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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은행, ‘부실채권 매각 자문’ 위한 업체 선정 미국 부동산 700억원 규모 부실채권 매각 결정 美 현지 부동산 시장 침체, 상환능력 잃은 차주 다수
대형 시중은행이 미국 현지에서 대출을 내준 사무실에 대해 부실채권이 발생했다. 미국 부동산 시장 침체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공실률이 높아지는 등 수요가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영향이다.
뉴욕 소재 오피스, 부실채권으로
5일 금융권에 따르면 A은행은 최근 ‘부실채권 매각 자문’을 위한 용역업체를 선정한다는 내용의 공고를 냈다. 통상 은행들은 자금을 빌려준 차주가 빚을 상환하지 못하면 부실채권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미리 잡아둔 담보물의 매각을 통해 자금을 충당한다.
이번 부실채권 대상은 미국 뉴욕에 있는 한 오피스다. 해당 오피스를 담보로 대출을 받은 차주가 빚을 갚지 못하면서 담보채권에 대한 매각을 진행하는 것이다. 지난 2일까지 업체들로부터 제안서를 받았고, 이달 중 매각을 위한 입찰을 추진할 방침이다. 매각 규모는 5,000만 달러(약 700억원) 수준이다. 다만 A은행이 가진 채권은 다른 채무자 대비 우선 변제받을 수 있는 선순위채권으로, 차주로부터 돌려받지 못한 대출금을 전부 충당할 수 있을 전망이다.
A은행이 부실채권 매각에 나선 배경에는 미국 현지 부동산 시장의 침체가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재택근무가 확산하면서 오피스 수요 회복이 요원해진 가운데 상업용 부동산 공실률이 높아진 결과다. 더불어 그간 고금리 장기화로 이자 부담이 커지자, 이미 상환 능력을 잃은 차주들이 대거 발생한 점도 부실채권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
실제 미국 상업용 부동산 가격지수(CPPI)는 여전히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최근 수치를 보면 지난 10월 125.5로 1년 전(125.3)과 비교했을 때 비슷한 수준을 나타냈다. 2년 전인 2022년 10월(135.0) 대비해서는 약 7% 낮아졌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 1월부터 4월까지 121.8로 작년 말보다 더 낮아지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해외 부동산 펀드도 손실을 면치 못하고 있다. 펀드평가사 KG제로인에 따르면 해외 부동산 펀드의 최근 1년간 손실률은 6.60%에 달한다. 총투자액을 뜻하는 설정액 역시 감소 추세다. 올해 초 2조7,585억원이었던 해외 부동산 펀드 설정액은 지난 2일 기준 2조4,204억원으로 3,381억원 줄었다.
美 WWP 부동산, 임차인 이탈로 EOD 위기
앞서 신한자산운용도 뉴욕 소재 상업용 부동산 월드와이드플라자(Worldwide Plaza·WWP)의 심각한 공실률로 인해 채무불이행(EOD) 사태에 직면한 바 있다. 2017년 신한자산운용이 대출을 진행할 당시만 해도 월드와이드플라자의 임대율은 92%에 달했다. 주요 임차인으로는 금융사 노무라홀딩스와 법무법인 크레바스(Cravath, Swaine & Moore) 등이 있었다. 노무라홀딩스는 2022년 임대 면적을 축소하면서 두 개 층을 반환했고, 오피스의 30% 이상을 임대 중인 크레바스는 지난 8월 다른 빌딩으로 이전했다.
대주단이 빌딩을 인수한 금액은 17억4,000만 달러(약 2조원)다. 골드만삭스는 상업용부동산 저당증권(CMBS)을 통해 9억4,000만 달러(약 1조800억원) 선순위 대출에 참여했다. 시니어 메자닌 대출은 1억9,000만 달러(약 2,200억원), 주니어 메자닌이 7,000만 달러(약 800억원), 에쿼티가 5억4,000만 달러(약 6,200억원)다. 이 중 신한자산운용은 약 2,200억원 규모의 중순위 대출을 주선했다. 신한지주 계열사 신한라이프가 앵커 투자자(LP)로 나섰고, 국내 보험사 4~5곳이 투자자로 참여했다.
그러나 빌딩 가치는 인수 당시 2조원에서 지난해 6월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지난 9월 주요 임차인들이 퇴거하면서 6,000억원까지 떨어졌다. EOD가 발생해 공매 절차를 진행한다고 해도, 선순위 1조원도 건질 수 없는 상황인 만큼 중순위인 신한자산운용 펀드는 전액 손실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최근 공실률 확대로 임대료 수입과 담보인정비율(LTV)이 떨어지면서, 대주단은 대출 원리금도 받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로 선순위 CMBS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신용등급은 2017년 최상위 등급이었던 'AAA'에서 2023년 'BBB-'로 6단계나 떨어졌다.
부실 유발 대출자에 헐값 매각 사례도
이지스자산운용의 경우 해외 상업용 부동산 중순위 채권을 대출자에게 헐값에 되팔아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이지스자산운용은 미국 오피스 ‘1551 브로드웨이 프로퍼티’ 중순위 채권을 와튼 프로퍼티에 1,800만 달러(약 250억원)에 매각했다. 당초 대출 규모가 1억4,000만 달러(약 1,980억원)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서 지급된 이자를 포함한 원금 회수율은 29.86%에 불과하다.
1551 브로드웨이 프로퍼티는 뉴욕 타임스퀘어 인근 핵심 오피스다. 건물주이자 대출자인 와튼 프로퍼티가 2021년 7월 이자 등을 지급하지 않아 채무불이행이 발생, 중순위 채권자인 이지스운용의 원금 회수가 어려워졌다. 이에 이지스운용도 여러 자구책을 진행했으나 지난해 말까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와튼 프로퍼티에 채권을 매각하기로 하고 지난 4월 모든 절차를 마무리했다.
이를 두고 관련 업계에서는 자산 부실을 일으킨 대출자에게 채권을 매각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컸다. 한 업계 관계자는 “뉴욕에서 한국 기관 투자자들은 디폴트를 일으킨 대출자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헐값에 채권을 넘겼다”며 “해당 선례로 다른 한국 기관도 피해를 볼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업계 일각에서는 해당 건이 와튼 프로퍼티의 성공적인 투자 사례로 거론됐다는 얘기도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