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반도체 패권 재건” 라피더스에 대규모 자금 수혈하는 日, 2나노 첨단 파운드리 시장 진입 박차
입력
수정
日 정부, 국책 파운드리 기업 라피더스에 4,000억 엔 추가 출자 추진 세계 반도체 시장 주도권 잃은 日, 정부 차원에서 산업 기반 재건 나서 막대한 재정 지원 속 첨단 공정 개발 박차, 수율·가격 경쟁력 확보는 과제

일본 경제산업성이 국책 파운드리 기업 라피더스에 공공 자본을 추가 출자한다. 과거 세계 시장을 주도했던 자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이 무너진 가운데, 대규모 재정 지원과 민간 자금 유치를 병행해 첨단 반도체 생산 기반 재건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향후 라피더스는 정부 출자를 바탕으로 자기자본을 확충하고,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끌어와 2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 양산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라피더스, 정부 자금 추가 수혈
20일 니혼게이자이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 경제산업성은 전날 2027~2029회계연도에 걸쳐 라피더스에 총 4,000억 엔(약 3조3,490억원)을 투입하는 출자 요구 방침을 공개했다. 앞서 2027회계연도 예산 개산 요구에 1,500억 엔(약 1조2,560억원)을 반영한 데 이어 2028회계연도에 1,500억 엔, 2029회계연도에 1,000억 엔(약 8,370억원)을 추가 지출하겠다는 구상이다. 2027~2029회계연도 출자는 정부 보유 주식의 배당금 등을 재원으로 민간 기업에 출자하는 방식인 '산업투자'를 통해 추진된다.
이번 추가 출자는 라피더스의 민간 자금 조달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치로 읽힌다. 금융기관에서 대규모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기자본비율을 유지해야 하는 만큼, 정부 출자를 통해 자본금을 확충하고 재무 건전성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라피더스는 생산 라인 구축 등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요 은행 등 민간 금융기관에서 총 2조 엔(약 16조7,450억원)을 빌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에는 금융기관들로부터 해당 규모의 대출에 관한 법적 구속력이 없는 의향서를 확보했으며, 현재 실제 대출 실행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日 반도체 산업의 쇠락
일본 정부가 라피더스 육성에 사활을 거는 배경에는 과거 세계 시장을 주도했던 자국 반도체 산업의 쇠락이 있다.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일본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약 50%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였다. NEC·도시바·히타치·후지쯔·미쓰비시전기 등 일본 기업들도 고품질 D램의 안정적인 대량 생산 능력을 앞세워 글로벌 반도체 매출 상위권을 장악했었다.
하지만 일본 반도체 산업의 입지는 산업·시장 구조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눈에 띄게 축소됐다. 우선 대외 통상 환경의 악화가 일본 기업들의 경쟁력을 깎아내렸다. 1980년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급성장으로 미국과의 무역 마찰이 심화하자, 양국은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하고 덤핑 방지 및 외국산 반도체의 일본 시장 접근성 확대를 추진했다.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수출 가격을 인상하고 자국 시장을 해외 경쟁사에 개방해야 하는 압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가치가 급등하면서 일본산 반도체의 수출 가격 경쟁력이 추가로 약화했고, 1990년대 초 버블경제 붕괴로 기업들의 설비 투자 여력까지 위축됐다.
구조적 변화에 대응 늦어
일본 기업들은 산업 구조 변화에도 발맞추지 못했다는 평을 받는다. 과거 일본 반도체 업계는 제품 설계부터 제조, 최종 제품 생산까지 그룹 내부에서 처리하는 수직계열화 방식을 고수했다. 반면 미국과 대만에서는 반도체 설계에 집중하는 팹리스와 위탁 생산을 담당하는 파운드리가 역할을 분담하는 수평적 분업 체계가 빠르게 확산했다. 특히 대만 TSMC가 전문 파운드리 사업 모델을 앞세워 글로벌 고객사를 확보하는 동안, 일본 기업들은 기존 종합 전자업체 중심의 생산 구조에 붙잡혀 적시에 대응하지 못했다. 반도체 부문의 대규모 투자 여부를 결정할 때 그룹 전체의 재무 상황과 다른 사업 부문의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해야 하는 만큼, 신속한 의사결정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반도체 시장의 수요 재편 흐름도 일본 기업들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1980년대에는 메모리 반도체가 산업 성장의 핵심 축이었지만, 1990년대 이후 개인용 컴퓨터(PC)와 인터넷이 보급되고 스마트폰 시장까지 확대되면서 중앙처리장치(CPU)와 시스템온칩(SoC) 등 고성능 연산을 담당하는 로직 반도체의 중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일본 기업들은 기존 메모리 중심의 사업 구조를 제때 재편하지 못하며 수요 흡수에 실패했다. 여기에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공격적인 투자 역시 일본의 시장 지배력을 끌어내렸다. 일본 기업들이 경기 침체와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투자를 축소하는 동안, 한국 업계가 D램을 중심으로 생산 설비 확충을 이어 가며 원가 경쟁력과 점유율을 대폭 제고한 탓이다.
표1. 일본 반도체 산업의 쇠락 요인
| 구분 | 주요 내용 |
|---|---|
| 통상 압박 |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 체결로 수출 가격 하락·시장 개방 압력 확대 |
| 엔고·경기 침체 | 플라자 합의 이후 가격 경쟁력 약화, 버블 붕괴로 설비 투자 위축 |
| 산업 구조 경직 | 수직계열화 고수로 팹리스·파운드리 중심의 분업 체계 대응 지연 |
| 수요 변화 대응 실패 | CPU·SoC 등 로직 반도체 시장 확대 흐름에 뒤처짐 |
| 경쟁국의 추격 | 한국 기업의 공격적인 D램 설비 투자로 시장 점유율 하락 |
라피더스, 산업 재건 카드로
이러한 잡음들은 주요 반도체 기업들의 잇따른 사업 철수와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 1999년 NEC와 히타치의 D램 사업을 통합해 출범한 엘피다메모리는 2012년 경영난으로 파산했고, 도시바는 2018년 반도체 사업 매각 절차를 마무리했다. 파나소닉 역시 2019년 반도체 사업을 대만 누보톤테크놀로지에 팔기로 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존재감이 점차 약화하는 가운데, 일본 정부가 반도체 산업 기반 재건의 '원동력'으로 낙점한 기업이 라피더스다. 라피더스는 2022년 8월 도요타자동차·소니그룹·NTT·소프트뱅크·NEC·덴소·키오시아·미쓰비시UFJ은행 등 일본 주요 기업 8곳이 총 73억 엔(약 610억원)을 출자해 설립했다. 도쿄일렉트론 회장을 지낸 히가시 데쓰로가 이사회 의장을, 웨스턴디지털 일본법인 대표 출신인 고이케 아쓰요시가 최고경영자(CEO)를 맡아 사업을 이끌고 있다.
일본 정부도 라피더스에 막대한 재정 지원을 제공해 왔다. 일본 경제산업성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2025회계연도까지 라피더스의 연구개발과 생산 기반 구축을 위해 1조7,000억 엔(약 14조2,330억원) 규모의 위탁 사업비를 책정했으며, 올해부터는 직접 출자를 통한 자본 확충에도 나섰다. 지난 2월 경제산업성 산하 정보처리추진기구(IPA)를 통해 1,000억 엔을 투자한 데 이어, 6월에는 1,500억 엔을 추가 투입해 정부의 누적 출자액을 2,500억 엔(약 2조930억원)으로 늘린 것이다. 여기에 지난 2월 NTT·소니그룹·캐논·소프트뱅크 등 일본의 32개 민간 기업 역시 총 1,676억 엔(약 1조4,030억원)을 출자했다. 이에 따라 라피더스의 자본금과 자본준비금 합계는 지난 6월 기준 4,249억5,000만 엔(약 3조5,580억원)까지 불어났다.
2나노 양산 계획 추진 중
현재 라피더스는 2027회계연도 하반기 첨단 2나노 공정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생산 기반 확충과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IBM과의 기술 협력을 바탕으로 최첨단 로직 반도체 제조 기술을 확보하고, 인공지능(AI)·데이터센터 등에 사용되는 고성능 반도체 위탁 생산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라피더스는 홋카이도 지토세시에 반도체 생산시설 'IIM-1'을 구축하고 지난해 4월 시험 생산 라인을 가동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300㎜ 웨이퍼에서 2나노급 게이트올어라운드(GAA) 트랜지스터의 정상 작동을 확인했다. 올해는 시제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생산 과정의 불량률을 낮추는 등 수율 개선에 주력 중이다.
가격 경쟁력 제고를 위한 노력도 적극적이다. 지난 7월 아쓰요시 CEO는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서 열린 일본생산성본부 행사에서 "라피더스의 2나노 공정 반도체 가격을 대만 TSMC와 비슷하거나 소폭 낮은 수준으로 책정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TSMC의 2나노 공정 웨이퍼 가격은 장당 300만~350만 엔(약 2,510만~2,930만원) 수준으로 예상됐는데, 라피더스도 이를 가격 책정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다만 라피더스는 TSMC와 달리 아직 상업적 대량 생산에 필요한 수율과 제품 신뢰성을 충분히 검증하지 못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