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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경제 전문가들, 상호관세 정책 신랄하게 비판 “자유주의 원칙 뒤엎는 조치, 근거 없는 잘못된 공식" “물가 상승·자초한 경기 침체, 美 노동자가 떠안을 것”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포함한 미국의 경제학자들과 학계 인사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고 나섰다. 이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전략이 경제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경기 침체를 자초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트럼프 관세정책에 공개 반기
20일(이하 현지시간)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제임스 헤크먼(James Heckman), 버논 스미스(Vernon Smith) 등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2명을 포함한 약 900명의 미국 경제학자와 학계 인사들이 '반(反)관세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된 서한에 서명했다. 서한은 "관세를 지지하는 이들은 이를 '경제적 해방'으로 포장하지만, 이는 오히려 미국이 주도했던 번영의 시대를 가능케 한 자유주의 원칙을 뒤엎는 행위"라며 "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은 미국 서민들이 처한 경제 현실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결국 미국 노동자들이 이 잘못된 정책들의 피해를 물가 상승과 자초한 경기 침체의 위험이라는 형태로 떠안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서한은 대부분 국가를 대상으로 한 상호주의 관세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서명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는 '상호주의 관세'는 즉흥적이고 경제적 근거가 부족한 잘못된 공식에 기반해 계산된 것"이라며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0일 각료 회의에서 관세로 인한 인플레이션 심화와 투자 위축에 따른 경기 침체 우려에 대해 "항상 과도기적 어려움, 비용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잘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상호관세가 경제 현실에 근거를 두지 않은 잘못되고 즉흥적인 공식을 만들어 산출됐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내놓은 상호관세안의 세율에 대한 지적도 제기됐다. 백악관은 구체적 세율이 여러 경제·통상 관련 정부 기관 당국자들이 수 주간의 작업 끝에 마련한 여러 옵션 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무역적자를 수입액으로 나눈 비율을 택했다고 했다. 특히 미 무역대표부(USTR)는 수입의 가격탄력성과 관세 비용을 수입업자가 부담하는 비율 등을 정밀하게 반영했다고 설명했으나, 사실상 이는 무역적자를 수입액으로 나눈 단순 계산법으로 '주먹구구식'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관세 충격에 경제 신뢰도 급락
트럼프 대통령은 재선 이후 수차례 관세를 부과했다가 철회하는 조치를 반복하고 있으며, 이달 2일에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관세 부과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일주일 뒤에는 최고 수준의 관세를 90일 유예하고, 대부분 국가에는 10%의 기본 관세율만 유지하겠다고 밝히며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 같은 오락가락 관세 정책은 시장의 큰 변동성으로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상호관세 유예를 발표한 이후인 11일 외환시장에서 6개 주요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한때 99.01까지 떨어졌다. 달러인덱스가 100 밑으로 내려간 것은 2023년 7월 이후 1년 9개월 만이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와 비교하면 9.4% 이상 급락했다.
미국 국채 시장도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같은 날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는 연 4.448%로 상승(국채 가격 하락)했다. 지난 7일 관세전쟁 우려와 안전자산 선호 심리로 연 3.886%까지 떨어졌다가 9일 4.516%로 뛰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주식 하락장에는 투자자가 안전자산에 몰려 미국 국채와 달러 가치가 오르는데 이 공식이 깨진 것이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전쟁이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이고 결국 미국 경기 침체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미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이 약해질 것으로 보면서 미국 국채와 함께 달러 가치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마쓰자와 나카 노무라홀딩스 전략가는 “미국 국채와 달러 가치 하락은 트럼프 행정부 정책에 대한 시장의 불신임 투표”라고 평가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향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몇 년간 미국은 다른 나라보다 더 빠른 성장과 기술 발전, 풍부하고 저렴한 에너지로 ‘미국은 다르다’는 미국 예외주의를 누려 왔지만 이제 외국인 투자자에게 미국은 안전하지 않은 나라가 됐다”고 보도했다.
"수십년만의 스태그플레이션 충격 가능성"
이런 가운데 미국 내에서는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고물가) 충격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최근 미국의 저명 경제학자인 애덤 포센(Adam Posen)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소장은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 정책으로 인해 미국의 경기 침체가 발생할 가능성이 그렇지 않을 가능성보다 크다"며 "미국 경제가 수십 년 만에 가장 큰 스태그플레이션 적 충격을 겪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이 마지막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었던 시기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로, 당시 엄청난 경제 혼란에 빠졌다.
포센 소장은 경기 침체 가능성을 65%로 평가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여러 국가와 무역 협상을 타결하더라도 관세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며 "관세 조치들이 가격을 올리고 인플레이션을 높이며 경제를 둔화시킬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그는 공화당이 세금을 더 인하하고 규제를 완화하더라도 백악관에서 비롯된 만성적인 불확실성 탓에 가계와 기업이 지출과 투자를 늘리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포센 소장은 또 "다른 국가들에 대한 지속적인 위협을 포함해 트럼프 대통령이 추구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제 정책은 미국의 모든 주요 동맹과의 수십 년 된 경제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훨씬 더 큰 불확실성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했다. 그로 인해 각국이 미국에 동조하는 대신 미국의 행동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더욱 단결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울러 포센 소장은 무역 전쟁과 트럼프 대통령의 전술로 초래된 모든 혼란이 핵심 상품과 서비스의 부족으로 이어져 가격이 오르고 인플레이션이 상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만일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 피해를 완화하는 조치들을 할 경우 관세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미국 산업에 보조금을 제공하면서 더 많은 재정 지출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이 또한 인플레이션을 가속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