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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파월 의장과 만나 금리 인하 주문해 관세 전쟁 속 물가 상황 낙관하는 美 정부 전문가 "고율 관세 정책 실패 전례 되돌아봐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이사회 의장에게 재차 기준금리 인하를 요구했다. 미국의 물가 상승세가 한풀 꺾이자 정부 차원의 금리 인하 압박이 눈에 띄게 거세지는 양상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극단적 관세 정책이 지속되는 이상, 연준이 우려하는 인플레이션 리스크가 완전히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트럼프, '또' 기준금리 인하 종용
29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 시작 이후 처음으로 파월 의장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두 사람이 회동한 것은 2019년 11월 이후 처음이며, 파월 의장의 백악관 방문은 3년 만이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대통령은 (회동에서) ‘연준 의장이 금리를 인하하지 않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수년 만에 파월 의장을 대면한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금리 인하를 주문한 것이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압박은 별다른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날 연준은 보도자료를 내고 “파월은 통화 정책에 대한 자신의 전망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통화 정책 경로는 전적으로 앞으로 들어오는 경제 지표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는 점만 강조했다”고 전했다. 이어 “(연준은) 최대 고용과 물가 안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통화 정책을 설정할 것”이라면서 “이 결정은 오직 신중하고 객관적이고 정치적이지 않은 분석에만 기반하여 내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준에 기준금리 조정을 요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지속적으로 금리 인하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고강도 관세 정책으로 인해 물가 상승·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자, 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 부양을 촉구한 것이다. 그는 지난해 대선 직후 파월 의장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으며, 이후에도 공개 석상에서 파월 의장을 수차례 비난했다.
美 인플레이션 위기 끝났다?
트럼프 대통령이 계속해서 금리 인하를 주문하는 것은 현재 물가 상황이 안정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달 22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서 "물가가 예상대로 잘 잡히고 있는 만큼 인플레이션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하지만 연준 의장이자 '대실패자(a major loser)'인 '미스터 투 레이트(Mr. Too Late)'가 지금 당장 금리를 내리지 않으면 경제가 둔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실제 미국의 물가 지표는 점진적으로 안정되는 추세다. 미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4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2.3% 상승하는 데 그쳤다. 이는 2021년 2월(1.7%) 이후 4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자, 다우존스가 집계한 전문가 전망치(2.4%)를 밑도는 수치다. 전월과 비교해선 0.2% 상승해 전망에 부합했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식품을 제외한 근원 CPI는 전년 동월 대비 2.8%, 전월 대비 0.2% 상승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동안 인플레이션 위기가 불거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 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이 향후 물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지난 22일 미 언론 매체 악시오스(Axios)가 주최한 행사에서 미국의 18개 주요 교역국 가운데 몇 곳과 관세 협정이 체결될 수 있을지 묻는 말에 "대부분의 국가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감은 잡게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이어 그는 "대통령은 강경하게 협상에 임해야 하며,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면서도 "상황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미국 내 소비자 물가는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러트닉 장관은 정부의 관세 정책이 물가를 자극한다는 주장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입장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밝혀 온 인물이다.

고율 관세 정책의 위험성
다만 전문가들은 고율 관세가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은 사실상 필연적이라고 분석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장밋빛 전망'은 사실상 망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한 시장 전문가는 "관세는 단순한 조세 정책이 아니라 국가 경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 수단으로, 소비자와 생산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관세 부과가 이미 시작된 이상 물가 상승 여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얼마나' 오를지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트럼프 행정부는 과거 벌어진 관세 전쟁들이 어떤 결과를 몰고 왔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이 펼친 고율 관세 정책은 대부분 좋지 못한 끝을 맞았다. 1890년 시행된 ‘매킨리 관세(McKinley Tariff)’가 대표적인 예다. 매킨리 관세는 19세기 말~20세기 초 본격적으로 대외 팽창 노선을 추구하며 보호무역을 주장한 윌리엄 매킨리 당시 상원의원의 주도하에 제정된 관세법으로, 평균 관세율을 약 48%까지 인상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매킨리 관세는 도입 이후 극심한 경기 침체를 야기했고, 매킨리가 몸담은 공화당은 1890년 중간 선거에서 참패하며 국민들의 뭇매를 맞았다. 이 밖에도 1922년에 미국 농산물과 공산품을 보호하기 위해 시행된 ‘포드니-매컴버 관세(Fordney-McCumber Tariff)’, 1930년 대공황 속에서 도입된 ‘스무트-홀리 관세(Smoot-Hawley Tariff)’ 등도 국제 무역을 위축시키고 경제 위기를 심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거듭된 실패 끝에 고율 관세 정책의 한계를 깨달은 미국은 1934년 상호무역협정법을 제정하고, 한 국가가 특정 국가에 부여한 가장 유리한 관세율을 모든 국가에 동일하게 적용하는 최혜국대우(MFN; Most Favored Nation) 원칙을 도입했다. 이는 다자무역체제의 기초가 됐으며 이후 관세 무역 일반 협정(GATT),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기반이 됐다. 오늘날 트럼프가 추진하는 상호관세는 MFN 원칙과 정반대의 맥락을 가진다. 미국 정부가 현재의 극단적인 통상 정책을 유지할 경우, 백여 년 전의 과오를 고스란히 답습하게 될 수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