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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공장 주력 생산라인 가동 중단 준비 회사채 신용 보강 위해 롯데타워 담보로 롯데쇼핑·롯데건설 등도 자산 매각 추진
실적 악화와 누적된 적자로 어려움에 직면한 롯데케미칼이 일부 생산시설에 대한 철수 절차에 착수했다. 수십 년간 효자 노릇을 해온 핵심 제품군 생산공장에 대한 구조조정으로, 유동성 확보를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최근에는 롯데그룹 차원에서 롯데케미칼의 회사채 신용 보강 및 위기설을 잠재우기 위해 그룹 핵심 자산인 롯데월드타워를 담보로 내놓기도 했으며, 주요 계열사들도 자산을 매각하는 등 투자자 신뢰 회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롯데케미칼, 핵심 제품 생산시설 '박스업' 착수
29일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롯데케미칼은 주요 생산공장 전반에 대한 운영 효율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여기엔 과다 생산으로 재고가 쌓인 플라스틱 제품군에 대한 수요처를 확보하는 동시에 더 이상 수익화가 어려운 제품군에 대한 과감한 정리도 포함됐다. 해당 조치의 일환으로 여수국가산업단지에 위치한 여수2공장에서는 주력 생산 제품인 에틸렌글리콜(EG)과 메틸메타크릴레이트(MMA) 생산시설의 생산량 감축과 '박스업(Box-Up)'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 것으로 확인됐다.
박스업은 생산시설을 비우고 질소를 충전하는 절차로 업계에서는 통상 공장 운영 중단을 위한 전 단계로 불린다. 정기 보수를 하거나 점검을 위해서 박스업이 이뤄지기도 하지만, 현장 분위기는 사실상 공장 폐쇄 이후 해체·매각으로 이어지는 수순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내년 2월 공장 폐쇄가 이뤄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다만 이에 대해 롯데케미칼 관계자는 "재고나 누적된 상황에서 인건비 절감 등을 위한 일상적인 효율화 조치"라며 "공장 폐쇄나 중단을 언급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차량용 냉각제의 주원료인 EG와 아크릴 유리 핵심 소재인 MMA는 1970년대 후반 전신인 호남석유화학 시절부터 생산해 온 롯데케미칼의 핵심 플라스틱 제품으로, 종전에는 단위 공장 매출이 연간 3조~4조원에 달했다. 그러나 중국의 대량 저가 공세와 중동의 물량 확대, 글로벌 경기 침체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수익성에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한때 3조원에 가까운 영업이익을 내며 롯데그룹의 주축을 담당했던 롯데케미칼은 그룹 전체를 덮친 위기설의 진원지가 됐다. 롯데케미칼의 3분기 영업적자는 4,136억원으로 4개 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 중이다.
투자설명회 열어 주요 계열사 밸류업 계획 설명
이에 롯데그룹은 롯데케미칼을 시발점으로 한 유동성 위기 우려를 잠재우고자 28일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고 주요 계열사의 재무 현황과 밸류업(자산 가치 제고) 계획을 밝혔다. 이날 롯데케미칼은 '여수공장 원가절감 발굴 프로젝트'를 통해 연 810억원의 원가 절감을 골자로 하는 재무구조 개선 로드맵을 제시했다. 모노머(단량체) 부문에서는 에너지 비용 절감·생산성 향상 등을 통해 474억원을 감축하고 폴리머(중합체) 부문에서는 총 303억원, 지원 부문에서는 33억원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와 함께 기초화학 비중을 현재 60%에서 오는 2030년까지 30% 이하로 낮추는 사업 포트폴리오 구조조정도 단행한다고 밝혔다. 롯데케미칼의 3분기 누적 매출은 15조5,343억원으로 이중 에틸렌(EL), 프로필렌(PL), BTX 등 기초화학 매출이 10조5,947억원에 달하는 반면 첨단소재·정밀화학·전지소재는 각각 4조949억원, 1조2,419억원, 7,159억원에 불과했다. 이번 구조조정은 수요 침체와 원가 비용 등 부담이 큰 석유화학 부문 의존도를 낮추는 대신 전방 산업이나 PC, 의료, 배터리 소재 등 고부가 제품 비중을 확대하는 등 시장 경쟁력 확보를 포석에 둔 조치로 풀이된다.
앞서 롯데그룹은 지난 27일 롯데케미칼 회사채 신용 보강을 위해 은행권에 롯데월드타워를 담보로 제공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과거 롯데케미칼이 발행한 2조원어치 회사채에서 기한이익상실(EOD) 사유가 발생하면서 롯데케미칼은 사채권자들과 협의를 통해 해당 특약 사항을 조정하기로 한 바 있다. 이에 롯데그룹이 특약 사항 조정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그룹 핵심 자산인 롯데월드타워를 담보로 내놓게 된 것이다. 롯데 관계자는 "롯데케미칼의 유동성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시장에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롯데쇼핑, 15년 만에 자산 재평가로 재무구조 개선
설명회에서는 롯데케미칼 외에도 롯데건설, 롯데쇼핑 등 주요 계열사가 참여해 유동성 확보 전략을 설명했다. 먼저 롯데쇼핑은 오프라인 유통 업황의 부진 속에서도 유동성 위기는 전혀 없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롯데쇼핑에 따르면 롯데백화점은 점포 효율화를 위해 부산 센텀시티점 등 실적이 부진한 점포의 매각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으며 자산의 실질 가치 반영 및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2009년 이후 15년 만에 자산재평가를 진행하고 있다. 재평가 대상은 7조6,000억원 규모의 토지자산이다. 롯데쇼핑 관계자는 "자산 재평가를 통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해외사업, 리테일 테크 등 미래 신사업에 대한 효율적 투자비 집행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투자은행업계 한 관계자는 "지난 15년간 부동산 시장이 급팽창한 만큼 이번에 자산재평가를 하고 나면 롯데쇼핑은 상당한 재무개선 효과를 거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앞서 2009년 실시한 재평가에서도 3조6,000억원의 평가 차액이 발생하면서 부채비율을 102%에서 86%로 16%포인트 낮추는 효과를 거둔 바 있다.
롯데건설의 경우 부동산 경기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현재 자체 보유 예금 등으로 유동성에는 문제가 없는 만큼, 부실 사업장 정리작업에 고삐를 죄기로 했다. 롯데건설의 올해 1∼3분기 누적 매출은 6조284억원으로 최대치를 경신했지만 부채 총계가 5조9,000억원에 이른다. 롯데건설 측은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분양을 늘려 미분양 위험을 줄이고, 이자 비용 축소를 위해 부실 사업장을 정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업계는 호텔롯데도 부동산 자산이 상당하다는 점에서 롯데리츠(REITs·부동산투자신탁)와 협업을 포함해 유동성 확보 방안을 제시할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