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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러시아에 추가 제재 채비, 유럽과 '2차 관세' 공조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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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러시아산 원유 연간 11억 유로어치 구매" 주장
“러시아 지원하는 中에도 경제 제재 가해야” 강조
미-EU 대러 제재 논의하는 고위급 회담 준비
지난달 15일(현지시간) 미국 알래스카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 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레드카펫을 걷고 있다/사진=트럼프 대통령 인스타그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 시행을 예고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협상이 교착된 가운데, 유럽연합(EU)과 협력해 중국 등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국까지 겨냥하는 ‘2차 관세’ 조치를 구체화할 가능성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수차례 제재 강화 가능성을 시사해 왔지만, 외교적 해결을 우선시하며 실제 조치는 미뤄왔다. 그러나 전쟁이 3년 반 이상 장기화되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도 별다른 진전이 없자, 강경 대응 기조로 전환하는 분위기다.

트럼프 “대러 제재 2단계 준비”

7일(이하 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US오픈 테니스 대회 남자 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 미국 뉴욕으로 떠나기 전 백악관에서 "러시아에 대한 제2단계 제재를 시행할 준비가 돼 있느냐"라는 취재진 질의에 "그렇다(Yeah, I am)"고 답했다. 구체적인 조치 내용은 밝히지 않았지만 이는 취임 이후 처음으로 추가 제재 의지를 분명히 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초반 러시아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를 뒤집고 최근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그는 지난 7월 14일 러시아가 50일 내 우크라이나와 휴전을 합의하지 않으면 러시아 및 러시아산 원유·원자재 구매국에 100% 상당의 '혹독한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지난달 말부터 러시아산 석유의 주요 구매국인 인도에 기존 25% 상호관세에 추가 25%, 총 50%의 관세를 부과하며 1단계 2차 제재를 시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에 직접 관세를 부과할 뿐 아니라 석유 등 러시아산 제품을 구입하는 다른 나라들에도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2단계 제재에 나설 가능성이 점쳐진다.

같은 날 스콧 베선트 미 재무부 장관도 NBC 방송 인터뷰에서 유럽과 공조해 2차 제재에 나설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강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베선트 장관은 "우크라이나군이 얼마나 오래 버틸지와 러시아 경제가 얼마나 오래 버틸지가 경쟁하는 상황"이라며 "미국과 EU가 추가 제재에 들어가서 러시아 석유를 사는 나라들에 대한 2차 관세를 부과하면 러시아 경제는 완전히 붕괴할 것이고, 그것이 푸틴 대통령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트럼프, 유럽정상들에게 “러시아 원유 구매 중단” 촉구

트럼프 대통령의 2단계 제재 시사 발언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최근 푸틴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초청해 제2차 세계대전 승리 80주년 기념 전승절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면서 '반미(反美)·반서방' 연대의 결속을 과시한 직후 나온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을 위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지만, 러시아가 최근까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대규모 공습을 강행하는 등 제대로 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데다, 오히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북중러 연대의 결속에 직면한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백악관에서 폴란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2단계나 3단계(제재)는 아직 하지도 않았다"며 추가 제재 가능성을 시사한 뒤 "푸틴이 어떤 결정을 하든 우리는 그에 만족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만족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여러분은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악관에 따르면 지난 4일 트럼프 대통령은 ‘의지의 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 소속 유럽 지도자들과 통화할 당시 “ 러시아산 원유가 우크라이나 전쟁 자금 조달에 도움이 된다면서 유럽 정상들에게 구매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통화에서 러시아가 EU에 연간 11억 유로(약 1조7,900억원)어치의 원유를 팔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의 전쟁 노력에 자금을 지원하는 중국에도 경제적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러시아 에너지 매개로 중·러 밀착, 미-EU 협상 중대 전환점 되나

실제 러시아와 중국을 결속을 더욱 단단하게 해 주는 매개는 에너지다. 이달 초 중·러 정상회담 이후 러시아 국영 가스기업 가스프롬 측은 러시아에서 몽골을 거쳐 중국으로 가는 ‘시베리아의 힘2’ 가스관을 건설하기로 법적 구속력 있는 합의를 체결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연간 500㎥의 천연가스를 30년간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핵심 문제인 공급 가격은 아직 합의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미온적이었던 중국의 변화로 중·러가 사업을 진행하기로 한 것은 협력 심화의 신호가 될 수 있다는 해석이 팽배하다.

인도 역시 트럼프 행정부의 징벌적 관세 부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현재 러시아 원유 수출량의 3분의 1은 여전히 인도로 가고 있다. 이들 3개국이 경제적으로 결합하려면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정책에 따른 각국의 반발로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수준까지는 이르렀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미국은 유럽과 대러 제재를 논의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AP통신은 유럽연합 대러 제재 특사 데이비드 오설리번이 이끄는 EU 고위급 대표단이 9일 미 재무부를 방문해 베선트 장관을 비롯한 미 당국자들과 추가 제재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백악관, 국무부, 무역대표부(USTR) 등도 회담에 참여하며 EU 측에서는 에너지, 제재, 금융서비스, 무역담당 인사들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JD 밴스 미 부통령은 지난 5일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통화를 했으며, 다음날인 6일 베선트 장관과도 논의를 했다.

단, 중국은 러시아 에너지의 최대 수입국이지만 미국이 곧바로 중국을 겨냥한 2차 관세를 발동할지는 미지수다. 외교가는 미국이 직접 제재 카드를 꺼내기보다 유럽을 통해 중국·인도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려는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이에 외교가에서는 향후 유럽-러시아-중국 간 에너지·외교 지형이 어떻게 변화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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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현대차 공장 대규모 체포 사태, 韓·美 산업 병폐 겹친 결과?

美 현대차 공장 대규모 체포 사태, 韓·美 산업 병폐 겹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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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국토안부수사국, 한국인 포함 475명 체포
정식 취업 비자 없이 건설 현장서 근무
불법 하도급·美 산업 생태계 한계가 불법 체류 야기했나

미국 정부가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생산 부지에서 이민 단속 작전을 실행, 수백 명에 달하는 한국인을 체포했다. 정식 취업 비자를 취득하지 않은 채 현장에서 근무하던 근로자들이 대거 발각된 것이다. 시장에서는 한국 건설업계의 다단계 하도급 구조와 미국 산업계 특유의 낮은 생산성 등이 이 같은 사태를 촉발했다고 분석한다.

'불법 체류' 단속 나선 美

5일(현지시각) 국토안보수사국 애틀랜타 지부의 스티븐 슈랭크 특별수사관은 기자회견에서 “이번 수사로 475명이 체포됐으며, (해당 수사는) 법 위반자들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고 법치주의를 확립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475명 중 다수가 한국 국적자였다”며 “정확한 국적별 통계는 없지만, 관련 자료를 곧 확보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기업과 여러 소식통에 따르면 체포된 한국인은 3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체포된 이들 중 대다수는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건설 관련 협력사 직원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정식 취업 비자가 아닌 회의 참석이나 계약 등을 위한 비자인 B-1 비자를 발급받거나, 비자 대신 전자여행허가(ESTA)를 소지한 채 일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슈랭크 특별수사관은 체포된 475명에 대해 “미국에 불법적으로 체류 중이거나, 체류 자격을 위반한 상태에서 불법적으로 일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태는 미국 정부가 대규모 이민자 단속을 단행한 결과다. 앞서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은 조지아주 서배나에 위치한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공장 건설 현장에서 대대적인 불법체류자 단속을 벌였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핵심 정책 방향과 궤를 같이하는 행보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이민자들이 미국 국민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주장하며 불법 이민 단속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고, 재집권에 성공한 이후 대대적인 단속 작전을 진행해 왔다.

다단계 하도급의 폐해인가

한국인 노동자가 해외 건설 현장에서 체류 자격 문제로 인해 체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2020년 9월에는 SK이노베이션 산하 SK배터리아메리카(SKBA)의 미국 조지아주 커머스시 공장 건설 현장에서 한국인 노동자 13명이 취업 비자가 아닌 전자여행허가를 소지한 채 일하다 체포된 뒤 자진 출국한 바 있다. 이 같은 불법 관행은 사실상 한국 건설업계의 고질적인 문제인 셈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한국 건설업계 특유의 하도급 구조가 이 같은 문제를 낳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나라 건설업계의 '다단계 하도급'은 꾸준히 관련 산업을 갉아먹는 병폐로 지목돼 왔다. 건설 현장의 다단계 하도급은 크게 소팀장형과 현장소장형, 채용팀장형 등으로 분류된다. 모두 무등록 시공팀에게 재하도급을 주는 형태다. 소팀장형은 5명 내외의 소규모 시공팀을 이끌며 실제 시공을 담당하고, 현장소장형은 대규모 팀을 이끌며 소팀장형에게 공사를 나눠주는 역할을 한다. 채용팀장형은 시공에는 관여하지 않고 근로자 모집만 담당해 소개 수수료를 받는다.

재하도급을 준 하청업체가 중간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는 비용을 최대한 절약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미국에서 취업 비자를 확보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요건도 까다롭다"며 "정식 절차를 밟게 되면 한국에서 저비용 인력을 대규모로 보내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만약 해당 현장에서 다단계 하도급이 이뤄졌다면, 재하도급을 준 하청업체 입장에서는 비자 발급에 드는 비용과 시간을 아끼는 편이 이득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美 산업계의 본질적 한계

시장에서는 미국 산업계 특유의 한계가 이 같은 사태를 촉발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한 시장 관계자는 "미국은 제조업 생산 체계가 상당히 쇠퇴한 상태"라며 "미국 기업들이 제조 부문에서 오프쇼어링(기업 업무의 일부를 타국으로 이관하는 행위)을 택하고, 많은 이윤이 발생하는 소프트웨어 개발과 제품 디자인에 집중해 왔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이어 "아시아의 생산 체계를 미국에서 재현하려면 막대한 자본이 투입돼야 한다"며 "건설 현장에서도 미국 생태계를 활용하기보다는 애초부터 체계가 갖춰져 있는 아시아 현지 인력을 활용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산업계의 역량 부족 문제는 올해 상반기 벌어졌던 '미국산 아이폰' 논란을 살펴보면 보다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지난 4월 트럼프 대통령은 ‘해방의 날’을 선언하면서 “전 세계에 부과되는 유례없는 관세로 미국 내 일자리와 공장이 다시 활기를 찾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관세 부과를 계기로 미국 기업들이 리쇼어링(기업이 해외로 이전했던 생산 시설이나 사업을 다시 본국으로 되돌리는 현상)을 택하고, 결국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을 고용하게 될 것이라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같은 트럼프 행정부의 계획이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쏟아냈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 발표된 이후 금융 서비스 회사 웨드부시 증권의 글로벌 기술 리서치 책임자 댄 아이브스는 “이러한 주장은 허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아울러 "아이폰을 미국 내에서 생산할 경우 가격은 현재 수준(1,000달러)의 3배 이상이 될 수 있다"며 "이는 아시아가 갖춘 매우 복잡한 생산 생태계를 미국 내에 재현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애플이 공급망의 10%를 미국으로 이전할 경우 약 300억 달러(약 44조3,850억원)의 비용과 3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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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은 쉽지만 받기는 어렵다” 보험금 지급거절 급증에 금감원 ‘경고’

“가입은 쉽지만 받기는 어렵다” 보험금 지급거절 급증에 금감원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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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사 지급거절 건수 올해 40% 껑충
금감원장 “보험금 받기 어려워” 지적
당국 보험 민원 관리 더 엄격해질까

보험 민원이 전체 금융 민원의 절반에 육박하는 등 급증세가 꺾일 줄 모르고 있다. 특히 보험금 부지급 분쟁이 민원의 상당수를 차지하며 소비자 불신을 키우고 있는 형세지만, 손해사정 구조의 종속성과 금감원 분쟁조정의 한계가 맞물리면서 근본적 해결책은 여전히 부재하다. 이에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보험사 경영진 책임론까지 언급하며 강경한 대응 의지를 내비쳤으나, 과거와 같이 선언에 그칠 수 있다는 회의론도 적지 않다.

보험민원, 전체 민원의 절반 차지

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금융 민원 11만6,338건 중 손해보험 민원은 4만365건(34.7%), 생명보험 민원은 1만3,085건(11.2%) 등 총 5만3,450건으로, 보험 민원이 전체 민원의 45%를 차지했다. 보험 민원 중에서는 보험금 산정·지급 민원이 2만5,001건으로 가장 많았다. 보험금 지급·부지급을 결정하는 면부책 결정 민원(5,673건)까지 합하면, 보험 민원 중 절대다수가 보험금 관련 민원인 셈이다.

생명보험사로 범위를 좁혀보면 부지급 건수의 가파른 증가세를 더욱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삼성·교보·한화생명·신한라이프·NH농협생명 등 5대 생보사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보험금 부지급은 6,694건으로 전년 동기 4,687건에 비해 42.8%나 증가했다. 작년 상반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부지급 증가율이 18%, 2023년 상반기엔 3%였음을 고려하면 올해 들어 부지급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보험금을 공정하게 산정하는 역할을 하는 손해사정사는 보험금 지급 여부와 금액 산정을 하고, 보험사는 이를 토대로 보험금 지급 등 최종 결정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손해사정업체 대다수가 보험사에 소속돼 있거나 위탁돼 있어, 실질적으로는 보험사가 손해사정과 보험금 지급 결정을 모두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소비자는 보험사와 독립된 손해사정사를 무료로 선임할 수 있지만, 실손보험 등 일부 분야에만 한정돼 있다.

보험 분쟁서 슬쩍 비껴서 있는 금감원

실제 보험사는 보험 상품을 판매할 때는 마치 바로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처럼 광고하지만, 지급해야 할 보험금이 고액인 경우 보험사와 갈등 없이 지급받는 것은 어려운 게 현실이다. 여기엔 그간 금융당국의 안일한 태도도 한몫한 것으로 분석된다. 보험료 부지급이 발생할 경우 소비자로서는 금감원에 민원을 제기하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대응 방법이다. 소송을 제기하는 방법을 선택하자니 변호사 비용도 만만치 않고, 소송에 졌을 경우 상대방의 소송비용도 물어줘야 하는 부담감이 있다 보니 대부분 소비자는 금감원에 민원을 넣는 방법을 선택한다.

하지만 금감원에 민원을 제기해도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조정결정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의료보험 부지급 민원을 예로 들면, 보통은 보험사와 협의해 제3의 의료기관에 다시 의학적 견해를 확인해보고 그에 따라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 여부에 대해 재검토하라는 수준의 권고를 받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와 관련, 보험약관에는 고객과 보험사가 서로 보험금 지급에 관해 다툼이 있을 때 제3의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보험수익자와 보험회사가 보험금 지급사유에 대해 합의하지 못 할 때는 보험수익자와 회사가 함께 제3자를 정하고 그 제3자의 의견에 따를 수 있다'고 명시해 뒀다. 쉽게 말해 서로 간의 의견이 달라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못하겠다고 하고 고객은 보험금을 달라고 하는 상황에서, 양자가 합의에 의해 제3의 의료기관을 정하고 그 의견에 따르도록 하자는 취지로 규정된 약관 조항이다. 보험사 주장은 법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보험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처음 주치의를 통해 진단서를 발급받아 보험금을 청구한 것이 거절되고, 그 이후 서로 간의 합의에 의해 동시감정이라는 절차를 진행했는데도 불구하고 보험금을 못주겠다고 하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다.

이찬진 금감원장 "경영진까지 책임 물을 것"

다만 앞으로는 금융당국에서 보험 관련 소비자 민원을 더욱 엄격하게 관리할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정부 초대 금융감독당국 수장에 오른 이찬진 원장이 취임 직후부터 금융소비자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여러차례 밝혔기 때문이다. 최근 열린 주요 보험사 최고경영자(CEO)와 간담회 이 원장이 가장 먼저 문제로 지적했던 것도 “보험 가입은 쉬우나 보험금 받기는 어렵다”는 점이었다. 이 원장은 “보험금 지급과 관련된 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보장 내용을 합리적이고 명확하게 제시하고, 소비자에게 이를 충분히 설명함으로써 보험금 지급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특히 이 원장은 불건전 영업 행위에 대해 “행위자뿐만 아니라 경영진까지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와 별개로 정부가 금감원 산하 금융소비자보호처를 분리해 금융소비자보호원으로 격상 후 독립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도 소비자 민원 관리에 더욱 신경쓰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금소원 설립은 금감원 내 일개 부서로 존재했던 금소처의 조직과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평가된다. 현재 금소처는 소비자보호 업무에 집중하는 별도의 내부기구로 배치돼 소비자보호부문의 특화된 업무를 맡고 있지만 명확한 한계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핵심 업무인 분쟁조정업무의 경우 분쟁조정위원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반복 민원에 대해 금융회사와 소비자가 조정할 수 있는 중재자 역할을 하지만 구속력이 없다. 금감원 분쟁조정안에 대한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는 '편면적 구속력' 도입 논의가 꾸준히 제기되는 이유다.

이에 금감원은 먼저 보험 상품 심사와 판매 규제를 대폭 강화할 방침이다. 보험상품 사전신고 시 소비자보호 및 법령 준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내부 의사결정 절차 자료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제도를 개편하는 것이 골자다. 또한 감독국과 소비자보호 부서 간 협업을 강화해 새로운 유형의 금융상품 심사 체계를 마련하고, 약관 심사 과정에서 소비자보호 의견을 환류하는 절차도 도입할 계획이다. 판매 단계에서는 △보험사 과도한 방송·온라인 광고 실태 점검 △동일 유형 상품 재가입 시 투자 위험에 대한 충분한 설명 의무화 △민원 이상 징후 인지 시스템 개선 등 조기 경보 체계 도입이 논의된다. 다만 일각에서는 금감원에서 해당 사안을 강조한 전례가 많았던 만큼, 이번에도 흐지부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금융 전문가는 "이번 역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결국 말뿐인 선언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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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파이낸셜] AI 시대, 집단행동이 흔드는 금융 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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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행동이 금융 불안의 핵심 요인으로 부상
SNS와 AI가 불안을 증폭시켜 위기 속도 가속
정보 시스템 댐퍼 구축이 금융 안정의 관건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Research Memo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현대 금융시스템은 단순한 재무 건전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는 순간, 안정적이라 보였던 구조도 한순간에 흔들린다. 2023년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몇 시간 만에 예금의 25%가 빠져나가며 은행은 무너졌고, 금융 불안은 정보 확산과 집단행동의 문제임이 드러났다. 특히 소셜미디어와 인공지능(AI)의 결합은 위기의 속도를 더 앞당기고 있다.

사진=ChatGPT

집단행동의 파급력

현대 금융시스템의 취약성은 개별 은행의 재무 상태보다 집단행동에서 비롯된다. 많은 사람이 동시에 같은 정보를 공유하고 비슷한 결정을 내릴 때, 작은 충격도 순식간에 위기로 확대될 수 있다.

런던 밀레니엄 브리지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국 엔지니어들은 세계적 수준의 설계와 계산을 거쳐 새로운 현수교를 완공했다. 개통식에는 수천 명의 시민이 몰렸고, 다리는 하중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다리는 곧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보행자들이 미세한 흔들림에 발을 맞추자 움직임이 서로 겹쳐지며 진동이 증폭됐기 때문이다. 일부 시민은 어지럼증을 호소했고, 결국 당국은 다리를 긴급 폐쇄했다. 대대적인 재건축까지 검토됐으나, 근본적 해결책은 단순했다. 구조물을 다시 세우는 대신 진동을 흡수하는 댐퍼를 설치하자 다리는 안정성을 회복했다.

이 사례는 금융시장에도 똑같은 교훈을 준다. 개별 참여자의 행동은 합리적일 수 있지만, 동시다발적으로 맞물릴 경우 시스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따라서 위기 대응의 핵심은 개인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행동이 만드는 충격을 흡수할 장치를 갖추는 데 있다.

금융 시스템의 임계점

위기는 표면적으로 건전해 보이는 은행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일정한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불안정성이 급격히 확대되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디빅 모형 또한 예금자들이 동시에 같은 판단을 내릴 경우 실제 상황과 관계없이 대규모 인출이 발생할 수 있음을 설명한다.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가 그 사례다. 당시 불안은 빠른 속도로 퍼진 정보에 의해 예금자들의 판단이 동시에 맞춰지면서 증폭됐다. 특히 전체 예금의 88~94%가 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 대규모 자금이었고, 이 자금은 단기간에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속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 연준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3월 9일 하루 동안 400억 달러(약 53조원)가 유출됐고, 다음 날에는 1,000억 달러(약 133조원)가 추가로 빠져나갈 예정이었다. 퍼스트리퍼블릭 은행도 같은 해 1분기 동안 1,000억 달러(약 133조원) 이상이 줄었으며, 하루 기준으로 250억~400억달러(약 33조원~53조원)가 이동했다. 집중된 예금자 네트워크와 집단적 메시지 전파가 이런 흐름을 가속시켰고, 결과적으로 개별 은행의 대응을 넘어 금융시스템 전체가 충격에 노출됐다.

2023년 은행 자금 유출의 속도와 규모(단위: 십억 달러)
주: 사건- SVB 실제 인출 (3월 9일), SVB 예상 인출 (3월 10일), 퍼스트리퍼블릭 은행 예금 감소 (1분기)(X축), 유출액(Y축)

위기 증폭의 통로

최근 연구들은 금융 불안이 정보 확산과 자금 이동의 상호작용 속에서 증폭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트위터(X)에서 언급 빈도가 높았던 은행일수록 위기 시 손실 규모가 컸으며, 특정 은행 관련 게시물이 급증한 시점에 주가 하락이 동반됐다. 단순한 관심 집중만으로도 취약성이 확대된 셈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확산은 이러한 흐름을 더 강화한다. 인공지능은 짧은 시간 안에 방대한 양의 그럴듯한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동시에 확산시킨다. 루머가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2025년 2월 영국에서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AI가 제작한 허위 콘텐츠가 은행 건전성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경우 응답자의 자금 이체 의도가 크게 높아졌다. 일부 사례에서는 10파운드(약 1만7,000원)의 광고비만으로 최대 100만 파운드(약 17억원)에 해당하는 예금 이동 의사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특히 기업 고객이 집중된 지역은행의 경우 위험은 더 크다. 예를 들어 총예금 120억 달러(약 16조원) 중 절반이 보험 대상에서 제외된 상태라면, 그 가운데 2%만 이동해도 1억2,000만 달러(약 1조6,000억원)가 빠져나간다. 이는 부정적 보도, 담보 가치 하락, 추가 인출로 이어져 위기를 증폭시킬 수 있다.

감독 당국의 경고

국제결제은행(BIS)은 2024년 연차 보고서에서 인공지능이 금융시장 감시 능력을 높일 수 있지만, 동일한 모델들이 잘못된 신호를 낼 경우 그 영향이 시장 전체로 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금융안정위원회(FSB) 역시 특정 AI 기술과 데이터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허위 정보 확산과 시스템 전반의 위험이 커진다고 지적하며 감독 역량 보강을 요구했다.

영국중앙은행은 연례 스트레스 테스트에 AI 관련 위험을 반영하는 방안을 논의했고, 여러 모델이 동시에 작동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상호작용을 관리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개별 은행 차원을 넘어 금융 시스템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때 발생하는 ‘동질화 위험’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모든 상황에서 디지털화가 예금 변동성을 높이는 것은 아니다. 유럽중앙은행(ECB)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모바일 앱이나 온라인 서비스 이용만으로는 평상시 예금 유출이 불안정해지지 않았다. 문제는 위기 상황에서 소셜미디어를 통한 불안 증폭이 결합될 때다. 기술 자체가 원인이 아니라, 예금 구조의 편중·불확실한 정보·짧아진 대응 시간이 겹칠 때 위험으로 이어진다.

정보 시스템의 댐퍼

감독기관과 중앙은행의 과제는 단순한 자본 규제 강화에 그치지 않는다. 정보가 확산되는 속도와 방식을 완화할 장치가 필요하다. 유럽통화금융학회(SUERF)는 감독 당국이 AI 전문성을 확보하고, ‘AI 대 AI’ 연계를 통해 시장 활동을 실시간 분석·대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특정 지표가 임계치를 넘으면 자동으로 가동되는 긴급 유동성 공급 장치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안정위원회(FSB)는 금융회사의 AI 활용 현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특정 업체 의존도를 추적하며, 허위 정보 확산을 안정성 평가에 반영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구체적으로는 루머 충격 모듈을 스트레스 테스트에 포함해 예금 유출과 정보 확산의 상호작용을 평가해야 한다. 은행은 유동성 비율, 중앙은행 담보, 예금 구조를 실시간 대시보드 형태로 공개하고, 단시간 내 배포할 수 있는 사전 승인 메시지 체계를 갖춰야 한다. 이러한 조치가 불안 심리를 완화하는 댐퍼 역할을 한다.

2024년 4월 미국 은행의 긴급 유동성 대비 현황(단위: %)
주: 연준에 담보를 맡긴 은행 (41%), 계정은 있지만 담보는 없는 은행 (40%), 계정이 없는 은행 (19%)

민간의 대응 과제

민간 금융기관도 대비가 필요하다. 은행의 재무와 홍보 부서는 공공 데이터에서 조기 경보 신호를 감지해야 한다. 은행 이름과 부정적 키워드의 급격한 연관 증가, 단기간 리트윗 네트워크의 확산, 검색 패턴의 급변 등이 대표적이다. 실제 연구에 따르면 위기 상황에서 소셜미디어 활동은 시간 단위로도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콘텐츠의 진위를 가려내는 능력도 요구된다. 워터마킹이나 암호 기반 인증이 보편화되기 전까지는 신속한 사실 확인과 근거 제시가 필수다. 은행은 소셜미디어 주목도가 급등했을 때 예금 유출 규모가 얼마나 될 수 있는지 자체적으로 추정하고, 언제 공개 대응에 나설지 기준을 세워야 한다. 대응 시에는 중앙은행 차입 여력, 보유 현금, 보험 적용 예금 비율 등 검증 가능한 수치를 신속히 공개하고, 가능하다면 제3자 검증 자료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위기 대응의 핵심 과제

현대 금융시스템의 가장 큰 위험은 개별 행위가 아니라 동시다발적인 집단행동이다. 인공지능은 이러한 동조 현상을 더 쉽게, 더 빠르게, 그리고 되돌리기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앞으로의 안전장치는 단순한 자본 확충이나 담보 확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 공개, 루머를 반영한 스트레스 테스트, 위기 대응 훈련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금융 당국과 은행 모두가 이를 제도와 운영 과정에 반영해야 한다.

무엇보다 비판을 수용하고 투명성을 강화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시장과 대중을 안심시킬 수 있는 즉각적이고 검증 가능한 대응이 요구된다. 이런 준비가 뒷받침된다면, 금융 시스템은 위기 상황에서도 더 빠르게 안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When Algorithms Wobble: AI, Information Cascades, and the New Bank-Run Curriculum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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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포럼] 중국, ‘디지털 통화는 질 수 없다’

[동아시아포럼] 중국, ‘디지털 통화는 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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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중국 제조업 대비 통화 영향력 ‘빈약’
달러화 스테이블코인 ‘약진’
위안화 스테이블코인 ‘만지작’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지만 통화적 영향력으로만 보면 빈약하다. 전 세계 제조업 생산량의 1/3 가까이를 차지함에도, 국제 결제 시스템(SWIFT)을 통해 인민폐(RMB)로 결제된 비율은 3%를 넘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민간에서 발행하는 스테이블코인(stablecoins, 달러에 연동된 디지털 암호화폐)의 유통 규모는 2,300억 달러(약 320조원)를 넘어섰고 많은 개발도상국의 무역과 저축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위안화, 글로벌 영향력 ‘미미’

이러한 불균형은 중국 정부의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제조업 우위가 통화 영향력(monetary influence)으로 전혀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이 인민폐를 달러에 필적하는 기축통화(reserve currency)로 만들고 싶다면, 관건은 공장과 수출 물량이 아니라 스테이블코인 및 관리 시스템에 있다.

역사적으로 봐도 통화 패권은 생산량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달러가 파운드화를 추월한 것은 1945년이 아닌 1920년으로 미국의 금융 네트워크와 자본 시장이 규모화를 이룬 시점이었다. 현재는 스테이블코인이 실시간에 가까운 결제 기능 및 글로벌 암호화폐 금융(crypto-finance)과의 일체화를 통해 달러화 우위를 강화하고 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 확산, 중국에는 ‘위협적’

국제통화기금(IMF) 추산에 따르면 올해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거래는 2조 달러(약 2,779조원)로 예상되는데, 아시아가 성장의 주춧돌이 되고 있다. 테더(Tether, USDT)와 USDC가 대부분의 시장을 점유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와 튀르키예 등의 지역에서는 달러 암호화폐가 일상생활에서 이용될 정도다. 중국으로서는 전 국민 예금액의 일부만 달러 암호화폐로 흘러 나가도 현재 스테이블코인 시장 전체에 맞먹는 셈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스테이블코인 시장 구성(2025년 중반)
주: USDT, USDC, 기타
‘중국 가구 저축의 0.5%가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된다면’(단위: 십억 달러)
주: 누출 규모(좌측), 현재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우측)

홍콩 통한 ‘위안화 스테이블코인’ 실험

하지만 중국 정부는 홍콩이라는 유용한 금융 시장을 활용할 수 있다. 홍콩은 지난 8월 새로운 스테이블코인 법령을 제정해 허가 및 준비금, 관리 감독 등에 대한 규정을 명확히 했다. 중국으로서는 인민폐 또는 홍콩달러에 연동한 스테이블코인을 본토와 격리된 해외에서 시험할 수 있는 안전한 수단을 확보한 셈이다. 이 역할은 중국이 시험 중인 엠브리지(mBridge, 다중 중앙은행 디지털 통화 플랫폼)에 맡겨질 전망이다.

원자재 무역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페트로 위안(petro-yuan, 중국이 석유 수입 결제를 위안화로 유도해 통화 위상을 강화하려는 시도)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위안화와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을 에너지 대금 지불에 활용한다면 달러 패권을 조금씩 잠식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인한 자본 유출의 위험은 상존한다. 가구 저축이 300조 위안(약 5경8,494조원)을 넘고 은행 이자율이 1%를 밑도는 상황에서 많은 가구들이 유혹을 느낄 만하다. 중국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이중 구조’(two-tier model)를 고민 중이다. 홍콩에서 중국 중앙은행의 채권으로 보증되는 위안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되, 본토에서는 등록금 납부 및 무역 금융 등으로 사용처를 한정하는 것이다. 서킷브레이커(circuit breaker, 패닉 매도를 억제하기 위한 일시적 거래 중단) 및 한도 설정(quotas) 등으로도 유출을 제한할 수 있다.

대학은 위안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시험할 편리한 무대를 제공한다. 특성상 국경 간 거래를 포함하고 이미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활용되고 있다. 현재 상황에서 중국 대학들이 인민폐 이외의 지불 대안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미국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위안화 스테이블코인을 등록금 납부 및 장학금 지급, 연구개발비 지원 등에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통화’는 달러와 경쟁할 수 있을까?

물론 스테이블코인이 불법 금융을 부추기고 ‘달러화’(dollarization)를 가속할 것이라는 우려는 타당하다. 하지만 감사 및 준비금 공개, 규제 준수를 통해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미국 역시 최근 연방 차원의 입법을 통해 위험을 줄이고 달러화의 디지털 기반 강화에 나선 바 있다.

중국으로서는 스테이블코인을 전면 규제할 경우 달러화 토큰이 음성적 경로로 유입돼 달러 지배를 공고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홍콩을 위안화 스테이블코인의 실험장으로 활용하고, 본토에서는 e-위안(e-CNY) 사용을 지속하며, 엠브리지를 대규모 결제에 활용하면 변화하는 통화 시장에서 인민폐가 설 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

이제 글로벌 기축통화를 놓고 벌이는 경쟁은 제품 생산이 아닌 유효한 결제 수단 제공에 달려 있다. 중국이 산업적 기반을 금융 영향력으로 연결시킬 수 있음을 입증하지 못하면, 얼마 안 가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글로벌 결제의 주도권을 완전히 내줄 수밖에 없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China's Reserve-Currency Test Will Be Won, or Lost, on Stablecoins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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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파이낸셜] 관세로 힘 잃은 달러, 미국 경제의 교훈

[딥파이낸셜] 관세로 힘 잃은 달러, 미국 경제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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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규모 관세 이후 달러 약세 전환
제조업 기반 부족 및 자본재·중간재 비용 상승 부담
보복 관세와 시장 신뢰 하락으로 자본 유출과 환율 불안 심화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25년 미국 경제를 가장 명확히 보여준 지표는 관세율이 아니라 환율이었다. 4월 2일 ‘해방의 날(Liberation Day)’ 관세 발표 직후 달러는 주요 통화 대비 수개월만의 최저치로 떨어졌다. 6월 말 파이낸셜타임스는 달러가 1973년 이후 최악의 상반기 성적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전통적으로는 관세가 수입을 줄이고 무역수지를 개선해 통화를 끌어올린다고 설명되지만, 이번 달러 약세는 일시적 반응이 아니라 정책 효과에 대한 평가였다.

사진=ChatGPT

고전적 설명의 한계

경제학의 전통적 설명에 따르면 관세는 수입 축소와 무역수지 개선으로 이어지고, 이는 자국 통화에 대한 수요를 높여 통화 가치를 강세로 만든다. 그러나 2025년 미국은 이와 달랐다. 제조업 부가가치는 1분기 GDP의 9.7%에 불과했고, 공장 가동률도 여름 기준 77~78%로 장기 평균보다 낮았다. 산업 기반이 작고 여유 생산 능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관세는 무역 조건 개선책이 아니라 소비자에게 부과되는 세금으로 작용했다.

실증 결과도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 2018~2019년 무역 갈등 당시 미국이 부과한 관세는 거의 전부 소비자 가격에 전가됐다. 2025년에도 국경에서 부과된 비용은 수입업체를 거쳐 최종적으로 소비자에게 전달됐다. 단기적으로는 해외가 아니라 미국 내 기업과 가계가 부담을 떠안는 구조가 반복됐다.

2018년 3월 1일 관세 발표 이후 달러화의 유로 대비 하락
주: 날짜(X축), 유로/달러 환율(Y축)/미국의 철강·알루미늄 관세 위협(파란색 점선), EU의 보복 계획 발표(빨간색 실선)

보복과 우회 효과

관세 효과를 단순화한 설명이 놓치는 또 다른 변수는 보복과 우회 효과이다. 교역 상대국이 보복 조치를 취하거나 그럴 가능성을 내비치면 자국 통화에 대한 강세 압력은 약해지고, 오히려 약세로 전환될 수 있다. 실제로 4월 2일 발표 직후 단기 데이터는 달러 가치 하락과 해외 자금의 미국 이탈을 보여줬다.

공급망 재편도 빠르게 나타났다. 멕시코가 미국의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했지만, 동시에 중국의 대멕시코 수출은 2024년 기준 멕시코 전체 수입의 약 21%를 차지했다. 관세를 회피하기 위해 중국산 제품이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유입된 것이다. 공급망의 실제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해방의 날 이후 유로화 대비 달러화 가치 급락
주: 날짜(X축), 유로/달러 환율(Y축)/미국의 상호주의 관세 발표 및 이후 +50% 보복 관세(파란색 점선), 중국 34% 보복 및 중국·EU 추가 보복(빨간색 점선)

자본시장 반응

관세 효과를 설명하는 전통적 모델은 자본시장의 반응을 충분히 담지 못한다. 4월 이후 달러는 약세를 보였지만 장기 미국 국채 금리는 상승했다. 이는 미국 국채가 지닌 안전자산 프리미엄, 즉 안정성과 유동성 가치가 약화됐음을 의미한다. 관세 정책이 경기 둔화 우려와 재정 불확실성을 키우면서 국채의 ‘보험 역할’이 흔들린 것이다. 국제결제은행(BIS) 분석도 같은 시기 외환시장과 채권시장에서의 급격한 변동을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투자자들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거나 달러 자산을 줄였다. 실제로 4월 2일 이후 외국인 주식 자금이 미국에서 이탈했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세계 금융 안정 보고서’는 성장 전망 악화와 시장 변동성 확대를 지적했다. 달러 약세, 장기 차입 비용 상승, 불확실성 증가는 산업정책의 성과가 아니라 시장의 경고였다.

단기적으로 수출업체가 관세 부담을 흡수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일본 자동차 산업 사례를 보면 초기에는 판매 가격을 동결했지만 결국 마진 압박으로 가격 인상과 미국 내 생산 확대 계획으로 이어졌다. 한국 자동차·배터리 공급망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정책적 교훈

관세와 환율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달러 흐름은 정책의 신뢰도, 과세 대상, 그리고 보복 가능성에 의해 좌우된다. 산업 기반을 강화하면서 달러의 안전자산 프리미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관세는 범위를 좁히고 안보 목적에 근거해야 하며, 적용 기간도 명확히 해야 한다. 보호조치는 무제한적 관세 대신 성과 기준이 붙은 보조금과 결합돼야 하고, 이를 통해 생산능력이 신속히 확충돼야 한다. 외교적으로는 안정적이고 낮은 수준의 관세를 조건으로 미국 내 투자를 유치하는 협정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최근 일본과 한국과의 협상에서는 자동차 관세를 15% 수준에서 제한하는 대신 대규모 투자 패키지가 논의되고 있다.

관세 수입만으로 재산업화를 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는 비현실적이다. 4월 이후 실효 관세율은 급증했지만 가계 구매력은 하락했고, 공장 가동률은 여전히 평균 이하에 머물렀다. 전면적 관세 부과 뒤에 투자 계획을 뒤늦게 제시하는 방식은 시장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점을 이번 사례가 보여준다.

신뢰를 잃은 미국

2025년 미국의 관세 정책은 달러 약세와 자본 이탈을 불러오며 산업정책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보복 가능성과 제조업 기반 부족, 국채 시장의 신뢰 상실이 겹치면서 관세는 국내 부담으로 작용했다. 향후 정책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범위를 좁히고 근거를 명확히 해야 하며, 보호조치는 생산능력 확충과 연결돼야 한다. 무엇보다 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정책 설계를 통해서만 달러의 안정성과 산업 기반을 동시에 지켜낼 수 있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When Tariffs Don’t Buy Strength: Why the Dollar Fell, and What the Models Missed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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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테크] ‘관료주의 늪’에 빠진 독일

[딥테크] ‘관료주의 늪’에 빠진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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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주의’ 연간 손실 ‘238조 원’
지나친 규제와 서류작업이 문제
생산성과 혁신 ‘질식’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랜 기간 정평이 날 정도로 정확성과 질서의 상징이던 독일이 정반대 방향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뿌리 깊은 관료주의(bureaucracy)로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이포 경제 연구소(Ifo Institute for Economic Research)에 따르면 독일은 매년 서류작업과 업무 지연, 규제 중복으로 1,460억 유로(약 238조원)의 경제적 손실을 입고 있다고 한다. 지나친 절차가 성과를 질식시키는 전형적인 사례다.

독일, ‘효율성’에서 ‘관료주의’의 상징으로

독일의 어려움은 곳곳에서 눈에 띈다. 작년 도이치반(Deutsche Bahn, 독일의 국영 철도 운영사)의 장거리 노선 철도 중 정시에 도착한 경우가 62.5%로 수십 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바 있다. 2024년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Euro 2024) 개최 당시에는 순조롭게 운영되던 경기장과 달리 철도 시스템이 불안정해 교통부 장관이 공식적으로 결함을 인정하는 일까지 있었다. 여기서 문제는 게으름이나 자원 부족이 아니라 복잡성(complexity)이다.

교육 시스템도 비슷한 병목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교내 시설 수리가 지연되고, 정시에 환급되지 않은 등록금이 쌓이고, 방문하는 기관마다 신분증 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 온라인 포털 사이트에서는 이미 등록된 학교 정보까지 다시 입력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모두가 강의와 학습에 투입되어야 하는 시간들이다.

지나친 규제가 ‘혁신 방해’

반면 몰타나 에스토니아 같은 소규모 국가들은 전혀 다른 모범을 보이고 있다. 이들 국가는 국민들이 한 번만 데이터를 입력하면 정부 시스템에서 재입력이 필요 없도록 해 공공 서비스 간소화에 성공했다. 독일 전체가 정보화에 뒤처지면서 학교들도 교육 대신 반복적인 서류 작업에 내몰리고 있다.

관료주의 지지자들은 규칙이 공정성을 높이고 리스크를 줄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규칙은 혁신을 질식시킨다. 독일 산업계는 관료주의와 재정 지출이 줄지 않으면 독일을 향한 투자까지 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독일 정부가 제정한 ‘관료주의 구제법(Bureaucracy Relief Act, 디지털화를 촉진하고 형식적 요건을 간소화하여 기업의 행정 부담을 축소)이 내놓은 진단이다. 기업들이 규제 준수 부담 때문에 자동화를 포기하면 학교는 디지털 학습에서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단순화’ 통해 ‘핵심 업무’에 집중해야

독일의 관료주의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되는 것은 ‘단순화’(simplification)다. 한 독일 베이커리 체인이 두 가지 불필요한 체크리스트를 없앴더니 매출이 2.7% 오르고, 고객 만족도가 개선됐으며, 직원 이직률까지 감소했다. 반면 업무상의 실수는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요점은 성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규칙을 제거하고 중요한 것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이를 학교에 적용하면 수업과 학생 지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체크리스트 제거에 따른 매출 효과(독일 베이커리 체인)
주: 시행 이전 효과가 예상된 영업점(좌측), 효과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 영업점(우측) / 대조군(실선), 실험군(점선) / 시범 실시 전(Pre-RCT), 시범 실시 기간(RCT period), 전사적 확대(firmwide rollout)

즉, 베이커리 체인이 폐열(waste heat, 에너지를 작업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방출되는 열에너지)을 재사용해 비용을 절감했듯이, 학교는 쓸데없는 서류작업을 쳐내 교사들의 시간을 확보해 줘야 한다. 예를 들어 한 교구(校區)에서 교사들이 중복된 서류 작업 시간에 근무 시간의 3%를 소비하고 있다면, 절반만 줄여도 연간 30,000시간이 직접적인 교육 활동에 쓰일 수 있다. 이는 18명의 신규 교사를 채용하는 것과 동일하다.

독일 교구(校區)(교사 1,000명으로 구성) 서류 작업 절감에 따른 효과
주: 서류 작업 시간(좌측), 절감 시간(50%)(우측)

경제 손실 연간 ‘238조원’

독일 관료주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방안들이 모아져야 한다. 먼저 시스템에 입력된 데이터 작성을 요구하는 양식들을 찾아내 자동화하거니 폐기하라. 안전 및 금융에 적용되는 안전장치 및 확인 사항은 유지하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서류 양식과 지나치게 복잡한 조달 규정은 손을 봐야 한다. 독일 국민 그 누구든 한 번 입력한 데이터를 다시 입력하는 일도 없어져야 한다.

또 모든 신규 법령은 일몰조항의 적용을 받도록 하며, 기존 법령은 폐지하거나 통폐합해야 한다. 시간만 낭비하는 현란한 보고서 대신, 호환 가능하고 가능한 정보가 미리 채워진 양식을 사용하라. ‘옥상옥’ 형태의 ‘마이크로매니지먼트’ 대신 자율적으로 가동되는 학교 조직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교육 부문으로 눈을 돌리면 관료주의의 희생양은 바로 인적자원이다. 모든 불필요한 양식이 정작 필요한 교육 활동으로부터 시간을 앗아가고 있다. 서류 양식과 체크리스트를 재검토하면서 절감된 시간을 추적해 이를 교육 활동에 재투자하라.

독일의 비효율은 더 많은 절차가 더 높은 안전을 보장한다는 가정을 기반으로 하지만, 현실에서는 지나친 관료주의가 조직의 역량과 고용 유지, 신뢰를 망가뜨린다. ‘독일의 효율성’(German efficiency)에 대한 신화는 지나친 복잡성과 규제로 인해 무너지고 있다. 앞서 논의한 독일 관료주의 개혁의 혜택은 줄어든 규칙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늘어나는 생산성일 것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The Suffocation of “Efficiency”: What Germany’s Red Tape Teaches Education Reform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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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냐 규제냐” 스테이블코인 도입 앞둔 한국, 중국식 실험 참고할까

“이자냐 규제냐” 스테이블코인 도입 앞둔 한국, 중국식 실험 참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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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금 및 ICO 허용 규정 포함
핵심 쟁점은 ‘이자 지급 여부’
자본유출 우려와 국제 비교

금융권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스테이블코인 도입 논의가 뜨거운 가운데, ‘디지털자산 산업의 혁신과 성장에 관한 법률(디지털자산혁신법)’이 발의됐다. 해당 법안은 국내 발행을 전면 허용하면서도 자본금과 상호운용성 등 강력한 규제를 부과한 게 핵심이다. 정책 당국은 제도권 편입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이자 지급 여부가 최대 쟁점으로 떠오르는 양상이다. 중국이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본토가 아닌 홍콩에서 제한적 실험을 택한 것처럼, 한국 역시 국내 자본 통제와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경쟁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과제가 시급하단 진단이 나온다.

수요 없는 규제 논의 반복

6일 정치권에 따르면 이강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디지털자산혁신법을 대표발의했다고 밝혔다. 이번 디지털자산혁신법은 이 의원을 포함한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강준현·유동수·이정문)이 준비 중이던 법안으로 가상자산 업권법으로는 두 번째,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으로는 다섯 번째다.

해당 법안은 국내 가상자산발행(ICO)을 전면 허용하고,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대한 규제 장치를 강화한 것이 골자다. 이를 위해 가상자산 발행에 대한 심사를 법정협회가 주관하도록 했다. 가상자산의 기본 정보가 적힌 ‘백서’가 증권신고서와 달리 프로젝트의 청사진만 담고 있을 뿐, 구체적인 매출이나 실적 등은 다루지 않는 만큼 이를 한층 면밀히 검토한다는 구상이다.

또 법안은 가상자산 관련 업종을 9개로 분류하며 업종에 따라 인가제와 등록제를 나눠 병행하는 구조로 설계됐다. 현재 국내에서 가상자산 거래소를 운영할 수 있는 ‘디지털자산 매매 교환업 및 중개업’은 당국의 인가를 받아야만 사업을 지속할 수 있다. 반면 보관관리업과 지급이전업, 일임업, 집합운용업, 대여업, 조언업, 매매교환 대행업 등은 등록 대상이다. 이 같은 현실을 명문화하는 셈이다.

스테이블코인 규율 체계도 법안에 포함됐다. 우선 발행인의 자본금 요건은 10억원으로 책정했다. 자본금을 갖춘 발행인은 대주주 적격성, 사업 계획의 타당성, 이해상충 방지 체계 등을 당국으로부터 엄격히 심사받게 된다. 스테이블코인과 연동되는 준비자산은 발행 규모 이상으로 늘 유지해야 하며, 매월 실사보고서와 매년 외부감사 보고서도 공시해야 한다.

아울러 스테이블코인 발행의 기반이 되는 블록체인 메인넷에 대한 규정도 포함됐다. 그간 국내에선 블록체인 메인넷과 관련해 뚜렷한 기준이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이번 법안에선 금융위원회가 지정하는 전문기관이 메인넷 관련 기술 표준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때 해외 블록체인 메인넷과도 연동될 수 있도록 상호운용성을 확보하는 게 핵심이다. 예컨대, 국내 메인넷인 ‘카이아’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더라도, 이더리움이나 트론 같은 해외 블록체인 메인넷을 기반으로도 유통될 수 있도록 상호운용성을 확보하게끔 한다는 설명이다.

이 의원은 “스테이블코인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요건이 바로 상호운용성을 확보하는 일”이라며 “(국내 발행) 스테이블코인이 여러 글로벌 블록체인을 통해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현재 국회에 다수의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과 가상자산 업권법이 발의돼 있는 만큼 연내 이를 통일하는 게 목표라고 이 의원은 덧붙였다.

은행권 이해관계와 정책 당국 간 충돌 불가피

정책 당국과 업계가 가장 첨예하게 맞붙는 지점은 ‘스테이블코인에 이자를 붙일 수 있느냐’다. 보유 인센티브가 없다면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할 유인이 약하고, 반대로 이자 지급을 허용하면 은행 예금과 사실상 동일한 형태를 갖추면서 자금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국내 가이드라인은 발행자의 직접 이자 지급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면서도 거래소 예치·스테이킹·렌딩 등 제3자 경로의 간접 보상은 남겨두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스테이블코인이 제도권으로 들어오면, 예금자보호와 유동성 규제 등 은행권에 적용되는 안전장치 없이 예금 대체가 진행되는 구조적 문제가 불거진다.

수요 측 단서는 청년층의 이용 행태에서 확인된다. 청년정책 플랫폼 ‘도도한콜라보’가 20·30대 금융 소비자 25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 응답자들은 스테이블코인의 유용성으로 ‘투자·트레이딩(42.6%)’, ‘자산 보관·가치저장(42.2%)’을 꼽았다. 또 응답자 중 21.3%는 실제 스테이블코인 보유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거래 규모는 100만~1,000만원 구간이 58.7%로 최다를 차지했다. 이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이미 ‘디지털 재테크’ 경향이 이미 확산돼 있음을 보여준다.

금융시스템 관점에서 가장 큰 위험은 ‘이자 경쟁-자금-코인런(대규모 인출)’의 전개다. 발행자 또는 플랫폼이 이용자 유치를 위해 금리를 올리면 이자는 경쟁적으로 올라가고, 준비자산 운용의 리스크는 커진다. 이 과정에서 충격이 발생하면, 상환 수요가 급증해 페깅(가치연동)이 이탈하는 대규모 인출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 당시, 준비금의 8.25%(33억 달러)를 SVB에 예치했던 서클의 USDC가 일시적으로 0.86달러까지 하락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정책 옵션은 두 갈래로 압축된다. 첫째, 이자 지급을 금지하고 100% 안전자산·고유동성 준비, 일일 내역 공시·감사, 즉시 상환 의무, 격리신탁(링펜싱) 등을 강제해 ‘결제 인프라형’으로만 허용하는 길이다. 이 경우,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유인은 결제·송금 편의로 제한돼 예금 대체 압력은 낮아지지만, 수익 인센티브가 사라져 수요가 얕을 공산이 크다. 둘째, 간접 이자를 인정하되 은행 예금과 동등한 유동성 규제를 부과해 ‘준예금형’으로 관리하는 모델이다. 다만 이 같은 경로는 은행권과의 직접 경쟁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시장금리 급등기·충격 시 예금 유출 가속화라는 시스템 리스크가 존재한다.

자본 흐름 통제-디지털 자산 혁신 간 균형 과제

중국이 위안화 국제화를 위해 홍콩을 스테이블코인 시험대로 활용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토에서 직접 시행할 경우, 자본 통제 약화와 대규모 자금 유출 위험을 감당하기 어렵단 판단에서다. 홍콩 금융당국(HKMA)은 최근 제도 개정을 통해 면허 기업에 법정화폐 담보 토큰 발행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다만 초기 단계에서는 극소수 기업에만 면허를 주고, 활용도 또한 기업 간 거래(B2B)로 제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홍콩은 샌드박스 프로그램을 통해 철저한 검증 절차를 마련했다. 이는 스테이블코인이 가진 결제 효율성과 국제화 잠재력을 시험하면서도, 급격한 자본 유출과 투기 과열을 막기 위한 방어적 조치로 해석된다. HKMA 관계자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시장 과열과 투기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다”면서 “샌드박스 프로그램 지원 기업들의 활용 사례(use case), 준비금 보유 능력, 법적 분쟁 처리 방안 등을 철저히 심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경우도 홍콩과 유사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봤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시장에 등장하더라도 높은 금리와 투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과 경쟁하기는 어렵다는 관측이다. 나아가 원화 자금이 해외 스테이블코인으로 대거 이탈하거나, 역외 거래소를 통한 비트코인·알트코인 전환 경로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국제국제은행(BIS) 역시 “달러 외 통화를 기반으로 한 스테이블코인이 도입되더라도 달러 스테이블코인 수요는 줄지 않을 것”이라며 “이는 오히려 각국의 자본 유출 통로로 작동할 수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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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테크] 미중 ‘인공지능 체계’ 분리에 대처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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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 인공지능 기술도 ‘분리’
양쪽 기술 만족시키는 ‘교육 시스템’ 필요
위기, ‘기회’로 전환해야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포괄적 관세는 경제적인 영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특히 아시아를 포함한 각국은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분열된 기술 체계를 만족시키는 교육 시스템 구축의 과제를 맡게 됐다.

미중 인공지능 개발도 ‘양극화’

한때는 실험실 장비와 클라우드 사용 한도가 걱정이던 대학과 교육 당국이 훨씬 큰 고민에 빠진 셈이다. 관세와 수출 통제가 가격표만 바꾸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안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술적 스택(stack, 인공지능(AI) 애플리케이션 구축, 훈련, 배포 및 관리에 필요한 도구, 기술 및 인프라의 계층적 조합)의 양상까지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관세 전쟁이 아니라 커리큘럼 전쟁이 된 것이다.

그동안 교육 당국의 입장에서 관세는 해결 가능한 잡음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10~15%의 관세율이 일상이 된 지금은 변동성을 일시적 변수로만 볼 수가 없다. 현재 구매하는 장비가 5년 정도 기간에 안정적인 재구매가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다면 교과과정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출 통제도 불확실성을 크게 더한다. 올해 초 미국은 첨단 AI에 대한 규제를 꺼내 들었다가 부분인 철회를 결정한 바 있다. 인공지능 모델에 특별 사용 허가를 적용할지 모른다는 사실만으로도 대학은 특정 기술 하나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됐다. 기술 표준과 접근 마저 정책 변수가 됐기 때문에 공급망 다각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국, 미국에 맞먹는 ‘AI 개발 예산’

미국이 AI 산업 성장을 위해 작년에 투입한 1,090억 달러(약 151조원)는 대부분 민간 투자에 의한 것이지만 중국은 공공 투자에 의존한다. 중국의 올해 투자 규모는 최대 980억 달러(약 136조원)에 이르는데, 여기에 초기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한 82억 달러(약 11조원)는 별도다.

중국과 미국의 AI 투자 규모(단위: 십억 달러)
주: 중국 공공 투자, 미국 민간 투자, 중국 민간 투자(좌측부터)

이는 동남아에 기회로 작용한다. 우선 알리바바와 화웨이가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에 클라우드 시설을 지으면서, 미국 빅테크들의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지역 대학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 속도도 처지지 않는 클라우드 사용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또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데이터 센터를 위한 에너지 수요는 2030년까지 두 배의 증가가 예상되며 말레이시아의 전력 사용량은 같은 기간 7배로 늘어날 것이다. 이러한 수요 성장은 대학에 클라우드 비용을 위한 협상력까지 제공해 줄 수 있다.

아세안 데이터 센터 에너지 수요(단위: 테라와트시)
주: 2024년(갈색), 2030년(회색) /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좌측부터)

물론 서구 기업들도 아예 없지는 않다. 아마존 웹 서비스가 싱가포르에 90억 달러(약 12조5천억원) 규모를 투자했고 지역 GPU 서비스 제공업체들도 첨단 클러스터를 구축하고 있다. 아세안 정부로서는 중국 및 동맹국 클라우드를 묶어 저렴한 대안을 선택할 수 있는 다각화의 길이 열린 것이다.

동남아시아 교육 부문, ‘기회와 위기’

한국과 일본도 새로운 차원을 더한다. 한국이 10,000개의 고성능 GPU 구매를 통해 국립 인공지능 센터를 구축하기로 하는 동안 일본은 AI 진흥법을 통해 산학협력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양국 모두 인구 문제를 겪고 있지만 연구개발 역량으로 볼 때 아세안에는 귀중한 파트너임이 분명하다. 한국과 일본은 연구진 교환 및 공동 실습, 자격증 인증까지 첨단 교육 훈련을 제공하고, 아세안은 필요한 규모를 공급할 수 있다.

앞으로의 기술 인력은 미국 및 동맹국과 중국의 기술 사양을 모두 이해하는 전문가가 돼야 한다. 이는 대학의 교육 과정이 첫해에 수학, 최적화, 프로그래밍 등의 과목을 완료한 후 양쪽의 ‘스택’과 동일한 프로젝트를 모두 운영할 수 있도록 구성돼야 함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아세안 국가들은 각자의 컴퓨팅 수요를 모아 공동 자산화할 필요가 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 ‘GPU 은행’(GPU bank)을 구축하면 대학이 예측 가능하고 저렴하게 클라우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기술 표준까지 통일할 수 있어 갑작스러운 수출 통제에도 지속 가능한 프로젝트가 가능하다.

정책 당국으로서는 미국 관세 소송과 수출 통제가 완료되는 시점까지 기다리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교육은 학사 일정이 아닌 졸업생 배출 일정에 따라 움직인다. 내년에 학위 과정을 시작한 학생이 졸업할 때가 되면 이미 이중 스택 시스템이 일상화된 시점일 것이다. 지금 대비해야 양쪽 기술 사양에 모두 익숙한 졸업생을 공급할 수 있고, 움직이지 않으면 클라우드 공급업체와 단기 계약에 골몰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관세와 중국의 산업 정책은 아시아의 교육 시스템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승자는 학생들에게 양쪽 모두를 가르치고, 공동 컴퓨팅 용량을 확보하며, 정책 변화를 견딜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는 쪽이 될 것이다. 파편화된 세계에서는 ‘선택의 자유’가 자주권인 셈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Tariffs, Talent, and the Stack We Teach: How U.S. Protectionism Is Rewiring Asian Education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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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폴리시] 관세 압박 속 한국과 일본의 균형 전략

[딥폴리시] 관세 압박 속 한국과 일본의 균형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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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관세와 반도체 규제로 동북아 교역 질서 변동
한·일, 안보는 미국 동맹 유지·경제는 중국 협력 병행
관세와 규제 지속 시 대중 균형 전략 강화 전망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미국이 2025년 4월 수입품에 10% 관세를 일괄 부과하면서 동북아 교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대규모 무역 적자국에는 최대 50% 보복관세까지 가능해 한국과 일본 모두 직접적인 압박에 노출됐다. 안보 동맹국의 관세 조치가 현실화되자 양국은 첨단 반도체 수출 규제 불확실성까지 떠안게 됐다. 이 같은 환경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중국과의 관계를 조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진=ChatGPT

전략적 해빙의 배경과 위기관리

이번 한일 관계의 해빙은 감정적 화해가 아니라 현실적 계산의 산물이다. 8월 말 이시바 총리와 이재명 대통령은 17년 만에 공동성명을 내고 서로를 ‘파트너’로 규정하며 미래지향적 협력을 약속했다. 이 대통령은 미국보다 일본을 먼저 방문했고,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을 ‘중요한 동반자’로 표현했다. 7월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뒤 중국에 유화적이라는 비판을 받던 이시바 총리도 한국과의 관계 안정이 미국의 거래적 무역정책 속에서 고립을 줄이는 방안이라고 판단했다.

양국은 과거사를 유보할 경우 수출 규제 예외를 공동으로 협상하고, 관세 대응을 조율해 미국과의 협상에서 상호 충돌을 피할 수 있다. 이는 이념적 화해가 아니라 위기관리 차원의 접근이다. 그러나 불안정 요인도 크다. 이시바 총리의 정치적 기반은 약하고, 이 대통령 역시 경기 둔화 시 반일 정서를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무역 구조 변화와 중국의 부상

중국은 일본과 한국 모두의 최대 교역국이다. 2024년 일본의 대중 수출 비중은 17.6%, 수입 비중은 22.5%였으며, 한국은 대중 수입 1,400억 달러(약 189조원), 수출 1,250억 달러(약 169조원)를 기록했다. 미국의 관세 전면화로 중국은 별다른 양보 없이도 시장 안정성만으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이 같은 환경에서 일본과 한국은 중국에 과도하게 기울 필요는 없지만, 불필요한 충격은 피해야 한다. 2024년 부활한 한·중·일 정상회의는 이를 보여준다. 인적 교류와 과학 협력, 경제 조정 등 관계의 장치를 마련해 두고 주요국 정책이 불안정할 때 활용하는 방식이다.

2024년 기준 일본과 한국의 대(對)중국 교역 규모 및 비중(단위: 십억 달러, %)
주: 국가-일본, 한국(X축), 교역 규모 및 비중(Y축)/대중국 수출(갈색), 대중국 수입(분홍색), 대중국 수출(진한 회색), 대중국 수입(연한 회색)

반도체 규제와 정책 흐름

미국은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 허가 요건을 강화하고, 9월 초부터 일부 기업에 부여했던 예외 조치를 취소하거나 재검토하고 있다. 한국의 메모리 기업과 일본의 장비 기업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같은 위험에 놓여 있다. 예외가 철회되면 공급망이 끊기고 생산 일정이 지연되며 비용이 급증한다. 생산 공정이 중국 밖에서 이뤄지더라도 중국 내 장비·부품 의존도가 높아 피해를 피하기 어렵다.

미국 정부는 동맹국에 수출 통제를 따르도록 요구하며, 필요한 경우 개별 협상을 통해 제한적 예외를 신청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경우 시장 접근과 행정 절차에서 예측 가능성을 보장하겠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한국과 일본에 이는 감정적 선택이 아닌 계산된 대응이다.

주: 4월 2일(미국, 10% 관세 발표 및 보복 관세 가능성 시사)/8월 7일(미국, 일부 한국산 제품에 15% 관세 부과)/8월 23일(한·일 정상, 협력 강화 합의)/9월 1일(미국, 삼성전자·하이닉스 중국 내 장비 관련 허가 취소)/9월 2일(미국, TSMC 중국향 신속 통관 자격 취소)/9월 4일(미국 행정부, 관세 사안 대법원 신속 심리 요청)

정치적 압력과 균형 전략

한국에서는 좌파 성향 정부가 과거 반일 정서를 동원하거나 중국에 기울던 흐름에서 벗어나, 관세와 규제로 인한 경제 부담을 이유로 일본과의 협력을 선택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시바 총리가 중국에 유화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경제적 위험을 줄이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 유지를 모색한다.

이 과정에서 안보는 미국 동맹에 의존하고, 경제는 중국과의 협력으로 위험을 완화하는 이중 압력이 나타난다. 미국 외교 당국의 우려는 이러한 접근이 단순한 위험 분산을 넘어 전략적 균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다. 실제로 1981년 한국 군사정권은 미국이 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북한과 협력할 수 있다고 압박했고, 레이건 대통령은 이를 수용하며 한발 물러선 바 있다. 지금의 무대는 군사가 아니라 무역이지만, 협상 방식은 유사하다.

구조적 변화와 전망

일부에서는 이번 한일 공조가 새로운 흐름이 아니라고 본다. 과거에도 미국의 관심이 다른 지역으로 쏠리면 양국은 현실적 협력을 시도해 왔고, 2024년 3자 정상회의 복원도 그 연장선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다르다. 첫째, 미국의 관세 정책이 동맹국과 경쟁국 모두를 압박하는 전면적 조치라는 점이다. 둘째, 반도체 규제가 제재 대상 기업 지정 수준을 넘어 기존 수출 허가 취소와 재검토로 이어져 한국과 일본 기업의 생산망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변화는 중국의 협상력을 높이고 있다. 특별한 양보 없이도 안정적인 시장 접근만으로도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은 안보는 미국과 협력하면서도 경제 안정은 중국과의 협력을 병행하는 전략을 취할 가능성이 크다.

정책 선택의 기로

관세와 규제의 압박은 한국과 일본에 불가피한 선택을 강제했다.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경제적 비용을 감수할지, 아니면 중국과의 제한적 협력을 통해 안정을 도모할지의 문제다. 두 나라는 미국과의 안보 동맹을 지키면서도 중국과의 갈등을 완화하고 상호 협력을 통해 위험을 관리하는 길을 택하고 있다.

이 접근은 이념적 시각에서는 불편할 수 있으나, 제조업과 기술 기반에 의존하는 양국 경제 구조에서는 현실적인 선택이다. 미국 법원이 비상 관세 권한을 제한할 경우 단기 압박은 완화될 수 있지만, 관세와 규제가 지속되는 한 이러한 전략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A Narrow Channel: East Asia’s Pragmatic Pivot Under Tariff Shock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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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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