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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활동 위축에 법인카드 발급↓
유통업계는 임원 감축·연봉 삭감
‘돈 쓰는 방식’ 보수적인 삼성전자

국내 법인카드 발급 건수가 6년 7개월 만에 처음으로 감소세에 접어들었다는 통계가 나왔다. 단순한 소비 감소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기업들의 구조적 위축이 자리하고 있다. 단순히 지출을 줄이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카드를 지급할 인원이 줄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에 영업·기획·지원 인력까지 포함한 조직 전반의 ‘슬림화’가 현실화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기업들, ‘공격’에서 ‘생존’ 모드로
21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1월 한 달 동안 법인 신용카드 발급은 1만1,627장으로 전월(1만1,649장) 대비 22장 줄었다. 이는 지난 2018년 5월 12장 감소를 기록한 이후 6년 7개월 만에 기록한 감소다. 1월 기준으로는 신용카드 대란 대인 2004년 1월 120장 감소 이후 21년 만의 일이다.
이 같은 감소세는 경기 악화 등을 고려해 비용 절감에 나선 기업이 늘어난 데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한은이 발표한 지난 1월 전산업 기업심리지수(CBSI)는 전월보다 1.4p 하락한 85.9로 조사됐다. 이는 2020년 9월(83.4)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법인카드 이용금액도 증가세가 꺾였다. 지난 1월 법인카드 총 이용금액은 17조541억원으로 전월 기록한 19조647억원보다 2조원 넘게 줄었다.
업계에서는 사안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지난 1월의 감소 폭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법인 신용카드 발급이 금융위기 등 특수 상황이 아니면 매월 꾸준히 늘어왔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같은 달 개인 신용카드 발급이 12만2,013장으로 전월보다 249장 늘어나는 등 지난 2016년 4월 이래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는 것과도 대조적이다.
이런 흐름은 향후 외식업, 출장 대행, 숙박·항공 등 관련 산업에도 부정적인 파급 효과를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의 일관된 시각이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법인카드는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기업의 활동 범위와 의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면서 “이 숫자가 꺾였다는 건, 이제 기업들이 생존 모드에 돌입했다는 신호”라고 설명했다.
‘고정비용 큰 사람’부터 줄인다
실제로 최근 많은 유통 대기업이 임원 수를 감축하거나 연봉을 삭감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긴축 차원을 넘어선 구조 재편에 가깝다. 먼저 이마트(이마트에브리데이 포함)는 지난해 말 기준 미등기 임원 수를 32명으로 유지하며 42명이던 전년에 비해 10명(23.8%)을 줄였다. 1인당 평균 급여는 6억7,500만원에서 5억9,800만원으로 11.4% 줄었다.
같은 기간 신세계는 미등기 임원 수가 43명에서 38명으로 5명(11.6%) 감소했으며, 롯데쇼핑은 81명에서 75명으로 6명(7.4%) 줄었다. 현대백화점그룹의 미등기 임원 수는 37명으로 전년과 같은 수준을 유지했지만, 연간 급여 총액은 169억2,000만원에서 145억4,800만원으로 23억7,200만원(14.0%) 축소됐다.
임원 뿐 아니라 직원 수도 감소세다. 금융감독원에 의하면 지난해 말 기준 이마트의 직원 수는 2만4,548명으로 전년 동기(2만6,013명)와 비교해 1,465명(5.6%) 줄었다. 롯데쇼핑 역시 같은 기간 1만9,676명에서 1만8,832명으로 844명(4.3%) 감소했다. 롯데쇼핑은 지난해 전자상거래(이커머스) 부문인 롯데온에서만 두 차례의 희망퇴직 신청을 받은 바 있다.

몇 년 전부터 조용히 시작된 긴축
이 같은 재계의 긴축 흐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화가 아니다. 대기업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상징성이 큰 삼성조차 몇 년 전부터 ‘돈 나가는 구조’를 조정해 왔다. 삼성전자는 2020년 이후 해외 출장을 최소화하라는 지침을 내렸고, 부사장급 임원에게 지원하는 차량을 대형 세단에서 준대형 세단으로 변경했다. 아울러 ‘퇴직자의 꽃’으로 불리던 상근 고문 대상자도 축소했다. 상근 고문직에서 제외되면, 급여 삭감은 물론 차량·비서·사무실 등을 지원받지 못한다.
최근 연말 인사에서 예년보다 임원 승진자 수를 대폭 줄인 것도 비용 절감의 일환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삼성전자는 지난 2023년 말 총 143명의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이는 187명이 승진한 2022년보다 23.5% 줄어든 수준이다. 소폭의 임원 인사를 단행한 2017년 5월(90명) 이후 가장 적은 수치기도 하다. 삼성처럼 상징적인 기업이 먼저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건, 한국 기업 전반에 미치는 신호 효과가 크다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일관된 시각이다.
다만 삼성전자는 미래 경쟁력 강화를 위한 투자 확대 기조는 지속적으로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는 오는 2040년까지 최대 300조원을 투입해 경기도 용인에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할 계획이다. 지난해 상반기에는 역대 최대인 25조3,000억원 규모의 시설 투자도 단행했다. 이 가운데 23조2,473억원이 반도체 부문에 집중 투입했다.
이에 재계에서는 기업의 지출 전략이 장기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란 진단이 나온다. 전략적 지출이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구조 재편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저성장과 수요 위축 상황에서도 반등을 위한 해법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며 “이 가운데 고금리, 전쟁 등 불확실한 경영환경이 이어지면서 당분간 지출 항목을 타이트하게 관리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