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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폴리시] 아시아 연대의 열쇠, 무역 전략 아닌 교육 협력

[딥폴리시] 아시아 연대의 열쇠, 무역 전략 아닌 교육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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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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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주제에 대해 사실에 근거한 분석으로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 전달에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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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협상력, 관세 아닌 지식과 인적 자본
무역 연합이 안고 있는 분배 갈등과 구조적 한계
교육·연구 협력이 만든 지속 가능한 연대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시아 지정학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는 관세율이나 무역수지가 아니다. 핵심은 지식 자본이다. 2023년 아시아는 세계 특허 등록의 약 70%를 차지했고, 이 가운데 중국이 절반 가까이 발급했다. 지난 10년 동안 아시아의 비중은 13% 높아졌다. 이는 협상력이 물류량이 아니라 인적 자본과 지식 생산에 기반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미국의 분할·통제 전략에 대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무역 연합이 아니라 교육·연구·자격 인증·인재 이동을 축으로 한 협력이다.

사진=ChatGPT

분배 갈등과 연대의 취약성

‘아시아판 EU’ 구상은 관세 충격과 수출 변동이 큰 시기에 매력적으로 보인다. 동남아시아 10개국과 한국, 중국 등 15개국이 가입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은 이미 세계 GDP의 30%, 수출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그러나 연대가 흔들리는 이유는 이해관계 부족이 아니라, 이익 배분을 어느 국가도 정치적으로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협력적 게임이론(Cooperative Game Theory)은 이 점을 설명한다. 연대가 유지되려면 어느 국가도 다른 국가의 몫을 더 선호하지 않아야 하고, 각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때보다 연대 안에서 더 큰 이익을 얻어야 한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작은 양보에도 균열이 발생한다. 특히 무역 협약은 가치사슬을 따라 이익이 불균등하게 쌓이기 때문에 조건 충족이 어렵다. 중소국은 대형국의 전략 선택에 따른 충격을 떠안을 수 있다는 불안이 크다.

투자 구조가 보여준 교육 협력의 필요성

최근 투자 흐름도 같은 문제를 드러낸다. 지난 10년 동안 서비스 분야 외국인직접투자(FDI)는 전체의 58%로 확대됐고, 절반은 역내에서 이뤄졌다. 기후 관련 그린필드 투자는 2013년 8%에서 2023년 27%로 증가했다. 이는 아시아 통합의 성장 동력이 디지털 서비스, 녹색 기술, 소프트웨어 등 무형·기술집약 분야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분야의 성과는 인재 양성, 자격 상호인정, 연구 협력을 통해서만 공정하게 나눌 수 있다.

재정 여건의 차이도 변수다. 일부 국가는 대규모 산업정책을 추진할 수 있지만, 소규모 국가는 첨단 산업을 감당하기 어렵다. 이런 격차는 무역 연대를 보조금과 보상 거래로 몰아가며, 관리가 어렵고 정치적으로 악용되기 쉽다. 반면 교육 지출, 연구개발 투자, 자격 상호인정은 규칙과 기준에 따라 투명하게 운영할 수 있다. 한국은 GDP 대비 5% 수준의 세계 최고 연구개발 투자율을 기록했고, 중국도 2024년 2.7%까지 높였다. 이 역량은 공동 박사과정, 합동 연구소, 마이크로 자격증 제도 같은 협력 기반으로 전환될 수 있다.

2023년 전 세계 특허 등록 지역별 비중(단위: %)
주: 지역-아시아, 북미, 유럽, 아프리카+중남미+카리브해+오세아니아(X축), 특허 등록 비중(Y축)

분야별로 엮이는 협력

2025년 아시아에서 주목할 변화는 거대 연합의 출범이 아니라 분야별 협력의 확대였다. 인도와 중국은 자신을 “경쟁자가 아닌 파트너”라 규정했고,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와 경제 협력 격상 의지를 밝혔다. 일본은 선거 패배 이후 대중 관계를 둘러싸고 국내 논쟁을 겪고 있다. 이는 ‘아시아판 EU’식 단일 연합과는 거리가 있지만, 안보 노선이 다르더라도 사안별 협력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교육은 가장 안정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영역이다.

교육 협력의 차별성

미국의 분할·통치 전략은 개별 국가에 혜택을 제공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관세 면제, 공급망 핵심 지점에 대한 라이선스, 특정 기술 분야의 수출 통제 완화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조치는 경쟁적이고 배타적인 이익을 만들어내며, 협상 단위가 작을수록 효과가 크다.

교육 협력은 성격이 다르다. 교사 훈련 기준, 학위 상호인정, 장학금 제도, 에듀테크 안전 규정은 공동의 이익을 기반으로 하고 적용 범위가 넓다. 일단 시행되면 학생, 대학, 기업이 동시에 얽혀 있어 철회할 경우 사회·경제적 비용이 많이 든다. 예를 들어 동일한 마이크로 자격 체계를 여러 도시가 함께 인정하면, 이를 무효화하는 순간 학습 경로와 채용 과정 전체가 흔들린다. 교육 협력은 배타적 혜택을 분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분할·통치 전략이 작동하기 힘든 영역이다.

지식재산이 만든 지속성

협력이 항상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인도와 중국의 국경 갈등은 여전히 이어지고, 안보 동맹도 분열돼 있다. 그럼에도 교육 분야의 최소 공통프로그램은 추진이 가능하다. 학습자와 기관 모두가 혜택을 받고, 학생 배치·연구 성과·자격 이동성 같은 지표로 성과를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긴장이 높아져도 대학은 교육을 이어가고, 학생은 학업을 계속하며, 연구는 지속된다. 교육 협약은 이런 지속성을 기반으로 한다.

지식재산 흐름도 교육 협력의 타당성을 강화한다. 2023년 아시아는 국제 특허출원(PCT)의 56%, 세계 특허 등록의 70%를 처리했다. 이 지식재산 축적은 아시아 연대가 활용해야 할 핵심 자산이며, 교육은 이를 조율하는 중요한 장치다.

2023년 전 세계 PCT(특허협력조약) 국제출원 지역별 비중(단위: %)
주: 아시아(56%), 유럽(22%), 북미(21%), 오세아니아(1%) 중남미 및 카리브해(0%), 아프리카(0%), 기타(0%)

교육 중심 협약의 설계

‘아시아 교육·연구 이동 협약(ECAMR)’은 무역 중심 연대의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한 구상이다. 핵심은 학습자, 연구, 자격을 중심에 두고 기여를 투명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자격 상호인정이 첫 단계다. 아세안은 이미 공학, 건축, 간호 등에서 협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유네스코의 ‘세계 고등교육 자격 상호인정 협약’도 확대돼 한국과 몽골이 가입했다. 대학 학위, 직업교육훈련, 마이크로 자격을 통합하는 ‘자격 여권’을 마련하면, 외교적 긴장 속에서도 협력을 지지하는 기반이 형성된다. 연구와 인재 교류 기금은 국경 간 학생 수, 공동 논문, 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율 같은 지표를 조합해 배분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계산의 정교함보다 각국이 기여가 인정된다고 받아들이는 정치적 수용성이다.

투자 흐름과 연계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신규 투자에 일정 비율의 교육 기금을 배정해 현지 인력 양성과 연구에 활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특정 국가에 반도체 시설이 건설되면, 투자금 일부를 교육과 연구 인프라에 사용하고, 자격은 투자국과 수혜국 모두에서 인정하는 구조다. 에듀테크 분야에서는 데이터 보호, 알고리즘 투명성, 학습 기록 이식성 같은 공동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역내 시장 통합과 지식재산 활용을 동시에 뒷받침한다.

인력 이동은 전면적 자유 이동 대신 분야별 프로그램으로 추진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해양공학, 노인 요양, 재생에너지 등 국가별 수요와 강점에 맞춘 협력이 가능하다. 기업이 공동 자금을 지원하고 교육과정을 연계하면 효과를 높일 수 있다.

교육이 이끄는 지속 가능한 연대

아시아의 협상력은 지식과 인적 자본에 기반한다. 무역 연합은 경쟁적 시장 접근권이라는 취약한 카드와 불균등한 이익 배분이라는 정치적 난제를 안게 된다. 반면 교육 중심 협약은 공공재를 키우고, 이를 사람과 기관에 고정하며, 투명한 규칙으로 배분해 중소국도 안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아시아 질서는 단일체가 아니라 겹치고 분화된 구조로 나타나고 있다. 이 속에서 교육은 가장 먼저, 가장 멀리 나아갈 수 있는 분야다. 앞으로의 과제는 자격 상호인정을 제도화하고, 역내 투자에서 일정 부분을 인재 개발에 배정하며, 공동 기금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외부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아시아의 지식 기반을 공동의 힘으로 전환하는 연대 설계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An Asian “EU”? Why Education, Not Tariffs, Is the Coalition Glue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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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러 동맹 속 높아진 북한 위상, ‘신냉전 구도’ 속 한국·일본은 외교 난제 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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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꼭 알아야 할 소식을 전합니다. 빠르게 전하되, 그 전에 천천히 읽겠습니다. 핵심만을 파고들되, 그 전에 넓게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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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동맹 내 북한 위상 부각
10년 사이 없어진 ‘회색 지대’
경제·군사 블록 강화 움직임 커져
3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가운데)이 자국 승전 80주년 열병식 참석을 위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사진=중국 국무원

중국과 북한, 러시아가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한자리에 모여 군사 동맹을 과시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으로부터 특급 대우를 받으며 북한의 위상이 ‘군사적 전초기지’로 부상했음을 드러냈다. 이는 불과 10년 전 방중 당시의 주변적 위치와 극명히 대비되면서 ‘신냉전 시대’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

전략적 동맹 성격 강화

4일(현지시각) 인도 매체 유라시안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최근 외교계에선 중국과 러시아, 북한이 그간 구축해 온 공동전선을 한층 강화하는 단계에 돌입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러시아와 북한은 지난 6월 상호방위 조약을 맺고 상호 군사 지원을 약속했으며, 중국과 러시아는 에너지 무역을 기반으로 협력을 강화해 왔다. 여기에 세 나라 정상의 연이은 회동은 정치·안보 분야에서 사실상 준(準)동맹 관계를 제도화하는 흐름으로 해석된다.

지난 3일 베이징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중국 승전 80주년 열병식은 이러한 결속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나란히 행진하는 모습은 북·중·러 삼국이 단순한 이해관계를 넘어 공동의 전략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드러냈다. 외신들은 이 장면을 “새로운 군사 블록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표현하며 앞다퉈 보도했다.

이 같은 결속은 미국·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대응 구도와 맞물리며 새로운 구도를 형성한다. 국제전략연구소(IISS) 분석에 의하면 NATO는 항공모함과 전투기 등 첨단 공군 전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중·러·북은 병력 규모와 핵무기 보유량에서 앞선다. 잠수함 전력은 양측이 비슷한 수준이다. 미국 국방부 역시 일찌감치 “중국의 조선 능력이 미국의 200배에 달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내놨고, 이후 태평양 중심 전략과 군비 증강을 가속한 바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북한이 북·중·러 삼각 축에서 ‘사회주의 혁명 동지’로 불리며 최우선 순위의 전략적 동맹으로 자리매김했단 사실이다. 중국과 북한은 최근 회담에서 “우리는 운명 공동체”라고 선언하며 정치·군사적 유대를 강화했고, 시 주석 역시 이번 행사에서 김 위원장을 각별히 예우하며 관계 복원 의지를 명확히 했다. 이는 러시아와의 밀착을 계기로 소원해졌던 북·중 관계가 다시 공고히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양극 체제’ 고착화 조짐

불과 10년 전만 해도 중국은 전략적으로 북한과 거리를 두면서 한국과의 협력을 병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5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전승절 70주년 행사에 참석했을 당시, 중국은 박 전 대통령을 주요 손님으로 예우하며 한중 관계 개선에 총력을 기울였다. 반면 북한은 행사에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참석하는 데 그쳤고, 의전 서열에서도 변방에 배치됐다. 이와 같은 10년 전의 ‘모호한 삼각관계’는 중국 외교 무대에서 북한의 비중이 훨씬 커지면서 커다란 변화를 맞았다.

그러는 동안 북·중·러를 제외한 국제사회에서도 블록화가 진행됐다. 미국과 NATO는 2022년 유럽·인도태평양을 연계한 전략 문서를 통해 중·러 동시 억제의 프레임을 명문화했고, 미국은 이듬해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를 기점으로 연례 정상협의, 미사일 경보정보 공유, 연합훈련 확대 등 제도화에 속도를 냈다. 일본 역시 안보문서 개정으로 ‘반격능력’ 보유를 선언했고, 이후 호주·영국·미국의 AUKUS(2021년)와 상호운용성 협력을 넓혔다. 한국 또한 공급망·반도체·배터리 등 경제안보 의제를 동맹 틀에 결합하며 군사·산업 두 축 모두에서 미·일과 정합성을 높였다.

이 같은 블록화를 두고 외교계에선 “과거의 ‘회색 지대’가 지난 10년간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급격히 줄었다”고 입을 모았다. 북·중·러 측의 상징과 메시지는 ‘내부 결속의 과시’, 한·미·일·NATO 측의 제도화는 ‘상호운용의 일상화’로 수렴했다는 진단이다. 이는 곧 양측이 군사부문에서는 물론 기술·금융·에너지로 전장을 넓히는 전면적 경쟁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한국도 외교적 전략 조율 과제 직면

이처럼 북·중·러 결속이 노골화되면서 일본은 대응책 마련에 분주해졌다. 아사히, 요미우리 등 주요 현지 언론은 미국이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본이 스스로 ‘안보 네트워크’를 확대하려는 행보를 보도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지역 안보에 중대한 관심을 갖고 정보 수집과 분석을 강화하겠다”고 밝혔고, 외무·방위 당국 역시 호주·한국·필리핀 등과의 협력 일정을 빠르게 조율하고 나섰다. 이는 북·중·러 결속을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해 미국 중심 억지력에 더해 자구책을 병행하겠다는 계산으로 풀이된다.

다만 일본의 가장 큰 고민은 미국의 태도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 우선순위’를 낮추고 자국 우선 기조를 강화하면서 아시아 내 다자안보 체제가 흔들린다는 불안감에서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미국의 관세 정책에 반발해 상하이협력기구(SOC) 정상회의에 참석한 사례, 올가을 인도에서 예정된 쿼드(Quad) 정상회의에 트럼프 대통령 불참설이 제기된 상황이 이를 뒷받침한다. 일본은 북·중·러를 견제할 서방 진영의 리더십이 미국에서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점을 가장 큰 변수로 보고 있다.

이에 그 공백을 메우려는 자구책을 하나둘 현실로 옮겨가는 모습이다. 일본은 호주와 2+2 외교·국방장관 회의를 통해 군사 협력을 과시하고, 이어 나카타니 겐 방위상이 한국 방문을 추진하며 한·일 국방장관 회담을 조율 중이다. 여기에 필리핀까지 포함해 ‘유사 상황 국가 간 협력 네트워크’를 다층적으로 연결하는 움직임 또한 전개 중이다. 북·중·러의 외교적 연대가 강화되는 흐름 속에서 일본이 주도적 움직임을 보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중국과의 관계 조율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일본 정부는 오는 10월 한국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중·일 정상회담을 모색하며 갈등 관리와 협력의 균형을 노리고 있다. 이처럼 북·중·러 결속을 견제하면서도 중국과의 완전한 대립을 피하려는 ‘투트랙 외교’ 전략은 한국 정부에도 요구되는 사항으로, 군사 블록화 흐름 속에서 동북아 외교 지형의 불안정 또한 갈수록 커지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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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파이낸셜] ‘남성성’이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

[딥파이낸셜] ‘남성성’이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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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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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 전공에 관리자로 일했고 재무, 투자, 전략, 경제 등이 관심 분야입니다. 글로벌 전문가들의 시선을 충분히 이해하고 되새김질해 그들의 글 너머에 있는 깊은 의도까지 전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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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 강하면 ‘독재’ 및 ‘긴 노동 시간’ 선호
‘전통적 여성 영역’ 기피하고 ‘도움받기’ 꺼려
‘변화 가능한 변수’ 인식이 ‘정책 효과성’ 제고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책입안자들이 노동시장과 건강, 민주주의 등을 생각하며 주로 떠올리는 단어는 임금, 세금, 제도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남성성’(masculinity)이다. 70개국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강인함이나 지배, 위험 감수 등의 전통적 가치에 끌리는 남성들은 술을 많이 마시고, 정신건강 치료를 꺼렸으며, 독재적인 지도자를 지지했고, 더 긴 시간을 일했다.

‘남성성’ 높으면 ‘독재 정권 지지율’도 높아

구체적으로 전통적 남성성 규범에 대한 수용이 1표준편차만큼 높다는 것은 독재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8%P 더 높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노동 시간이 4% 더 길며, 건강을 챙기는 행동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해당 효과는 투표 행위와 노동 시장은 물론 학교에서도 나타났다. 작년 말 아시아의 대표적 민주 국가인 한국에서 일어난 계엄령 선포와 이후의 갈등도 남성성이라는 전통적 가치가 정치적 균형을 빠르게 무너뜨릴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남성성이 무시해도 좋은 문화적 특성이 아니라 영향력을 가진 거시경제적 변수라는 것이다. 시장은 노동 공급 및 정치적 리스크 등의 지표를 통해 해당 요소의 영향을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 또 교육 시스템은 학교 활동과 친구 관계를 통해 남성성을 강화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긴 노동 시간 선호, ‘도움 청하기’는 주저

전 세계 80,000명의 남성을 대상으로 승리(winning), 감정 조절(emotional control), 폭력(violence)의 가치를 물어본 조사가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한 결론은 남성성 규범을 통해 일반적인 성역할에 대한 관념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변수들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 차원에서 보면 남성성의 가치를 인정하는 남성들일수록 긴 노동 시간을 원하고, 전통적인 ‘남성의 영역’에 몰려 있으며, 도움 청하기를 주저한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민주주의보다 군부 통치에 대한 지지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특징을 가진다.

따라서 이러한 정체성을 무시하면 정책 효과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같은 교육 훈련이라고 해도 여성성이 부각되거나 사회적 신분이 낮아 보인다고 인식하면 남성의 참여를 유도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신건강 치료가 도움을 구하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이용률이 낮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시장에서 행해지는 견급생 제도나 진로 안내 등의 프로그램에서는 신규 일자리의 기술적 측면이나 미래 지향성 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또 학교에서는 친구들 사이의 오해와 편견이 위험한 행동을 부추기고 도움을 청하는 행동을 억누른다는 사실을 보여줘 ‘약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인식을 깨 줄 필요가 있다.

1인당 국민소득과 남성성 및 일반적 성역할 관념 간 관계
주: 남성성과의 관계(좌측), 성역할 관념과의 관계(우측)

한국, ‘케이팝’ 통해 ‘부드러운 남성성’ 수출

역사적으로도 무분별한 남성성의 확산이 위험을 부른 경우가 존재한다. 양 세계대전 사이 독일에서는 규율과 경직성, 부드러움에 대한 경멸로 대표되는 남성성이 폭력과 권위주의적 정치로 이어진 바 있다. 이로 인해 서열과 위험 감수가 지배적인 정치 문화를 형성해 경제적, 사회적 부작용을 겪어야 했다.

2020년대 한국의 경우는 이보다 조금 복잡하다. 노동 시간이 줄어들고는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OECD에서 최상위권에 속하는 장시간 노동국이다. 흡연율은 2008년의 절반까지 줄어들었지만 과음과 비만 등의 건강 위험도 20대에서 40대 남성을 중심으로 사회 깊숙이 자리 잡은 문제다.

한국과 독일의 연간 1인당 노동 시간(2023년)
주: 독일(좌측), 한국(우측)

이런 상황에서 작년에 벌어진 계엄령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의 자생력과 압박을 동시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한편 문화적으로 보면 한국은 K팝 아이돌을 통해 부드러운 남성성을 수출하면서 남성의 위상이 신체적인 힘에만 관련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하기도 했다. 결국 남성성은 다면적이며 변화가 가능한 동시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남성성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는 청소년기 교육을 통해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그것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감추려는 것이든, 특정 분야를 거부하는 것이든, 냉정함을 힘과 동일시하는 것이든 정체성에 대한 집착이 선택을 왜곡할 수 있음을 알게 해줄 필요가 있다.

남성성, ‘정책 변수’로 인식해야

도움을 청하는 행동이 본인의 위상을 해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려줘야 한다. 상담이나 개인 교습을 받고 진로를 바꾸는 모든 행위도 규율과 신뢰성을 높이는 행동으로 보여져야 한다. 노동시장에서 여성적이라고 인식되는 직업 영역에 대한 인식도 직업 수행에 요구되는 기술, 정확성, 팀워크를 강조해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한편 남성성은 경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위험 감수와 자유를 제한하는 정치 체제를 지지하는 성향은 ‘대박 아니면 쪽박’ 식의 투자 분위기를 조성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투자자들은 남성성을 투자 위험 회피의 변수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해당 지표가 높은 지역에서는 안정적이고 리스크가 제한된 투자 포트폴리오에 집중하고, 낮은 상황에서는 인적자원 요소가 강한 서비스 산업까지 투자 대상을 확대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남성성을 불편의 기정사실이 아닌 정책 변수로 인식함으로써 정부와 교육 당국은 안정적인 노동시장과 효과적인 교육 현장을 만드는 것은 물론, 독재적인 지도자 앞에서 취약성을 드러내지 않는 민주주의 제도를 구축할 수 있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The Political Economy of Masculinity Norms: Why Identity Still Moves Markets and Classrooms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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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 전공에 관리자로 일했고 재무, 투자, 전략, 경제 등이 관심 분야입니다. 글로벌 전문가들의 시선을 충분히 이해하고 되새김질해 그들의 글 너머에 있는 깊은 의도까지 전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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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체자 학비 혜택 안 된다”
연방 법무부 잇단 소송 제기
텍사스·켄터키주 등 규정 타깃

대대적인 ‘이민자 단속’을 시행 중인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불법체류 대학생에 대한 일부 주(州)의 학비 지원 정책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트럼프 행정부가 해당 주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불법체류 학생들에 대한 학비 지원은 잇따라 철회되고 있다.

22개州·워싱턴DC, 서류 미비 학생 학비 지원 지속

4일(이하 현지시각) 뉴욕타임스(NYT)는 “일부 주에서 최근 불법체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자금 지원 프로그램을 종료했다”면서 “법무부가 불법 이민자에게 주 내 수업료를 제공하는 몇몇 주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며, 이 조치가 미국 시민을 차별한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22개 주와 워싱턴 D.C.(컬럼비아특별구)는 서류 미비 학생들에게 주 내 학비를 제공해 왔다. 미국 대학 지도자들의 초당파 단체인 ‘고등교육 및 이민에 관한 대통령 연합’에 따르면, 현재 미국 대학에 등록한 서류 미비 학생은 약 51만 명으로 전체 고등교육기관 재학생의 2.4%에 해당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민 단속의 일환으로 지난 6월부터 불법 체류 대학생의 학비를 지원해 온 주 정부를 상대로 해당 정책 폐지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왔다. 미 법무부는 텍사스 주를 시작으로 켄터키주, 미네소타주 오클라호마주 등의 불법 체류 대학생 지원 정책에 이의를 제기했다. 지난 2일에는 일리노이주가 불법 체류 이민자들에게 주 내 학비와 장학금을 제공한 것과 관련해 소송을 제기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러한 정책이 “동일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타 주 출신 미국 시민을 차별한다는 입장이다. 일반적으로 주립대는 주내 거주자 출신 재학생 학비가 타주 출신 재학생 학비보다 훨씬 저렴하다. 뉴욕과 뉴저지 등 미국 내 최소 21개 주는 주내 고등학교를 일정 기간 이상 다니고 졸업한 학생이 같은 주에 있는 주립대에 진학할 경우 이민 신분에 관계없이 거주민 학비를 적용해 주는 이른바 '드림액트'를 주법으로 채택하고 있다.

행정부 제동에 각 주들 학비 지원 폐지 나서

이에 트럼프 행정부는 타주 출신의 미 시민권자는 비거주민으로 분류돼 비싼 대학 학비를 내야하는 반면, 불법체류 신분 학생에게는 저렴한 거주민 학비 혜택을 부여하는 정책은 차별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앞서 팸 본디 법무부 장관은 성명을 통해 “연방법에 따르면 학교는 미국 시민에게 제공하지 않는 혜택을 불법 체류 외국인에게 제공할 수 없다”면서 “미국 시민이 2등 시민처럼 대우받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교육부는 지난 7월 DACA(추방유예) 프로그램 대상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한 다섯 개 대학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교육부는 일부 교육 프로그램에 등록한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보조금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연방 정부가 내세우는 근거는 1996년 제정된 연방법으로, “서류미비자는 미국 시민보다 더 유리한 조건으로 공공 교육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간 캘리포니아를 포함해 여러 주는 “이 제도는 체류 자격이 아니라 출신 고등학교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을 내세워 소송에 맞서 왔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은 2010년 '불법체류자 자녀 학비혜택법(AB540)'의 합법성을 인정했으며, 연방 대법원도 2011년 이 사건 상고를 기각해 제도의 근거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강력하게 제동을 걸자 각 주는 한발 물러서며 잇따라 불법 체류 대학생 지원을 중단하고 있다. 플로리다주 의회는 서류 미비 이민자에게 주 내 학자금을 제공하는 정책을 폐지했으며, 텍사스주도 지난 6월 법원이 해당 프로그램을 불법으로 판결하자 거주민 학비 적용을 종료했다. 최근 오클라호마주에서는 판사가 불법체류 학생에게 학자금을 지원하도록 허용한 주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앞으로도 드림액트 폐지를 위해 더 많은 주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드림액트를 주법으로 채택하고 있는 뉴욕과 뉴저지도 타깃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버드, 불법체류 학생 및 추방유예 대상자에 재정 지원

불법체류자에 대한 학비 지원은 트럼프 행정부가 하버드대학교와 분쟁을 벌이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기도 하다. 실제 하버드는 미국 내 불법 체류자는 물론 DACA 대상자들에게도 입학과 재정 지원 기회를 동일하게 제공하고 있다. 하버드 입학 및 재정지원사무소는 “시민권 여부에 관계없이 재정지원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식 입장을 명확히 밝힌 바 있으며, 해당 학생들은 연방 학자금 지원 신청서(FAFSA)를 제출할 필요 없이 학교 자체 재원을 기반으로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하버드는 단순 재정 지원에 그치지 않고, 불법 체류 신분 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 체계도 갖추고 있다. 법적 조언 및 학생 지원 네트워크 제공은 물론, 하버드 불법체류 대학원생 연대 조직(HUGC·Harvard UndocuGraduate Collective)과 같은 대학원 중심 조직을 운영하는 등 심리적·공동체적 지지 기반도 마련하고 있다. 이 같은 하버드의 정책은 ‘니드 블라인드 어드미션(need-blind admissions, 수업료 지불 능력과 무관하게 성적만으로 선발)’ 원칙을 실현하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이는 학업 능력과 필요 기반의 재정 지원이 시민권, 체류 신분과 무관하게 제공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인권·교육 정책으로 평가된다.

이들 조직은 학문적 성취와 연구 활동에 있어 신분 문제로 인한 불이익이 최소화되도록 공동의 목소리를 내고, 연방·주 정책 변화에 따른 대응 전략을 모색한다. 또한 장학금 및 재정 지원 접근성 확대, 학내 안전망 강화 등을 주요 의제로 삼으며, 불법체류 학생들의 권리 옹호를 위한 정책적 압박 활동에도 나서고 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기조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불법 체류 신분을 가진 학생에게 재정적 혜택이 돌아가는 것은 합법적 체류와 시민권 기반의 원칙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행정부는 이를 국가 정책에 반하는 사례로 규정한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하버드가 독자적으로 마련한 재정 지원이 사실상 ‘불법 체류 권장 신호’로 작용한다고 지적하며, 연방 자원의 간접적 전용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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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반도체 중국 공장 겨냥한 美 상무부 “기술 유출 차단” 명분 뒤 진짜 속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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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장비 반입 금지 조치 강화
중국·동맹국 기업 동시 압박 의도
中 기술 개발 촉진 가능성 확대
삼성전자 중국 시안 공장/사진=삼성전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에 대한 첨단 장비 반입을 제한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에 직격탄을 날렸다. 업계에선 이번 조치를 두고 겉으로 기술 유출 차단을 내세웠지만, 기업을 압박해 수익을 환수하려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동시에 이러한 규제가 중국 반도체 산업의 자립을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점치는 상황이다. 결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기술 고도화 지연과 생산 차질이라는 이중 압박 속에서 중국의 추격까지 더해진 복잡한 대응 과제를 떠안게 됐다.

반도체 경쟁력·패권 전략 내포

4일(이하 현지시각) 대만 IT전문매체 디지타임스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미국 상무부 산업보안국(BIS)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인텔의 ‘중국 공장에 대한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지위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이번 조치에 따라 이들 기업은 오는 12월 31일부터 중국으로 반도체 제조 장비를 반입할 때마다 개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 매체는 이 같은 미 정부의 조치를 “단순한 반도체 수출 통제 강화를 넘어, 희토류 협상에서 중국에 대한 지렛대 확보를 노린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VEU는 미국 정부가 특정 기업에 부여하는 특례로, 사전 승인 없이 반도체 장비를 중국 공장에 반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2022년 미국이 대중 반도체 장비 제재를 시작한 이후에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 지위를 인정받아 첨단 장비를 제외한 장비를 중국 내 메모리 생산라인에 반입해 왔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한국 기업들의 지위는 박탈됐고, 반면 대만 TSMC와 대부분의 미국 기업만 특례 혜택을 누리게 됐다.

이에 한국 기업들의 중국 내 생산 기반은 직접적인 영향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개별 허가제 전환과 장비 업그레이드 불허가 겹치면 중국 팹의 공정 고도화가 막히고, 종국엔 저사양 제품 중심의 비핵심 기지로 밀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분석이다. 현재 삼성전자 시안 공장은 삼성 전체 낸드 생산량의 42%를 담당하고 있으며, SK하이닉스 우시 공장은 회사 전체 D램 생산능력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에 우리 정부 또한 “중국 공장의 원활한 운영이 글로벌 공급망 안정에 필수”라며 영향 최소화 협의 방침을 밝혔다.

한편, 미국의 지렛대 전략에 대한 해석은 희토류를 둘러싼 미·중 간 힘겨루기가 갈수록 거세지는 가운데 나왔다. 현재 중국은 희토류 채굴의 약 70%, 가공의 약 85%를 점유하며 전 세계 희토류 공급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와이오밍주 브룩 광산 개발 등 다수의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지만, 성과는 미미한 실정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중국이 희토류 수출 규제를 통해 압박의 수위를 높이면서 미국 입장에선 ‘맞대응 카드’가 필요했단 지적이다. 결과적으로 한국 기업들은 양국 사이에서 장비 반입 지연·공정 고도화 제한·원재료 조달 불안정이라는 삼중 리스크에 노출된 셈이다.

엔비디아 사례로 보는 수익 환수 요구 가능성

미국은 이에 앞선 지난달 중순에도 엔비디아와 AMD의 중국향 반도체 수출을 허용하는 조치로 이목을 끈 바 있다. 엔비디아 H20와 AMD MI308 등 일부 인공지능(AI) 칩 모델이 그 대상으로, 미국 정부는 이들 반도체 판매 수익의 15%를 거둔다는 조건으로 수출을 허용했다. 이는 특정 수출품에 대해 사실상의 ‘세금’을 부과한 전례 없는 조치로, 미 정부가 기술 규제를 통해 직접적인 재정 수익을 챙기는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적잖은 파장을 낳았다.

이를 두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관세를 피하려면 자국에 투자하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이 한 단계 더 진화한 형태”라고 정의했다. 미국이 안보 논리를 빌려 실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압박에 나섰단 평가다. 실제 올해 엔비디아의 중국향 수출 규모는 약 150억 달러(약 21조원)에 달할 전망이며, 이 경우 최소 20억 달러(약 2조7,000억원) 이상이 미 정부의 몫으로 돌아간다. AMD 역시 연말까지 8억 달러(약 1조1,000억원) 규모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추산돼 양사 합산 23억 달러(약 3조원) 이상이 미국 재정으로 흡수될 예정이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매출 환수 모델’이 엔비디아와 AMD에만 국한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미국이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 제한을 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에 압박을 본격화한 만큼, 앞선 사례와 유사한 형태로 ‘중국 시장에서 발생한 매출의 일정 부분을 납부하라’는 요구가 더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글로벌 낸드플래시와 D램 생산의 핵심 기지로 꼽히는 삼성 시안과 SK 우시 공장은 이 같은 전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에 제격이라는 평가다.

점유율 확대 노리는 中 반도체 산업엔 기회

이와 함께 업계에서는 미국 정부의 이번 조치가 역설적으로 중국의 기술 자립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 또한 나온다. 한국 기업의 중국 내 투자 확대와 기술 업그레이드는 제약이 불가피하지만, 그 공백을 메우려는 중국 현지 기업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질 것이란 설명이다. 이러한 상황은 단기적으로 한국 기업과 중국 공장을 모두 위축시키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 반도체 산업에 성장 기회로 작용한다.

과거에도 중국은 미국의 제재 국면에서 보조금과 내수 중심 정책을 통해 빠르게 대응한 전례가 있다. 2019년 화웨이는 미국의 거래 제한 명단에 오르며 매출 급락을 겪었지만, 자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 속에 자체 5G 스마트폰을 출시하며 시장 복귀에 성공했다. 화웨이 외에도 캠브리콘을 비롯한 다수의 중국 AI 반도체 설계사가 현지 고객 수요를 확보하며 성장세를 보였으며, 이는 외부 압박이 기술 발전을 자극한 전형으로 평가된다.

다국적 투자은 BBVA 역시 미국 정부의 제재 강화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양분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BBVA는 보고서를 통해 “통상 중국 메모리 기업들은 수익성보다 점유율 확대를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짚으며 “(이번 조치로) 삼성과 SK가 중국 내에서 제약을 받는 사이 현지 수요를 대체하며 빠르게 점유율을 확대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낸드플래시와 D램뿐 아니라 고대역폭메모리(HBM) 같은 첨단 분야에서도 중국의 자급 노력이 빨라지고 있어, 한국 기업은 기술 고도화 지연과 시장 잠식이라는 이중 압박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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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 빠졌나" 내리막길 걷는 피그마 주가, IPO 준비하던 기술주들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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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 직후 '반짝' 뛰었던 피그마 주가, 줄곧 하향곡선
"대기업 경쟁사에 비해 프리미엄 엄청나" 월가의 지적
'제2의 피그마' 노리던 스타트업들, 상장 행보 멈춰설까

미국 디자인 소프트웨어 기업 피그마의 주가가 급락했다. 2분기 실적 발표 이후 과도한 기대를 품었던 투자자들이 줄줄이 이탈, 시장에 물량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월가에서도 피그마의 주가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속속 제기되고 있다.

피그마, 2분기 실적 발표 후 급락

3일(이하 현지시간) 피그마는 장 마감 후 지난 2분기에 2억4,960만 달러(약 3,48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41% 증가한 수준이다. 같은 기간 주당순이익(EPS)도 -4.39달러(약 6,100원)에서 0.04달러(약 55원)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전반적으로 기대치에 부합하거나 살짝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거둔 것이다. 글로벌 증권가의 2분기 컨센서스(추정치 평균)는 매출 2억5,000만 달러(약 3,477억2,500만원), 주당 순이익 0.09달러(약 125원)였다. 회사가 실적과 함께 공개한 3분기 매출 전망치(2억6,300~2억6,500만 달러)도 월가 예상(2억6,200만 달러)와 유사했다.

시장은 기대치를 뛰어넘지 못한 실적에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이날 애프터마켓에서 피그마 주가는 14.22% 급락했다. 실적에 대한 실망에 더해 4일부터 일부 임직원들이 보유한 주식 중 25%의 보호예수가 풀린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투자자가 대거 이탈한 것이다. 이에 따라 피그마의 주가 반등 가능성은 한층 희미해졌다. 상장 첫날(7월 31일) 개장가에서 250% 급등한 피그마 주가는 지난달 1일 고점(122달러)에서 약 한 달 만에 41% 하락한 상태다. 3일 애프터마켓 가격을 고려하면 하락 폭은 52.10%까지 확대된다.

피그마의 상장 이후 주가 추이/출처=구글 파이낸스

월가서도 부정적 전망 속출

시장의 전망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브레드 실즈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애널리스트는 "피그마는 대기업 경쟁사에 비해 엄청난 프리미엄에 거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때 피그마 인수를 추진했던 경쟁사 어도비는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배율(PER)이 17배에 불과한 반면, 피그마의 PER은 200배에 육박한다.

아울러 실즈 애널리스트는 향후 경쟁 심화로 인해 피그마의 시장 점유율이 잠식되거나 사업이 교란될 수 있으며, 인공지능(AI)의 발전이 피그마 매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피그마는 디자이너들이 웹에서 협업해 UI/UX를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클라우드 기반 디자인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실시간 공동 작업 기능 덕분에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원격 근무 환경에서 빠르게 점유율을 확대해 왔다. 하지만 AI 기술 발전 이후 디자이너들의 피그마 이용 수요가 줄어 핵심 경쟁력을 잃을 위기에 빠진 상태다. 

결국 피그마가 AI를 자사의 제품에 어떻게 활용할지가 관건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웰스파고의 마이클 터린 애널리스트는 "피그마가 AI 도입 흐름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가 회사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며 "아이디어 구상과 디자인, 코드 작성까지 한 번에 이어지는 올인원 플랫폼이 될 수도 있지만, AI 자동화로 디자이너 수요 자체가 줄어들어 피그마의 인원수 기준 구독 모델이 흔들릴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실속 없는 기술주는 살아남지 못한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피그마 외에도 최근 상장한 기술 기업들의 주가가 줄줄이 미끄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AI 클라우드 인프라 기업 코어위브의 경우 상장 초기였던 올해 6월 시장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후 주가가 하락하면서 고점 대비 수익률이 축소된 상태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서클의 주가도 마찬가지 흐름을 보였다. 서클은 6월 뉴욕증시 상장 후 첫 거래일에 168% 급등했고, 시가총액도 600억 달러(약 86조4,000억원)를 돌파했다. 그러나 현재 주가는 최고점 대비 절반 가까이 하락한 상태다.

기술주들이 나란히 증시에서 힘을 잃은 가운데, 후속 상장을 노리고 있던 스타트업들은 일제히 '비상'이 걸렸다. 피그마 상장 직후 다수의 스타트업은 '제2의 피그마'를 꿈꾸며 상장 시점 조율에 박차를 가해 왔다. 지난 8월 초 의료 기술 스타트업 하트플로우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S-1 문서를 제출하며 상장 준비를 공식화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호주 그래픽 툴 플랫폼 캔바 역시 같은 달 일부 투자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중장기적 상장 계획을 공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스트라이프, 미드저니, 앤듀릴, 레볼루트, 모티브 등이 후속 IPO 가능성이 높은 기업으로 꼽혔다.

하지만 피그마를 비롯해 최근 상장한 기업들의 주가가 단기간 내 급락하며 분위기가 반전됐다. 이들 기업의 사례가 실적 기반이 약한 기술 스타트업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 탓이다. 이와 관련해 한 시장 관계자는 "탄탄한 실적을 갖추지 못한 기업이 무작정 상장을 감행하면 주가는 큰 폭으로 조정될 수밖에 없다"며 "피그마의 사례는 뚜렷한 수익 모델이나 안정적인 실적을 확보하지 못해 고평가 논란에 시달리는 상당수 기술 스타트업에 있어 유의미한 경고가 될 것"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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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 소송 종결에도 증권성 불씨” 리플(XRP) vs SWIFT, 송금 패권 경쟁 재점화하나

“SEC 소송 종결에도 증권성 불씨” 리플(XRP) vs SWIFT, 송금 패권 경쟁 재점화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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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FT, 리플 주도 블록체인 통제 우려 표명
SEC 소송 종결에도 리플 증권성 논란 지속
ETF 승인 여부 둘러싼 제도권 편입 분수령

리플(XRP)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의 소송 종결을 발판 삼아 글로벌 결제망의 주류 진입을 서두르고 있지만, 증권성 논란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등 기존 금융 인프라와의 긴장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법원은 XRP 자체를 증권으로 보진 않았으나, 기관 투자자 대상 판매는 미등록 증권 판매 행위라는 판례를 남겨 규제 논란의 불씨를 지웠다고 보긴 어렵다. 이런 상황 속 오는 10월로 예정된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심사는 리플에 있어 제도권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비증권성 주장을 흔들 수 있는 리스크로 분석된다. 이에 업계에서는 이번 심사 승인 결과에 따라 리플이 핵심 인프라로 도약할지, 변방으로 쫓겨날지 여부가 갈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SWIFT, 리플 저격 "소송 버텼다고 회복력 있는 것 아니다"

4일(이하 현지시간) 암호화폐 전문 매체 코인게이프에 따르면 SWIFT의 최고혁신책임자(CIO) 톰 자샤크(Tom Zschach)는 최근 소셜미디어(SNS) 게시글에서 “소송을 버텼다고 해서 회복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리플을 비판하고 나섰다. 법적 생존 능력만으로는 핵심 금융 인프라로서의 요구 조건을 충족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은행들이 원하는 것은 ‘규칙 기반의 안전한 시스템’이라는 지적이다. 이어 “기관들은 경쟁사의 네트워크 위에서 운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리플의 구조를 겨냥했다. 그는 “은행들이 예치금도 아니고 규제된 화폐도 아니며 대차대조표에도 없는 XRP에 결제를 위탁할 리 없다”고 비판했다.

자샤크 CIO는 특히 리플이 주장하는 XRP 레저의 탈중앙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는 “XRP가 개방형 블록체인임을 인정하더라도, 네트워크 통제 가능성에 대한 신뢰 부족은 여전히 은행 입장에서의 리스크 요인”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리플이 네트워크에 과도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시장의 우려를 언급하면서 “진정한 컴플라이언스는 규제 당국과 협력하는 수준이 아니라 산업 전체가 합의한 기준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퍼블릭 블록체인 자체가 해답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집행력, 프라이버시, 컴플라이언스가 없다면 퍼블릭 체인은 조종석 없는 빠른 엔진일 뿐이라는 것이다. SWIFT는 이 같은 이유로 리플이 아닌 블록체인 기술만을 선택적으로 도입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거래 속도, 투명성, 프로세스 자동화 같은 블록체인 특징은 일부 흡수할 수 있지만, 암호화폐 회사를 통째로 수용할 이유는 없다는 입장이다.

美 항소법원, 기관 투자자 판매는 '미등록 증권 판매' 해당

자샤크의 이번 발언은 리플이 SEC와의 법적 공방을 끝내며 시장 신뢰 회복을 강조하는 시점에 나왔다. 지난달 8일 SEC와 리플은 제2순회항소법원에 진행 중이던 항소를 자발적으로 취하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2023년 7월 아날리사 토레스 판사가 내렸던 1심 판결이 그대로 최종 확정됐다. 당시 토레스 판사는 XRP 토큰 자체가 증권은 아니라고 판결해 시장에 안도감을 주면서도, 리플이 기관 투자자에게 XRP를 판매한 행위는 '미등록 증권 판매'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1억2,500만 달러(약 1,740억원)의 벌금을 부과한 바 있다.

이번 소송 종결의 가장 큰 배경에는 정치적 변수가 자리하고 있다. 강경 일변도의 '규제 저승사자'로 불렸던 게리 겐슬러 전 SEC 위원장이 물러나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새로 임명된 수장인 폴 앳킨스가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서 기류가 급변한 것이다. 실제로 새 SEC는 최근 몇 달간 12건 이상의 암호화폐 기업 관련 조사 및 소송을 중단하며, '소송'이 아닌 '협상'을 우선하는 기조를 명확히 하고 있다.

소송 종결에 따라 규제 불확실성이 해소되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리플의 국경 간 결제 서비스인 ODL(On-Demand Liquidity)은 거래량이 급증해 1조3,000억 달러(약 1,800조원)를 기록했고, XRP의 시가총액 급등을 이끌었다. 2023년 법원 판결 이후 시가총액은 1,800억 달러(약 250조원) 이상 급증하며, 시장에서 XRP의 가치를 다시 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XRP 현물 ETF 심사, SWIFT 반격 여지 제공

다만 이번 결과가 리플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리플은 여전히 거액의 벌금을 납부해야 하며, '기관 투자자 대상 판매'는 증권법의 규제를 받는다는 판례를 남겼다. 또한 리플은 이번 소송과 별개로 다른 법적 분쟁에도 직면해 있다. 가장 큰 변수는 리플의 현물 XRP ETF 승인 여부다. SEC는 오는 10월 중순부터 연달아 주요 자산운용사들의 XRP ETF 신청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하나의 ETF만 승인되더라도 막대한 자금 유입을 기대할 수 있으며, 여러 건이 연이어 승인된다면 더 큰 상승 모멘텀을 형성할 수 있다.

문제는 ETF가 본질적으로 증권이라는 점이다. 현물 기반 ETF는 투자자 보호, 시세조종 방지 요건을 갖춰야 상장이 가능하며, 이는 곧 기관 자금이 진입하기 위해선 ‘증권 포맷’이라는 통로를 거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간 리플은 XRP를 증권이 아닌 결제·유틸리티용 토큰으로 규정하며 제도권 편입을 모색해 왔다. 하지만 기관 자금 유입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ETF라는 증권형 상품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기존 은행권의 반발이 불가피하다. XRP의 현물 ETF가 승인될 경우, 기관 참여의 길이 열리지만 동시에 'ETF는 증권, XRP 현물은 비증권'이라는 역설이 발행하기 때문이다.

이는 리플이 그간 강조해 온 비증권성 논리와 충돌할 수 있는 잠재적 모순으로, 은행권은 물론 SWIFT가 반격할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한다. ETF를 통해 제도권 자금이 흡수되면 리플은 글로벌 결제 네트워크로 급부상할 수 있으나, 그 자체로 증권성을 자인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이번 ETF 승인 여부가 리플의 법적 성격을 결정짓는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승인 여부와 그에 따른 해석에 따라 리플이 제도권으로 완전히 진입할 수 있을지, 아니면 변방 자산으로 밀려날지를 좌우할 것이란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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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기적' 호소하는 젤렌스키, 美 손 놓고 안전보장군과 경제 재건 도모해야

'한국식 기적' 호소하는 젤렌스키, 美 손 놓고 안전보장군과 경제 재건 도모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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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우크라이나 안전보장군에서 '후방'으로 빠져
美 지원 원하는 젤렌스키, 상황 뒤집힐 가능성은 낮다?
유럽 안전보장군 이용해 '동두천식 경제 회복' 도모해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한국의 발전 사례를 들며 우크라이나에도 미국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놨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안전보장군에서 사실상 '후방 지원' 역할을 맡은 가운데, 보다 적극적인 안보 보장 필요성을 호소한 것이다.

젤렌스키 "韓 시나리오 재현되길"

4일(이하 현지시간) BBC와 RBC-우크라이나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모인 '의지의 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 35개국 중 26개국 정상들은 전후 우크라이나에 육·해·공 병력을 파병하기로 약속했다. 영국,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네덜란드, 호주 등은 영국의 주도하에 우크라이나에 2만5,000~3만 명 규모의 지상군을 파병할 계획이다.

튀르키예는 해상 안보를 보장할 예정이며, 폴란드는 파병 의사를 밝히지 않는 대신 물류 거점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우크라이나 파병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독일은 이번 회의에서도 확실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국은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여러 차례 공언한 대로 후방에서 공중 안보와 정보 지원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크라이나는 이전부터 미국이 안전보장군의 전면에 서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 왔다. 지난 3일 젤렌스키 대통령은 프랑스 매체 르 푸앵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 뒤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았지만 경제 발전을 이룩한 한국의 시나리오가 우크라이나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는 “그 시나리오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날 수 있는지 묻는다면 모든 게 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라며 “한국에는 북한의 장악을 막을 강력한 동맹국인 미국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짚었다. 우크라이나에서 한국식 시나리오가 재현되기 위해서는 미국의 군사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한 것이다.

현실적인 '상황 종결' 시나리오는?

다만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의 바람대로 상황이 뒤집힐 가능성은 사실상 낮다고 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일부분 확보하고,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이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강화하는 선에서 상황이 종결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러시아 측은 꾸준히 돈바스(러시아-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인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한스크 인민공화국, 로스토프주 일대) 지역 영토를 요구해 왔다. 우크라이나가 돈바스에서 철수하면 나머지 전선을 동결하고 추가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제안이었다.

앞서 러시아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 작전을 시작하면서 도네츠크, 루한스크, 자포리자, 헤르손 등 우크라이나 동·남부 4개 지역을 점령한 바 있다. 같은 해 9월에는 이들 지역에서 러시아 영토 편입을 위한 주민 투표까지 치렀고, 이후 주민 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며 4개 지역의 합병을 발표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서방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이 같은 러시아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국제 사회의 반발에도 불구, 러시아는 좀처럼 뜻을 꺾지 않고 있다. 지난 3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인도네시아 신문 콤파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위기를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러시아의 우선 과제”라면서도 “평화를 지속 가능하게 하려면 주민 투표 이후 러시아에 편입된 지역 등 새로운 영토 현실이 국제법적 차원에서 인정되고 제도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지촌이었던 동두천 보산동의 옛 모습/사진=동두천시

미군 딛고 살아난 동두천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미군 주둔을 요구하는 대신, 파병이 확정된 국가들의 안전보장군을 경제 회복의 기틀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미군 파병을 계기로 발전한 한국의 동두천시처럼 안전보장군을 발판 삼아 지역 경제를 재건해야 한다는 진단이다.

동두천에 미 제24사단, 제3사단, 제7사단 등 미군 부대가 파병된 것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이었다. 미군은 동두천에 들어오며 시 전체 면적(95.66㎢)의 42%(40.63㎢)를 군용 부지로 제공받았다. 산지 면적이 67%에 달하는 동두천의 '노른자 땅'을 미군이 차지한 것이다. 이후 동두천은 자연스럽게 미군 맞춤형 도시가 됐다. 부대와 인접한 동두천 보산동을 중심으로 유흥가가 자리 잡았고, 동두천 제일시장은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입는 옷을 판매하며 세를 불렸다. 미군을 겨냥한 양복점도 우후죽순 늘었다.

이후 유흥과 의복 구입을 위해 동두천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며 인구 역시 증가했다. 작은 마을이었던 경기도 양주시 이담면은 1963년 동두천읍으로 승격했고, 1981년에는 지금의 동두천시가 됐다. 이후로도 2008년 미군 병력이 평택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하기 전까지 수십 년간 동두천은 미군이 돈을 쓰고, 그렇게 번 돈을 주민들이 다시 쓰는 선순환 구조에 기대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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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자유 보장 ‘연결차단권’, 노동시장 이어 금융시장까지 영향

퇴근 후 자유 보장 ‘연결차단권’, 노동시장 이어 금융시장까지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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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이어 아시아도 제도화 논의
팬데믹 이후 원격·언택트 근무 증가
국경 및 시간 초월한 업무 모델 확산

유럽을 중심으로 확산한 ‘퇴근 후 연결차단권’이 근로자의 시간 주권을 보장하는 제도로 자리 잡는 양상이다. 버전 관리 시스템과 협업 툴을 통한 비동기적 근무 환경은 제도 확산의 배경이 됐고, 많은 글로벌 기업이 이를 토대로 국경과 시간대를 넘어선 새로운 업무 모델을 구축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금융시장 또한 24시간 대응을 요구하는 글로벌 경쟁과 맞닥뜨렸고, 새로운 균형 과제를 해소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노동자엔 권리를, 기업엔 합리적 운영을

5일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최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연결차단권과 공정한 원격근무에 관한 잠재적 이니셔티브’ 2단계 협의를 진행 중이다. 이는 2021년 유럽 의회 입법 촉구에 따른 후속 절차로, 노사 등 사회적 파트너는 오는 10월 6일까지 의견을 제출해야 한다. 제도가 본격적으로 법제화된 것은 2017년 프랑스가 근로자의 연결차단권 보장을 위한 단체협약 협상을 의무화한 사례였다. 이후 스페인은 2018년 디지털권리법, 포르투갈은 2021년 원격근무법으로 각각 근무시간 외 연락 금지 조항을 도입했고, 유럽사법재판소 역시 “자택 대기 시간이 개인 생활을 심각하게 제약한다면, 근로 시간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판단해 연결차단권 법제화의 촉매가 됐다.

이 같은 제도의 작동 배경에는 협업 방식의 변화가 자리한다. IT 분야로 관찰 범위를 좁혀 보면, 소프트웨어 개발 현장에서 활용되는 깃허브(Github)는 업무를 당겨오고(pull) 내보내는(push) 코드를 통해 특정 업무의 변경 이력과 책임자를 기록한다. 야간에 수행된 작업은 기록과 검토 과정을 거쳐 다음 업무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결함이 발견되면 히스토리를 근거로 원인과 책임을 손쉽게 특정한다. 이처럼 기술적 장치가 뒷받침되면서 연결차단권은 추상적 권리가 아닌 ‘현장에서 실현 가능한 제도’로 자리 잡게 됐다.

그 결과 연결차단권이 보장하는 효과 또한 휴식권을 넘어섰다. 유럽은 2018년 ‘마착 판례’를 통해 짧은 응답 대기조차 근로시간에 포함될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해 초과근무 산정과 휴식시간 보장을 강화했고, 호주는 법률에 불합리성 판단 기준을 명시해 합리적 예외를 규정했다. 이러한 제도의 변화는 기업 입장에서 노무 리스크를 줄이는 효과로 이어진다. 인사 관리가 기록을 기반으로 운영되면서 성과 평가의 객관성이 강화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요국들의 사례는 연결차단권이 노동자의 권리 보장과 기업 운영의 합리적 기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은 이제 막 제도화 가능성을 타진하는 단계다. 2023년 3월 정부는 연결차단권 관련 태스크포스를 출범, 같은 해 7월 가이드라인 초안을 내놨다. 당시 가이드라인에는 근무시간 외 모바일 메신저를 활용한 업무지시 자제 권고와 사전 합의 요건 등이 포함됐으나, 법제화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업종과 직무별로 업무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 금지는 과도한 규제라는 반대 목소리가 거셌던 탓이다. 그러나 최근 조사에서는 직장인 82.5%가 연결차단권 도입에 찬성한다고 밝히면서 다시 제도화 논의에 불을 붙였다. 일과 가정의 양립, 사생활 보호는 거스르기 힘든 시대적 추세인 만큼 한국 역시 법제화가 머지않았다는 게 사회 전반의 평가다.

기록·전달 중심 ‘비동기 협업’이 대세

경영계에서도 연결차단권이 확산하는 환경에서 ‘즉각 대응’만으로는 효율적 운영이 어렵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야간이나 휴일에 발생할 수 있는 긴급 사태에 대비해 모든 직원을 상시 대기시키는 건 비용과 효율 측면에서 매우 뒤떨어진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따라 많은 다국적 기업이 시간대가 다른 글로벌 팀을 채용하는 ‘팔로우 더 선’ 전략을 취하는 모양새다. 실시간 호출 대신 기록과 전달 중심의 ‘비동기 협업’이 표준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협업 툴은 이러한 비동기 협업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일례로 칸반보드(Kanban Board)는 업무를 대기·진행·완료 단계로 시각화해 실시간 접속 없이도 업무 상태를 공유하게 한다. 개발 조직에서 활용되는 깃허브가 코드의 변경 이력과 책임을 남기는 방식처럼 칸반 역시 업무의 단계와 담당자를 명확히 해 교대 근무나 시차를 넘는 협업을 가능하게 한다. 이 같은 변화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가속화했으며, 비대면·원격근무 필요성에 따라 기업들은 사내 메신저, 화상회의, 프로젝트 관리, 영업 관리, 상담 플랫폼 등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를 대거 도입했다.

가장 대중적인 협업 툴로 꼽히는 슬랙(Slack)의 운영사 슬랙테크놀로지스가 2021년 한국의 100인 이상 기업 소속 근로자 1,00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는 지식 근로자의 55%가 협업 툴이 업무 능력을 향상시킨다고 답했다. 빠르고 효율적인 처리(74%), 협력 증진(74%), 원격 소통 개선(73%)이 주요 장점으로 꼽혔다. 이 같은 데이터는 협업 툴이 단순한 보조 수단을 넘어 생산성과 조직 문화를 바꾸는 주체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근로자의 64%는 팬데믹 기간에 채택된 협업 툴과 워크플로가 사무실 복귀 이후에도 유지되기를 원한다고 답했고, 직원 유지율에도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응답이 49%에 달했다. 또 근로자 41%는 재택근무 유연성이 없는 경우 다른 직장을 찾겠다고 밝혀 ‘업무 유연성’이 채용·유지의 핵심 조건이 됐음을 시사했다. 비동기 협업과 기록 중심의 업무 방식이 근무 형태의 변화를 이끄는 데 끝나지 않고 인재 확보를 위한 기업의 경쟁력으로 거듭난 셈이다.

다만 그 이면에는 한계도 존재한다. 근로자의 40%는 평균 6개 이상의 앱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하루 평균 17회 앱 전환에 약 30분을 소요한다고 답했다. 심지어 앱이 잘 통합되지 않아 오히려 업무를 복잡하게 만든다는 응답은 24%에 달했다. 외부 협업에서도 평균 3.8개의 플랫폼이 사용되며, 36%는 5개 이상을 병행한다고 답했다. 이 때문에 근로자의 58%는 외부 협업을 위한 단일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통합된 솔루션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글로벌 경쟁 사이 균형점 찾기

이 같은 맥락에서 보면, 근로자들의 업무 방식은 이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할 수 있다. 팬데믹 이후 기업들은 원격근무를 통해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운영을 정착시켰고, 클라우드 서비스 기업 드롭박스가 도입한 ‘버추얼 퍼스트(Virtual First)’ 모델처럼 기록과 시스템을 통해 시차와 국경을 넘어 협업이 유지되는 사례도 늘었다. 이를 두고 신재용 드롭박스 한국·베트남 비즈니스 매니저는 “기업은 이제 직원들이 ‘어디에서’보다 ‘어떻게’ 일하느냐에 더 주목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처럼 글로벌 기업들이 기록과 절차를 중심으로 협업을 재구성하는 흐름은 근로자의 시간 주권 보장과도 연결된다. 근무시간 이후 응답을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시차가 다른 지역으로 업무를 넘겨 서비스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이 남는 시스템은 업무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순환 근무 형태의 운영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다시 연결차단권 확산과 비동기 협업 툴 도입이라는 제도·기술적 변화와 맞물려 조직 운영의 새로운 표준으로 부상하는 형국이다.

글로벌 금융시장 또한 이 같은 변화의 영향권에 있다. 지난 1월 기준 뉴욕증권거래소(NYSE)와 나스닥의 시간 외 거래 비중은 전체 거래의 11%에 달했다. 유럽과 아시아 투자자들이 각자의 업무 시간 외 미국 증시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확대한 결과다. 현재 이들 두 거래소는 프리마켓(오전 4시~9시 30분), 정규장(오전 9시 30분~오후 4시), 애프터마켓(오후 4시~8시)으로 이어지는 하루 16시간 거래 체제를 운영 중이다.

미국은 내년 하반기부터 거래시간을 주 5일, 24시간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해외 개인투자자들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미국 외에도 영국과 아일랜드, 홍콩 등이 증시 거래시간 연장을 추진 중이며, 한국거래소도 증권사 및 유관 기관을 대상으로 관련 설문을 진행 중이다. 다만 무리한 거래시간 연장이 유동성 분산과 변동성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 또한 거세다. 이에 시장은 일괄적 개편보다는 각국의 상황과 수요에 맞춘 조율을 거쳐 새로운 거래시간 모델을 모색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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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뱅크의 험난한 'IPO 삼수', 더 높아진 문턱 넘어 성공할까

케이뱅크의 험난한 'IPO 삼수', 더 높아진 문턱 넘어 성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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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영향력을 무겁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예리한 시각과 분석력을 바탕으로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만을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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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와 내년 7월까지 IPO 완료 약속
세 번째이자 사실상 마지막 도전
IPO 발목 잡았던 고밸류 조정해야

카카오뱅크 주가 부진이 이어지면서 상장을 추진 중인 케이뱅크도 속앓이하고 있다. 지난 2021년 케이뱅크가 유상증자를 실시하던 당시 재무적투자자(FI)들과 내년 7월까지 기업공개(IPO)를 완료하겠다고 약속한 터라 사실상 이번 도전이 마지막으로 평가되지만, 케이뱅크 공모가 산정 과정에서 유일한 국내 비교군(피어그룹)인 카카오뱅크 주가가 하락을 거듭하고 있어 험난한 길이 예상된다.

카카오뱅크 주가, 케이뱅크 공모가 산정에 영향

5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카카오뱅크 주가(4일 종가 기준)는 2만3,800원으로 집계됐다. 지난 6월 24일 연중 최고가(3만7,000원)를 찍은 뒤 석 달여 만에 35% 이상 하락했다. 시장에서는 카카오뱅크 주가가 2만원대 박스권에 갇혔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 때문에 케이뱅크의 부담도 커지고 있다. 내년 7월 상장을 목표로 세 번째 IPO에 나선 만큼, 공모가 산정 과정에서 카카오뱅크 주가가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기업실사 중인 케이뱅크는 10월까지 상장 예비심사 청구서를 제출할 가능성이 높다. 예비심사 이후 공모가를 산출하는데 통상 IPO 과정에서 수요예측 및 공모가를 결정할 때 업계에서 피어그룹을 선정한다. 이 피어그룹의 주가 등을 바탕으로 IPO를 추진하는 기업의 공모가를 산정하게 된다. 인터넷전문은행인 카카오뱅크의 주가가 케이뱅크 IPO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케이뱅크는 지난해 10월에도 수요예측 부진으로 IPO를 철회한 전례가 있다. 당시 시가총액 4조원대 중반이었던 카카오뱅크보다 더 높게 책정한 기업가치(최대 5조원)와 관련해 고평가 논란이 지속됐고, 공모 물량 상당 부분이 기존 FI들의 구주매출(투자금 회수)로 채워져 신규 투자자 입장에서는 매력도가 떨어진 영향이 크다. 또 업비트에 대한 매출 의존도, 오버행(시장내 대량 매도물량 출회 우려) 문제 등도 투자자 불신 요인으로 작용했다.

케이뱅크 FI들, IPO가 유일한 탈출구

이번 도전은 세 번째로, 케이뱅크는 FI들과 맺은 계약에 따라 내년까지는 상장을 마쳐야 한다. 앞서 MBK파트너스와 베인캐피탈, MG새마을금고 등 케이뱅크의 핵심 FI들은 내년 7월까지 케이뱅크 상장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동반매각청구권(드래그얼롱)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주주 간 계약을 맺었다. 만약 케이뱅크 최대주주인 BC카드(지분율 33.72%)가 케이뱅크 지분을 제3자에게 매도할 시, FI들 또한 보유 지분을 함께 매각할 수 있는 권리다.

하지만 현행 인터넷은행법은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를 제한하기 위해 대주주의 지분율을 34%로 제한하고 있다. BC카드의 지분율이 이미 이 한도에 근접해 있어 FI들이 드래그얼롱을 행사하면 인터넷은행법이 정한 34%를 초과하고, 결국 BC카드와 FI를 합친 지분을 인수할 주체를 찾을 수 없게 된다. 한 투자은행(IB) 관계자는 "드래그얼롱은 FI에게 강력한 투자급회수(엑시트) 수단이지만, 케이뱅크의 경우 법적 제약이 발목을 잡고 있다"며 "BC카드가 법적 테두리 안에서 FI들의 지분을 추가 매입할 여지가 사실상 없어 해당 조항은 효력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드래그얼롱 조항이 사실상 무력화하면서 케이뱅크의 주요 FI들에게 IPO는 유일한 엑시트 전략이 됐다. 케이뱅크의 IPO가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FI들은 공모 과정에서 자신들이 보유한 구주를 매출하거나, 상장 후 보호예수 기간이 만료되는 시점에 시장에서 주식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

현실적인 밸류에이션 제시가 관건

다만 예비심사 청구 후 거래소 심사에만 2~3개월이 소요되는 점을 고려하면 연내 상장은 사실상 어렵다는 전망이 비등하다. 게다가 케이뱅크 상장 일정이 늦어지는 사이 국내 증시 환경도 달라졌다. 새 정부 출범 직후 상승 랠리를 이어가던 금융주는 최근 정책 불확실성에 발목 잡히며 조정을 받았다. 7월 중순 한때 1,620선을 기록했던 'KRX 300 금융' 지수는 현재 1,440선으로 10% 넘게 떨어졌고, 같은 기간 'KRX 은행' 지수 역시 12% 가량 급락했다.

반면 가상자산 시장은 열기가 이어졌다. 국세청에 따르면 올해 해외금융계좌 신고 인원과 금액은 각각 38.3%, 45.6% 늘었는데, 이는 가상자산 보유자의 신고가 급증한 영향이 컸다. 가상자산 신고 인원은 지난해 1,043명에서 올해 2,320명으로 두 배 이상 늘었고, 금액 역시 10조4,000억원에서 11조1,000억원으로 증가했다.

이 같은 흐름 속에 케이뱅크의 IPO 전략에 시선이 쏠린다. 케이뱅크에 업비트는 성장의 원동력인 동시에 리스크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케이뱅크는 업비트와의 실명계좌 제휴를 통해 수신고의 약 20%를 확보하며 핵심 성장동력으로 삼아왔다. 가상자산 투자 열풍이 불 때마다 업비트 예치금이 케이뱅크 수신으로 유입돼 예금 잔액이 급격히 늘었고, 이는 안정적인 이자 수익으로 연결됐다. 은행업 라이선스와 IT 기반을 결합한 케이뱅크가 단기간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도 업비트 파트너십이 있었다는 분석이 많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수익 구조 편중성을 드러낸다. 업비트와의 제휴가 중단되거나 축소되면 수신 기반이 흔들릴 수 있고, 가상자산 규제 강화나 시장 변동성 역시 잠재적 위험 요인으로 지적된다.

관건은 가상자산 시장 활기를 발판 삼아 케이뱅크가 얼마나 현실적인 밸류에이션을 제시할 수 있느냐다. 케이뱅크는 앞선 두 차례 IPO에서 5조원 수준의 기업가치를 고수하다 시장과의 눈높이 차이를 좁히지 못해 IPO를 철회한 바 있다. 시장에서는 이번 도전에서 수익구조 다변화와 재무 안정성 확보, 신사업 포트폴리오 확대 전략 등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보여주느냐가 성공 여부를 가를 핵심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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