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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캐롤라이나 공장 활용 계획
車 제조 비용 증가, 시장 혼란 예상
기아·혼다·GM 생산 전략 재조정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고율관세 폭탄이 전 세계 자동차 공급망을 뒤흔들고 있다. 높은 관세 장벽에 부딪혀 경쟁력이 약화할 것을 우려한 완성차 업체들은 물론, 부품 업체들까지 일제히 생산 전략 재조정에 돌입한 양상이다. 유럽연합(EU)의 상계관세 부과에 대응해 유럽 생산시설을 늘렸던 볼보자동차도 미국의 관세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글로벌 생산 지도 개편을 시사하고 나섰다.
“이전 모델·플랫폼 최종 결정만 남아”
5일(이하 현지시각)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짐 로완(Jim Rowan) 볼보자동차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신차 공개 행사에 참석해 “미국 정부의 정책 변화에 따라 일부 모델의 생산지를 미국으로 이전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생산 공장을 이미 지어둔 데다, 충분한 가동 여력이 있어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볼보는 이를 통해 미국의 관세 장벽에 대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간 유럽산 자동차는 미국 수출 시 2.5%의 관세를 적용받아 왔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모든 수입 자동차에 25%의 관세를 부과한다는 방침을 고수 중이다. 미국으로 생산 시설 이전이 유력한 모델로는 볼보의 주력 상품인 ‘XC60’와 ‘XC90’이 거론된다. 이들 모델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공장과 같은 플랫폼을 사용한다. 로완 CEO는 “미국으로 이전할 모델과 플랫폼에 대한 최종 결정만 남았다”고 귀띔했다.
다만 올해 유럽에서 생산되는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EX30’ 모델의 미국 수출 계획은 예정대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앞서 볼보는 지난해 EX30의 생산공장을 중국에서 유럽 벨기에로 옮긴 바 있다. EU가 중국산 전기차에 최대 43.5%의 관세를 물리는 상계관세 부과 방안을 확정한 데 따른 조치다. 볼보는 이번 분기 EX30 SUV의 본격적인 생산에 돌입, 하반기부터는 유럽과 미국 시장을 타깃으로 생산량을 늘린다는 방침이다.

자동차 제조 비용 최대 1만2,000달러 증가 예상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수입 자동차에 대한 고율관세가 시행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글로벌 자동차 시장 또한 크게 요동치는 모습이다. 가뜩이나 복잡하게 얽힌 공급망에 25%의 관세가 부과되면, 자동차 제조 비용 또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란 지적이다. 짐 팔리(Jim Farley) 포드 CEO는 “25% 수준의 관세는 자동차 산업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이라며 “수십억 달러의 산업 이익이 사라지고, 산업의 전체 가치 체계가 흔들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 북미 자동차 공급망은 미국, 캐나다, 멕시코를 아우르며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대부분 차량 부품이 제조 과정에서 수시로 국경을 넘나들기 때문에 관련 업체들로선 여러 단계의 관세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앤더슨리서치그룹의 연구에서는 멕시코·캐나다산 수입품에 대한 25% 관세 부과 조치가 북미 전역의 자동차 제조 비용을 최소 3,500달러(약 500만원)에서 최대 1만2,000달러(약 1,730만원)까지 증가시킬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시장의 혼란을 의식한 듯 미국 정부는 멕시코와 캐나다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를 한 달간 면제하기로 했다. 캐롤라인 레빗(Karoline Leavitt) 백악관 대변인은 5일 기자회견을 열고 “북미에서 생산된 차량 중 미국·캐나다·멕시코 3국 간 무역 협정(USMCA)의 원산지 규정을 준수한 차량에 한해 한 달간 25% 관세 부과를 면제한다”고 밝혔다.
다만 생산 시설을 미국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그간의 입장은 거둬들이지 않았다. 레빗 대변인은 “관세를 면제받은 기업들은 한 달 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미국에서는 관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번 조치는 USMCA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멕시코에서 생산한 차량을 미국으로 수출할 때 2.5%의 기본 관세를 부담하는 일부 외국 자동차 제조업체들엔 해당하지 않는다.
완성차 업체들 앞다퉈 미국 생산 물량 확대
이에 멕시코와 캐나다에 생산기지를 둔 우리 기업들에도 비상이 걸렸다. 먼저 멕시코 몬테레이에 공장을 둔 기아는 직격탄을 맞게 됐다. 기아는 해당 공장에서 연간 생산하는 차량 25만여 대 중 약 15만 대를 미국으로 수출하는데, 이들 수출품에 25% 관세가 부과되면 미국 자동차 시장 내 가격 경쟁력 약화는 불가피하다. 특히 미국에서 최근 판매를 시작한 ‘K4’는 물량 대부분이 멕시코에서 생산된다.
이 때문에 기아는 소비자에게 관세 부담이 전가되지 않도록 다른 방법으로 보전해 주거나 멕시코 생산 차량을 미국 외 남미 등 다른 나라로 수출하는 방법, 미국 생산 물량을 늘려 멕시코에서 들어오던 차량을 대신하는 방법 등을 다양하게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아 관계자는 “지난해 말부터 다양한 시나리오별 대응책을 마련했다”면서도 “다만 관세 부과 시점이 예상보다 일러 당혹스러운 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부품 업체들도 대응책 마련에 분주하다. 멕시코에서 자동차 강판을 생산해 현대차, 기아 등에 공급하던 포스코는 최근 미국 내 고로 또는 전기로 설비를 갖춘 철강 공장을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제철 또한 미국에서 공장용지를 물색하고 있다. 북미 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만큼 미국 정부의 정책을 따르는 게 중장기적 관점에서 유리할 것이란 판단에서다.
우리 기업들 외에도 전 세계 자동차업계가 트럼프 행정부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다. 혼다는 준중형 세단 ‘시빅’의 차세대 하이브리드 모델 생산지를 멕시코 과나후아토에서 미국 인디애나주로 변경하기로 했으며, 제너럴모터스(GM)는 멕시코 실라오 공장에서 생산하던 ‘시에라’ 등 주력 모델을 인디애나주 포트웨인 공장에서 생산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스텔란티스 또한 지난 1월 50억 달러(약 7조3,000억원)를 투자해 디트로이트에 공장을 건설하고 중형 SUV ‘듀랑고’를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