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으면 ‘지각비’ 내야” 1기 신도시 재건축 사업 먹구름 짙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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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축 규제 완화책 좌초 위기
사업성 악화 우려, 리모델링 선회
재초환 폐지 가능성 원점 회귀

수도권 1기 신도시를 비롯한 노후 도시 주민 사이에서 재건축 사업에 제동이 걸릴 것이란 우려가 확산하는 모습이다. 리더십 부재와 조기 대선 정국이 이어지면서 재건축 규제 완화에 공을 들여온 정부의 정책이 백지화할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이다. 무산이 유력한 정책으로는 재건축 특례법 제정과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폐지 등이 꼽힌다.
리모델링 규제 완화 가능성에 무게
8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최근 노후 도시 주민 사이에서는 재건축 회의론에 힘이 실리고 있다. 현 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주택 270만 호 공급을 목표로 재건축 규제 완화에 힘써 왔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정책 동력을 상실했다는 이유에서다. 1기 신도시인 경기 안양 평촌의 한 아파트 단지 재건축 추진준비위원회 관계자는 “차기 정부 정책에 따라 사업 방향이 정해질 수 있어 재건축파 주민들의 우려가 커졌다”고 토로했다.
인근에 사무실을 둔 개업공인중개사도 “이번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을 두고 리모델링을 원하는 주민들과 재건축을 원하는 주민들의 반응이 극명히 엇갈린다”며 “그간 위축됐던 리모델링 측에서는 수직증축 등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오는 상황이지만, 향후 대선 결과에 따라 리모델링과 재건축을 두고 주민들의 갈등이 재차 극심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여기에 지난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내놨던 공약도 재건축을 바라는 노후 도시 집주인의 우려를 키우는 요소로 꼽힌다. 당시 민주당은 △용적률 500% 4종 일반주거지역 신설 △재건축 안전진단 및 리모델링 안전성 검토 기준 완화 △ 세대 구분 리모델링 허용 △수직증축 리모델링 확대 등을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또 재건축 과정에서 늘어난 용적률의 절반 이상을 청년 등 무주택 서민을 위한 기본주택으로 활용하고, 장기 거주 세입자에게는 청약권을 부여하겠다는 방안도 제시했다.
이 같은 방안들은 대부분 리모델링 규제 완화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는 다시 말해 가구 수 증가가 많은 재건축은 사업성이 떨어질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다. 재건축과 리모델링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노후 단지들로선 차기 정부의 정책 기조에 따라 사업성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선도지구 경쟁 밀려난 단지들, 대응책 마련 분주
오랜 시간 재건축과 리모델링 사이에서 팽팽한 의견 대립을 이어온 단지들이 속속 리모델링을 결정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목련2단지’가 대표적 예다. 해당 단지는 최근 권리변동계획 확정총회를 열고 과반의 동의를 얻어 수평·별동 리모델링 계획을 확정했다. 기존 195% 용적률의 994가구를 299.74% 용적률의 1,023가구로 바꾸는 게 골자다.
공사비는 3.3㎡당 778만원이며, 추정 비례율은 80.23%다. 공사비가 오르면서 조합원들이 내야 할 분담금은 전용면적 58㎡ 기준 4억7,900만원으로 추산된다. 이는 2021년 추정치인 2억8,600만원의 2배에 가까운 금액이다.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재건축을 택하면 자칫 감당하기 어려운 ‘지각비’를 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이형욱 목련2단지 리모델링조합장은 “지금 리모델링을 취소해도 재건축을 바로 추진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며 “선도지구 경쟁에서 밀려난 지 오래”라고 말했다. 이어 “특별법에 따른 재건축은 이주단지를 마련해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원칙인데, 평촌 50개 단지가 재건축에 들어가면 후순위 단지는 공사 착공 시점마저 가늠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해마다 공사비도 급증하는 만큼 빠른 사업 추진에 주력하겠다는 의미다.
정책 동력 상실 불가피
한편 현 정부에서 추진해 오던 법안들도 줄줄이 좌초 위기에 놓였다. 현재 국회에는 재개발·재건축 인허가 절차를 단축하고, 용적률을 법적 상한의 1.3배까지 높여주는 재건축·재개발사업 촉진에 관한 특례법이 계류돼 있다. 이와 함께 재건축 조합 설립에 필요한 주민 동의율 요건을 75%에서 70%로 완화해 재건축 기간을 최대 3년 단축한다는 게 정부 계획이었지만, 이를 위한 도시정비법 개정안 역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간 여야는 정비사업 속도를 높이기 위한 법안에 대해선 큰 틀에서 뜻을 함께하고 있었다. 일반법을 개정해 대상 사업장을 확대하느냐, 정부 방안대로 특례법을 새로 제정하느냐의 방법론에서만 이견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계엄 사태 이후 국회의 법안 심사는 일제히 멈춰 섰고, 조기 대선 국면에서 파급력이 큰 부동산 정책 관련 법안은 통과 여부가 더욱 불확실한 상황이다.
야당인 민주당이 강력한 반대 의사를 피력해 온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재초환) 폐지, 임대차 2법(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상한제) 폐지,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 폐지 또한 기약할 수 없게 됐다. 이 가운데 재초환은 재건축으로 조합원이 얻은 이익이 1인당 8,000만원이 넘으면 초과 금액의 최대 50%를 부담금으로 환수하는 제도로, 국민의힘이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폐지를 발의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1기 신도시 등 노후 도시 정비사업 정책의 큰 틀은 유지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는다. 주택 공급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는 데는 여야의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1기 신도시 재정비 등 사안은 집권당이 바뀌더라도 유지될 것”이라고 짚으며 “공공임대, 재초환 정비 등 세부적인 사안에 변화가 있을 수는 있지만, 주택 공급은 장기 정책인 만큼 큰 타격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