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2024년 제조업 평균가동률 72.9%
일자리 감소분 절반은 제조업 분포
중국 중간재 자립도↑, 수출 적신호

오랜 시간 한국 경제를 지탱해 온 제조업이 전방위적 위기에 봉착했다. 대기업들은 적자로 얼룩진 암울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고, 중소기업은 장기화한 내수 부진을 이기지 못한 채 깊은 시름에 빠졌다. 일부 기업은 고용과 규제 등에서 경직된 국내 시장을 떠나 해외로 생산 시설을 옮기는 등 돌파구를 모색 중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중국 특수’가 끝난 만큼 단기간 내 우리 제조업이 반등할 가능성은 다소 낮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는 분위기다.
화학 등 제조업 전반에 몰아닥친 한파
11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산업생산은 1년 전보다 1.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 팬데믹 발생 첫해 산업생산이 크게 위축됐던 데 따른 결과로, 2021년(5.5%) 이후 4년 연속 오름세다. 다만 제조업의 경우 반도체와 의약품을 제외한 대부분 분야가 뒷걸음질 치면서 평균가동률이 72.9%에 그쳤다.
제조업의 불황은 실적 악화로도 드러났다. 지난해 3분기(7월~9월) 103개 코스피 상장사의 영업이익 합계는 41조7,245억원으로 직전 분기 대비 2.43% 줄었다. 이와 함께 향후 실적 전망치도 줄줄이 하향 조정됐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의하면 화학 업종의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 전망치는 기존 1조6,250억원에서 1조2,735억원으로 무려 21.63% 깎였다. 정유사의 수익성을 가늠하는 지표인 정제마진이 줄어들면서 코오롱인더, KCC, 금호석유, HS효성첨단소재 등 대부분 기업이 영업이익 감소에 직면할 것이란 분석이다.
중소기업의 경우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 지난해 1~11월 중소기업 생산지수는 전년보다 0.9% 줄어든 98.1에 그치며 통계가 집계된 2015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나타냈다. 이는 중소기업의 주요 생산 품목이 의류, 신발 등 비필수 소비재에 집중된 데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작년 3분기 국내 가구 평균 의류·신발 지출은 11만4,000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6% 줄었다. 제조업 불황의 주범으로 장기화한 내수 부진이 지목되는 배경이다.
경직된 규제·고용시장에 ‘탈(脫) 한국 선언’ 줄 이어
전문가들은 제조 국가로서 한국의 입지가 낮아질 수밖에 없는 여러 환경적 요인을 지적했다. 경직된 고용시장이 대표적 예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일자리 감소분의 절반이 제조업에 분포해 있다”며 “이는 기업들이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해외로 생산시설을 옮기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국내 제조업 활성화를 위해서는 노동시장 유연화, 성과 중심으로의 직무급제 전환, 경직적인 주52시간 근로제도 개편 등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실제로 2020년대 들어 우리 산업은 제품이 아닌 공장을 수출하는 식으로 변모해 왔다. 많은 기업이 원가 및 인건비 절감을 위해 생산 시설을 동남아로 옮긴 데 이어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기술 기업들은 정책 보조금이 지급되는 미국, 유럽 등으로 떠났다. 미국 제조기업의 복귀를 지원하는 단체 ‘리쇼어링 이니셔티브’는 2023년 미국에 새로 생긴 일자리 28만7,299개 중 약 14%가 한국 기업에서 나왔다고 분석하며 “한국은 기업 수출대국(big exporter)”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기업들은 현재로선 한국을 떠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입을 모은다. 인건비와 원자재 등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데다가, 각종 규제 또한 유연해 사업 확장이 용이하다는 판단에서다. 일례로 OCI홀딩스는 말레이시아에 총 2조원 규모의 태양광 및 반도체 폴리실리콘 생산기지를 구축 중이다. 저렴한 인건비는 물론 수력 발전으로 전력을 100% 조달할 수 있어 미국·유럽 시장이 요구하는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조건도 맞출 수 있다는 설명이다.
경직된 규제도 제조업이 국내에서 해외로 이동하는 행렬을 부추기고 있다. 샴푸, 린스 등 생활용품 제조업체인 A사는 반려동물 시장의 급성장을 확인한 후 관련 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국내법상 기존 설비로 반려동물용품을 제조하면 불법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베트남에 공장을 짓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A사 관계자는 “반려동물 샴푸·린스는 ‘동물용 의약외품’에 해당해 별도 규정에 따라 시설과 인력을 갖춰야 한다”고 꼬집으며 “기존 시설을 활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굳이 생산시설을 국내에 둘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라고 전했다.

대중 중간재 수출 급감, 향후 전망도 ‘먹구름’
그간 든든한 소비 시장으로 기능해 온 중국이 기술 자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점도 우리 제조업엔 악재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의 대중국 무역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처음으로 180억 달러(약 24조7,500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중국의 제조업 경쟁력 향상으로 중간재 자급률이 상승했다는 게 산업연구원의 설명이다. 산업연구원은 “한국의 중국 수출품 80% 상당이 중간재인 만큼 중국의 기술 고도화는 한국의 제조업 수출 부진을 가속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은행도 이 같은 변화를 감지하며 수출 부문에서 과거처럼 중국 특수를 누리기 어려울 것으로 분석했다. 한은은 ‘중국 성장구조 전화 과정과 파급영향 점검’ 및 ‘최근 수출 개선 흐름 점검 및 향후 지속가능성 평가’ 보고서에서 “우리 경제는 중국의 중간재 자립도가 높아지고 기술경쟁력 제고로 경합도가 상승함에 따라 과거와 같은 중국 특수를 누리기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향후 우리 제조업의 중국 수출 비중은 낮아지고, 미국이 커지는 등 최대 수출국 지위에 큰 변화가 있을 전망”이라고 관측했다.
이런 가운데 중국 정부는 ‘글로벌 발전 이니셔티브’라는 새로운 국제협력체를 구성하고 스마트 제조업, 녹색 제조업 등 산업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선진화된 기술이 자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엔진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 또한 지난해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 참석해 “중국 정부가 경제를 구하는 길은 새로운 기술과 과학 시스템에 있다”며 기술 강국으로서의 도약을 선언했다. 우리 제조업의 앞날에 드리운 먹구름이 한층 짙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