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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일자리 지키기”에 러스트 벨트 환호 1기 행정부 WTO 주요 기능 마비시키기도 보호무역 성공 사례 드물어, 성패에 촉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백악관 재입성을 앞두고 자유무역주의의 시대가 막을 내릴 것이란 전망이 제기됐다.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핵심 기조가 보호무역주의인 탓이다. 분쟁 해결 등 기능 정상화에 한창인 세계무역기구(WTO)는 이와 같은 국제사회 분위기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
미국 WTO 탈퇴 가능성 대두
19일 외교계에 따르면 최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WTO의 기능이 마비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간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여러 국가와 양자·다자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자유무역의 가치를 강조해 온 미국의 태도 변화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시발점은 자유무역주의를 ‘악’으로 칭한 트럼프 당선인의 대선 승리다.
트럼프 당선인의 승리에는 러스트 벨트(Rust belt) 지역민들의 열렬한 지지가 영향을 미쳤다. 미국 북동부의 쇠락한 공업지역을 일컫는 러스트 벨트는 1970년대 이후 자유무역주의 체제 하에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 대표적으로로 밀워키 인근의 제너럴모터스(GM) 공장 폐쇄를 꼽을 수 있다. 85년간 자리를 지키며 지역 경제를 지탱해 온 해당 공장은 지난 2008년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았다.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 7월 공화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지로 밀워키를 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동맹국은 수년간 우리를 이용했다”면서 “우리는 일자리를, 수익을 잃었다”고 힘줘 말했다. 이어 “그들이 모든 것을 얻는 동안 우리의 사업은 몰살됐다”며 “더는 그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약탈하는 것을 지켜보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러스트 벨트의 지지자들은 환호했고, 그들의 지지는 트럼프 당선인을 승리로 이끌었다.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트럼프 체제에서 보호무역주의는 핵심 기조다. 이 때문에 자유무역주의 기반의 세계 통상 질서를 구축한 WTO의 앞날에도 먹구름이 꼈다. 트럼프 당선인은 1기 집권 당시에도 WTO가 미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불공정한 결정을 내린다고 주장하며 주요 기능을 마비시킨 바 있다. 일례로 2017년 미국은 WTO의 상소 기구에서 심리를 하는 상소위원의 선임을 거부했고, 새 위원이 채워지지 않은 WTO 상소 기구는 2019년 말부터 분쟁 해결 기능을 잃었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미국이 WTO를 탈퇴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제기된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상무부 장관을 지낸 윌버 로스는 정치전문매체 더힐에 낸 기고문에서 “미국 무역 적자의 진범은 WTO”라고 말하며 미국의 무역 균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이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트럼프의 보편관세 아이디어는 미국의 WTO 탈퇴를 강제할 가능성이 크다”며 “이는 다른 회원국들에 1조 달러(약 1,392조원)의 피해를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로스 전 장관의 말에 따르면 WTO의 창립을 주도한 미국이 이제는 WTO의 존폐를 판가름할 위치에 선 셈이다.
뚜렷한 기능·성과 없이 표류 중인 WTO
WTO의 첫 다자간 무역 협상인 도하개발어젠다 합의가 오랫동안 성과를 보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다는 점도 WTO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요소다. 도하개발어젠다는 농산물, 서비스, 비농산물 분야의 시장개방 문제를 비롯해 보조금 및 지역협정에 관한 투자 및 정부조달투명성에 이르는 국제무역의 주요 현안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분야에서 2008년 협상이 결렬된 이후 거의 진전되지 못한 상태다. 2013년 인도네시아 발리 패키지로 일정 부분 합의에 도달했지만, 이마저 일부 국가에서 반발하면서 사실상 계획 작업이 중단됐다.
이같은 위기 속에서 WTO는 일부 무역 현안에 적극적인 국가끼리 복수국간 협정을 주도하고 나섰다. 복수국간 협정이란 특정 분야에 참여를 원하는 WTO 일부 가맹국들끼리의 무역자유화 협정으로, 최혜국대우 관세를 낮추는 동시에 특혜원산지규정을 완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WTO는 이를 통해 행정 비용을 절감하고 세계 무역에 더 큰 영향력을 끼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2016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힘을 잃었다. 친환경 제품에 대한 관세 면제를 논의하는 환경상품협정(EGA)이 좌초되면서다. 당시 EGA는 2016년 연내 타결이 유력했으나, 다자무역에 회의적인 트럼프 당시 후보가 미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WTO는 이처럼 자유무역주의가 위협받는 데 깊은 우려를 표했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은 지난 4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보편관세 주장과 관련해 “무역 상대국의 보복을 촉발하면서 거래 당사국 양측 모두 실패하는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그렇게 하면(보편관세를 도입하면) 다른 교역국들도 미국의 관세 도입에 대응하기 위해 비슷한 종류의 관세를 부과하려고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이후에는 무역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뒤집는 무질서가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하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실패에서 배우거나, 과거를 반복하거나
미국의 셈법도 복잡하긴 마찬가지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미국은 보호무역을 외치다 실패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주로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주도한 그간의 보호무역은 안으로는 선거와 같은 정치적 의도와 결합해 혼란을 가져왔고, 밖으로는 패권 경쟁으로 심화하며 세계 경제를 흔들었다.
가장 먼저 1930년대 대공황을 꼽을 수 있다. 1929년 미국의 생산이 급감하고 실업이 급증하는 등 내수 기반이 붕괴하자, 미국 기업들은 정부에 수입을 제한할 것을 촉구했다. 허버트 후버 당시 미국 대통령은 상원 재정위원장 리드 스무트 등이 제안한 스무트 홀리법에 서명했고, 이를 바탕으로 2만여 종류 수입품에 평균 59%의 높은 관세가 부과됐다. 영국, 독일, 캐나다 등 주요 교역 상대국들은 즉각 관세 보복에 나섰다. 결국 높은 무역장벽을 넘지 못한 미국의 수출은 60% 넘게 급감했고, 실업률은 1933년 24.9%까지 치솟았다.
트럼프 당선인과 가장 유사한 보호무역 정책을 펼친 인물은 조지 워커 부시 전 대통령(2001~2009년 집권)이다. 부시 전 대통령은 쌍둥이 적자(경상·재정수지 적자) 타개책으로 무역분쟁을 동원했다. 긴급수입제한조처(세이프가드)를 발동해 수입 철강 제품에 8~30% 관세를 부과하는 식이다. 그러나 관세 폭탄의 경제적 효과는 미미했고, 유럽과 일본의 제소로 WTO는 미국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결국 부시 행정부가 세이프가드를 즉각 철회함으로써 무역 전쟁도 소득 없이 막을 내렸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당선인의 보호무역주의가 중국의 첨단산업 육성과 맞물려 양보할 수 없는 싸움으로 치달을 것으로 전망한다. 김일구 한화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미국은 관세 부과로 중국의 첨단산업을 묶어두는 동시에 금리 인상을 통해 빚 많은 중국 기업들을 압박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과거의 실패에서 배운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중국과의 합의점에 도달할 것이란 시각도 있다. 이은택 KB증권 연구원은 “미국이 중국에 남중국해 문제를 양해해 주는 대신 중국 금융시장 개방이나 위안화 절상 등을 받는 ‘빅딜’이 성사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