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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렌스키, 협상 고려한 수사적 제스처
푸틴은 키이우 공습으로 압박 강도↑
협상 테이블 차려 놓은 트럼프만 조급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종전 합의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미국 측의 종전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자국 내 정치적 반발을 의식한 듯한 발언으로, 자체적인 종전안을 제시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크림반도 관련 ‘강경 발언’ 나선 젤렌스키
24일(이하 현지시각) 외신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날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에서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과 정상회담 직후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파트너들이 제안한 모든 것을 실행하겠다”면서도 “다만 우리의 법률과 헌법에 위배되는 것만은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는 러시아가 점령 중인 크림반도를 암시하는 발언으로, 우크라이나 헌법 제2조는 자국의 “주권은 전 영토에 걸쳐 있으며, 현재의 국경 내에서 분할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크림반도는 1954년 옛 소련이 우크라이나에 넘긴 영토지만, 러시아는 지난 2014년 강제로 점령해 병합을 선언했다. 국제사회는 이를 국제법 위반으로 간주하고 러시아를 제재해 왔다. 젤렌스키 대통령 또한 자국 헌법을 근거로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우크라이나가 헌법상 영토로 간주하는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넘겨주기 위해서는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
애초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을 비롯한 트럼프 행정부 대표단은 23일 영국 런던에서 우크라이나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3개국 외무장관과 만나 종전을 위한 최종 협상을 벌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입장 차이를 확인한 루비오 장관이 회의 전날 불참을 선언했고, 회의는 실무급 회담으로 격하됐다. 우크라이나의 막판 반대에 트럼프 행정부 관계자들은 격분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도 즉각 젤렌스키 대통령의 태도를 지적하고 나섰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24일 언론 브리핑에서 “양보 없이 자기 종전안만 고집한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합의를 파행시킬 심산”이라고 비난했다. 러시아 국영 매체 타스통신 또한 티그란 멜로얀 런던 정치경제대학 애널리스트 의견을 인용해 “유럽과 우크라이나 연합은 미국과의 최종 협상 전부터 트럼프 행정부의 제안을 거부하기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며 “자체적인 제안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고 전했다.
물리적 공격으로 협상력 극대화 노리는 러시아
이런 가운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대한 공습을 단행했다. 로이터통신 등에 의하면 24일 새벽 러시아의 대규모 공습으로 키이우 전역에 폭발음과 미사일 공습경보가 울렸으며, 정부 건물과 일반 시민들의 주거지가 피해를 입었다. 현지 당국은 최소 12명이 숨지고 어린이들을 포함해 90명가량이 다친 것으로 집계했다. 또 도시 전역에서 40건이 넘는 화재가 발생했고, 13개 현장에 등반 전문가와 구조견 등이 파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전날인 23일 늦은 오후에는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 하르키우에 두 차례의 미사일 공격이 단행됐고, 이 과정에 2명이 부상을 입었다. 안드리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살인 욕구만 보이고 있다”고 비판하며 “민간인 공격을 즉시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이번 공습은 종전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른 시점에 맞춰 이뤄졌다는 점에서 협상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실제로 러시아는 과거 협상에서도 군사 행동을 병행하는 식으로 물리적 존재감을 각인시켜 상대방을 압박하는 전략을 취한 바 있다. 결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는 물론 미국과 유럽을 향해서도 “이대로 협상이 결렬된다면 언제든 전면전을 재개할 수 있다”는 경고 신호를 보낸 셈이다.

조급함은 트럼프 몫?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강경 발언과 군사 행동을 이어가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조기 종전에 대한 조급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는 중재자로서의 입장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협상 타결을 압박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해석된다. 가뜩이나 관세 정책 등으로 비판의 중심에 선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외교적 성과를 확보하는 게 절실할 수밖에 없다는 게 국제사회의 중론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3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에 올린 게시물을 통해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발언을 언급하며 “이는 협상에 매우 해롭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그토록 크림반도를 원했다면, 11년 전에는 왜 총 한 발 쏘지 않고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넘겼나?”라고 꼬집으며 “크림반도는 이미 ‘상실’된 영토이며, 논의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젤렌스키 대통령의 선동적 발언 탓에 종전 합의가 어려워지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이 실질적인 합의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젤렌스키 대통령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 내 정치적 반발을 감수해야 하고, 푸틴 대통령 역시 자국 내 여론과 군부 반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크림반도는 흑해 한가운데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당사자들의 협상 조건은 쉽게 수렴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종전 협의가 외교는 물론 각국의 국내 정치에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