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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융 기업 현금성 자산 '역대 최대치' 자산 매각, 회사채 발행 등으로 유동성 끌어모아 최근 급증한 은행권 기업대출, 밸류업에 제동 걸릴 가능성도
기업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이 최근 1년 새 30조원가량 불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고 국내 일부 대기업의 재무 건전성이 악화하자 기업들이 줄줄이 유동성 조달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기업들의 자산 줄매각
3일 한국은행과 금융투자협회 등에 따르면 올해 9월 말 기준 비금융 기업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M2·원계열 기준)은 1,125조4,32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역대 최대치이자 지난해 9월 말 대비 30조8,280억원 증가한 수준이다. M2는 현금과 요구불예금, 수시입출금식 예금, 2년 미만 정기 예·적금 등을 포함한 통화 지표로, 바로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성을 가리킨다. 대내외 불확실성에 따라 금리와 환율의 출렁임이 거세지며 ‘현금 안전판’을 쌓는 기업들이 증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기업들은 보유 자산을 줄매각하는 형태로 현금을 확보했다. 올해 들어 유형자산·비유동자산 처분을 공시한 기업은 대한항공, 태영건설, 대한해운, KG스틸, 한일시멘트 등 39곳에 달한다. 이는 전년 동기(25곳) 대비 56% 늘어난 수준이다. 대한항공은 올 5월 항공기 보잉747 5대를 9,183억원에 매각한다고 공시했다. 대한해운은 보유한 선박 2척을 1,203억원에 처분한다고 10월 밝혔으며, KG스틸은 당진 공장 부지를 1,100억원에 정리한다고 지난달 공시했다.
대기업이 핵심 자산을 매각하는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롯데그룹은 롯데시티호텔 2~3곳과 롯데렌탈, 롯데백화점 부산 센텀시티점 매각에 속도를 내고 있으며 롯데케미칼은 말레이시아·파키스탄 법인 등의 매각을 추진 중이다. CJ제일제당은 바이오 사업 부문의 매각 작업을 진행 중이고, GS건설은 스페인 수처리 업체인 GS이니마와 GS엘리베이터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은 나프타분해설비(NCC)를 매물로 내놨고, LG디스플레이는 중국 광저우 LCD 공장 매각에 나섰다.
연말 회사채 시장 '이례적 훈풍'
기업들의 자금 확보 수요가 급증하며 회사채 시장에도 훈풍이 불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2일 기준 4분기 국내 회사채 순발행액은 6조6,909억원으로 집계됐다. 월별 회사채 순발행액 규모는 10월 3조754억원, 11월 3조6,155억원으로 2개월 연속으로 3조원을 웃돌았다. 지난달 회사채 수요예측을 진행한 기업은 15곳에 달한다. 이달 들어서는 SK텔레콤, 한화생명보험,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산하 허브리츠 등이 회사채 조달에 나설 계획이다.
시장에서는 이 같은 회사채 시장의 '활기'가 이례적이라는 평이 나온다. 연말은 기관들의 장부 마감이 이뤄지는 시기로 발행액보다 상환액이 많은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금리가 하락하며 회사채 발행 환경이 개선되자 기업들이 공격적으로 자금 조달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3년 만기 회사채(AA-) 금리는 연 3.1%대까지 하락했다. 이는 2022년 3월 25일(연 3.163% 마감) 이후 2년 8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은행권 기업대출 증가세
은행권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기업들도 증가하는 추세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은행권의 기업대출 잔액은 1,324조3,000억원으로, 1년 전(1,246조4,000억원) 대비 779억원(6.25%) 늘었다. 2024년 연간 기업대출 증가폭은 76조6,000억원으로 같은 기간 가계대출 증가폭(5.6%, 38조5,577억원)을 눈에 띄게 웃돈다. 금융당국이 가계대출 속도 조절에 힘을 싣는 가운데, 은행들이 기업금융 강화를 목표로 공격적인 영업을 펼쳐 온 결과다.
다만 차후 은행권 기업대출 문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은 변수다. 정부의 기업가치 제고 계획(밸류업)에 따라 자본비율 관리의 중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은행의 위험가중자산(RWA) 잔액 산출 시 부실 비율이 높은 기업대출은 가계대출보다 위험가중치가 더 높게 적용된다. RWA는 은행이 보유한 각종 자산을 위험도에 따라 가중치를 적용해 산출한 금액으로 은행의 실제 위험 노출 정도를 반영한다.
은행권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기준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은행의 RWA는 979조6,113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916조9,410억원)보다 6.8%(62조6,703억원) 증가한 규모다. 이와 관련해 한 금융권 관계자는 "밸류업의 핵심 지표인 보통주자본비율(CET1)을 높이기 위해서는 위험가중자산을 관리해야 한다"며 "주요 은행들이 하나둘 기업대출에서 힘을 빼고 있는 만큼, 기업들의 자금 확보 난이도도 점점 올라갈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