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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조원 추가 투자, 5개 공장 증설
“TSMC는 도둑”이라던 트럼프도 만족
고비용 감수, 친(親) 미국 전략 선택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TSMC가 미국에 146조원 상당의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밝혔다. 전임 바이든 행정부 시절 약속했던 대미 투자 규모 94조원을 훌쩍 웃도는 수준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관세를 앞세워 첨단 생산 공장을 자국에 옮겨 오도록 외국 기업들을 압박한 전략이 성과를 거뒀다고 자평했다. 업계에서는 비용 등을 문제로 미국 투자를 망설이던 TSMC의 태세 전환과 그 배경에 주목하는 모습이다.
“혁신과 성장 비전 공유” 맞손
3일(이하 현지시각) 외신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날 웨이저자(魏哲家) TSCM 회장과 백악관에서 면담한 뒤 “TSMC는 이른 시일 내 미국에 최첨단 반도체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최소 1,000억 달러(약 146조원)를 새로 투자할 것”이라면서 “신규 투자는 애리조나주에 5개의 생산 시설을 구축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발표로 TSMC의 대미 투자는 1,650억 달러(약 240조원) 규모가 됐다. TSMC는 바이든 행정부 시절인 2020년 미국 애리조나주에 120억 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후 2022년에는 투자 규모를 650억 달러(약 94조원)로 확대했다. 투자 확대에 따라 애리조나 공장 건설 계획도 애초 1개에서 3개로 늘었으며, 이 가운데 1곳은 지난해 말 양산에 돌입한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와 같은 대미 투자 확대가 TSMC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TSMC로서는 (대만이 아닌) 매우 안전한 곳으로 생산 시설을 다각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웨이 회장을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TSMC가 미국에 반도체 공장 5곳을 추가로 건설함에 따라 최소 수천 개의 고임금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웨이 회장 또한 “1,000억 달러 추가 투자 계획을 발표하게 돼 매우 기쁘다”며 “이미 짓기로 한 3개의 팹(반도체 제조공장)에 더해 3개의 새로운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며, 이 외에도 2개의 패키징 공장 등 총 5개 공장이 미국에 추가로 세워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TSMC는 성명을 통해 “(미국과) 반도체 산업의 혁신과 성장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고, 함께 기술 부문을 강화할 방안을 모색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보조금’ 유화책보단 ‘관세’ 강경책 꺼내 든 트럼프
무역업계에서는 TSMC의 깜짝 투자 발표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압박에서 비롯된 결단이라는 평이 우세하다. 반도체는 1997년 미국 주도로 체결된 정부기술협정(ITA)에 따라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반도체를 비롯한 모든 수입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취임 직전 출연한 방송에서는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한 반도체지원법(CHIPS)을 비판하면서 TSMC를 겨냥했다. 팟캐스트 진행자 조 로건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 기업은 매우 부유한 기업들”이라면서 “그들은 우리 사업의 95%를 훔쳤고, 지금 대만에 있다”고 말했다. TSMC가 미국 정부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받으면서 생산한 칩을 대만으로 가져간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은 보조금 지급이 아니라 관세 부과를 통해 기업들의 대미 투자를 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번 TSMC 대미 투자 확대와 관련한 발표에서도 그는 “만약 대만에서 만들고 미국으로 보낸다면 25%나 30%, 50% 등 어떤 수치가 됐든지 간에 관세를 부과받게 될 것”이라며 “그런 점에서 웨이 회장은 게임에서 훨씬 앞서가게 됐다”고 말했다. 여타 반도체 기업들에 대미 투자를 압박하려는 의도로 풀이되는 대목이다.

중국 색 지우기 분주한 TSMC
재료 조달, 인건비 등 높은 비용 문제도 오랜 시간 TSMC의 미국 투자를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웨이 회장은 올해 초 실적 발표 자리에서 2나노 공정 미국 진출 계획에 대한 질문에 “인력 부족, 높은 비용, 규정 미비 등 세 가지 이유로 어려운 상황”이라고 답했다. 먼저 비용의 경우 기존 건설 중인 공장의 사례를 들었다.
지난해 말 양산에 들어간 애리조나 1공장 건설에 TSMC는 기 계획보다 3배 이상 늘어난 400억 달러를 지출했다. 미국 내 인플레이션으로 원자재 가격이 폭등한 데다, 건설 기간 단축으로 비용 상승 폭이 더 가팔랐던 탓이다. 해당 공장 양산 준비를 위한 재료 공급 비용도 대만 공장과 비교해 최대 5배에 달했다. 이 때문에 TSMC는 공급망 다각화에 따른 비용 부담으로 올해 1분기 매출 총이익이 직전 분기(59%)보다 1%p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력 확보도 난제다. 애리조나 1공장은 제조 장비를 설치 후 공장 가동 직전까지 미국 현지에서 전문 인력을 구하지 못해 대만에서 엔지니어 수백 명을 파견받아야 했다. 가동 후에도 수율 제고를 위한 연구진과 기술 인력 파견은 계속됐다. 특히 이 과정에서 현지 인력 위주로 공장을 운영하라는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뉴욕타임스(NYT)에 의하면 TSMC 애리조나 1공장 전체 인력 2,200명 중 절반가량이 대만 출신 직원이다.
이처럼 비효율적이라며 미국 투자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온 TSMC인 만큼 이번 대미 투자 확대의 배경에는 단순 관세 위협을 넘어 정치적 의도 또한 숨어 있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미국의 대중국 압박이 갈수록 수위를 높이면서 중국과의 관계 단절이 시급하다는 분석이다. 실제 TSMC는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 당선 직후 중국 고객사에 7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 주문을 받지 않겠다고 통보한 바 있다. 이를 두고 경희권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반도체 시장은 이제는 수율의 시대에서 전략의 시대로 가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