 청장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해수 온도, 예측할 수 없는 우기와 엘니뇨 기상현상의 지속 등으로 인해 내년까지 선박 통행을 계속 제한해야 할 것”이라며 “현재 파나마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가뭄은 아니지만 앞으로 운하의 운영을 고려하면 가장 심각한 가뭄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뭄 극심해지는 '내년 여름'이 더 문제
파나마운하청은 이번 운항 제한 조치가 최소 10개월 이상은 유지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엘니뇨 현상에 따른 중남미 가뭄이 극심해지는 내년 여름에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통상 파나마는 매년 12월부터 4월까지 파나마에 건기가 이어진다. 이에 따라 가툰 호수의 수위도 건기 막바지인 4~5월이 가장 낮다. 가뭄으로 낮아진 지금보다 수위가 더 낮아질 수 있는 만큼,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 수를 더 줄여야 한다는 의미다.
현재 파나마 정부는 파나마 운하 수자원 개선 프로젝트를 통해 가뭄으로 인한 위기 문제 해결을 추진 중이다. 비용만 총 20억~35억 달러(약 2조6,600억원~4조6,428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이 프로젝트는 파나마 인구 절반에 대한 생활용수 공급과 운하의 안정적 운영을 목표로 한다. 다만 지난 2020년 입찰 제안 이후 아직 프로젝트 수주 계획도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라 실제 개선 작업에는 수년이 걸릴 전망이다.
다만 일각에선 내년도 운하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글로벌 경기 둔화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유통업체들이 재고 감소에 나서면서 운하 내 물동량이 줄어들 것이란 관측이다. 실제로 미국의 대형 백화점인 노드스트롬의 재고(지난 6월 기준)는 1년 전보다 18% 가까이 줄었다.
기후변화에 따른 물 부족 사태가 인플레이션의 주요인
파나마 운하 가뭄 위기의 충격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에선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재차 커지고 있다. 기업들이 재고를 줄이는 추세라 하더라도 운하 통행이 가장 활발한 크리스마스와 음력 설까지 운행이 제한된 만큼 추가 수수료가 부과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동북아에서 미국 동부로 이동하는 컨테이너의 약 40%가 파나마 운하를 경유한다. 이에 곡물·광물·석탄 및 석유제품 기업들이 물류난을 빚을 전망이다. 특히 수확 규모가 줄어 전년보다 가격이 크게 뛴 양파나 쌀 등의 농산물은 향후 운송 문제까지 겹칠 경우 인플레이션을 가속할 주요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파나마 운하를 대체할 해상 운송 경로가 없다는 점도 인플레이션 우려에 무게를 싣는다. 칠레 남단부와 티에라델푸에고섬 사이에 있는 마젤란해협은 파나마 운하를 제외하고 태평양에서 미주 동부로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항로다. 그러나 선박 속도를 10노트로 가정 시 파나마 운하보다 약 33일이나 더 소요되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업계에선 제한적인 항로로 여겨진다.
일각에선 향후 물 부족 현상이 인플레이션을 좌우할 요인으로 자리할 거란 분석도 나온다. 세계자원연구소(WRI)는 지난 8월 보고서를 통해 “물 부족 사태 심화가 식량안보와 전 세계 경제성장을 위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블룸버그 통신을 포함한 주요 외신도 “기후 위기에 따른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식량 가격이 언제든 폭등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