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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소부장 투자보조금 신설
미국 칩스법 보조금과 유사한 구조
대기업 ‘휘청’에 투자 유도 효과 ↓

정부가 국내 반도체 산업 활성화를 위해 지원금 규모를 대폭 확대하고 나섰다. 핵심은 중소·중견기업들의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투자보조금’ 신설이다. 기존에는 대기업 위주의 대규모 반도체 공장 설립 지원이나 연구개발(R&D) 세액 공제 중심이었지만, 앞으로는 중소기업들이 실제 설비나 인력 확충에 투자할 경우 현금성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손질하겠다는 계획이다.
기업당 최대 200억원 투자보조금 지급
15일 정부는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주재로 경제관계장관회의 겸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글로벌 반도체 경쟁력 선점을 위한 재정투자 강화 방안’을 확정했다. 중소·중견 기업이 입지나 설비에 신규 투자하면, 투자 금액의 최대 50%를 보조금으로 돌려받는 내용이 골자다. 반도체·디스플레이·이차전지·바이오 등 4개 국가첨단전략산업에 소부장을 생산하는 중소·중견기업이 대상이며, 지원 한도는 투자 건당 150억원, 기업당 200억원이다.
그간 업계에서는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주요국이 추진하는 반도체 보조금을 언급하며 정부에 적극적인 재정 투자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반면 정부는 열악한 재정 상황과 WTO 보조금 협정 위반 가능성을 언급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하지만 글로벌 반도체 산업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선 적극적인 지원이 필수라는 판단에 투자보조금 신설로 의견을 모았다.
정부는 또 기존 반도체 저리 대출 재원 17조원에 추가로 3조원을 확대해 총 20조원 규모의 금융을 지원하기로 했다. 기금 출연 등 산업은행이 적극적으로 정책 금융을 수행할 수 있도록 2,000억원 규모의 신규 출자도 검토한다. 아울러 반도체 분야 기술보증 한도는 기존 100억원에서 200억원으로 2배 확대하고, 일반반도체 분야에 대한 기술보증비율(현행 85%)도 차세대반도체 수준(95%)으로 상향한다.
이번 지원안은 상대적으로 자본력이 있는 대기업은 제외하고, 분야 또한 첨단 소부장으로 한정한 게 특징이다. 강윤진 기획재정부 경제예산심의관은 “대기업에 대해선 투자세액공제로 혜택을 주고 있다”며 “상대적으로 취약한 소부장과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에 초점을 맞추고 중소·중견기업을 겨냥한 보조금 제도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낮은 세액공제율·까다로운 규제, 선결 과제 산적
이번에 발표된 소부장 투자보조금은 미국의 ‘칩스법(CHIPS Act)’을 연상케 한다. 미국은 2022년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칩스법을 제정했고, 이후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들에 투자금의 절반가량을 현금으로 보조해 주는 강력한 지원책을 시행 중이다. 실제로 미국에 공장을 짓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막대한 세액공제와 함께 공장 건설비용의 40~50%에 해당하는 직접 보조금을 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 정부의 지원책은 미국의 사례와 비교하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아쉬움의 목소리가 제기된다. 미국은 기업이 설비 투자나 기술 개발에 나서면 각 주정부와 연계된 인센티브까지 포함해 전방위적 지원이 이뤄지는 반면, 한국은 아직 세액 공제율이 15% 수준에 머무는 등 기업의 체감도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나아가 미국은 칩스법을 기반으로 인프라 구축, 인력 양성, R&D 자금까지 패키지 형태로 지원한다. 별도 예산 항목으로 지원하는 한국과의 차이점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한국은 구조적 대응력에서 있을 수밖에 없다”고 꼬집으며 “이번 투자보조금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단순한 금액 지원을 넘어선 산업 전략 차원의 접근이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은 칩스법을 통해 안보와 산업 두 축을 동시에 겨냥했다는 점도 우리와의 차이점이다. 미국은 반도체를 전략 자산으로 보고 연방정부 차원에서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는 등 첨단 기술 경쟁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상대적으로 대기업에 대한 과세 혜택 축소와 중소기업 중심 지원책 확대라는 방향에 머물고 있어 국제 경쟁력 확보라는 목표에 좀처럼 다가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단편적인 보조금보다 더 강력한 통합 전략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주요 납품처인 대기업 부진에 구조적 한계 뚜렷
현장의 반응 또한 정부의 기대만큼 뜨겁지 않다. 결국 이들 중소·중견 기업이 생산한 반도체 소부장은 대부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대형 반도체 제조사에 납품되는데, 정작 이들 대기업의 실적이 최근 크게 흔들리고 있어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투자를 해도 판매처를 찾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중소기업들이 아무리 정부 지원을 받는다 해도 납품처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투자를 줄이고 생산량을 축소한다면 매출 확대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글로벌 반도체 업황 악화 속에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가격 하락으로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했다. 여기에 TSMC 등 경쟁사의 기술력과 시장 점유율이 빠르게 치고 올라오면서 삼성전자와 한국 반도체 산업 전반이 과거와 같은 압도적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는 평가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시장 논리상 가장 중요한 것은 ‘수요’”라고 짚으며 “수출 부진과 글로벌 경쟁 심화로 국내 대기업들의 투자 여력이 줄어드는 마당에 중소기업만 독자적으로 설비 투자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