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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능성 높아져
정부 역점 사업 원전, 낙폭 큰 주가 하락
앞선 기술력에도 국가 차원 신뢰도에 흠집
두산 그룹의 야심 찬 사업 재편안이 정국 혼란 탓에 좌초 위기에 직면했다. 두산 그룹은 12일 합병 논의를 위해 예정했던 임시 주주총회를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두산에너빌리티를 필두로 한 원전 업계 전반에도 먹구름이 몰려든 모습이다.
“외부환경 변화로 촉발된 시장 혼란, 대단히 송구”
두산에너빌리티는 10일 이사회를 열고 이틀 뒤 개최 예정이었던 임시 주주총회를 철회한다고 밝혔다. 박상현 두산에너빌리티 대표는 이날 홈페이지에 게재한 4차 주주 서한에서 “갑작스러운 외부 환경 변화에서 촉발된 시장 혼란으로 주가가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회사는 오는 12일로 예정된 임시 주총을 철회할 수밖에 없게 됐다”며 “대단히 송구하다는 말씀을 올린다”고 전했다.
이번 임시 주총 철회로 두산의 사업 재편안은 지난 8월에 이어 또다시 백지화될 위기에 놓였다. 두산은 올해 들어 두산에너빌리티를 사업회사와 두산밥캣 지분 46.06%를 보유한 신설 법인으로 인적 분할한 뒤, 신설 법인의 지분을 두산로보틱스에 넘기는 것을 골자로 한 사업 재편안을 추진해 왔다. 이와 관련해 주주들과 금감원의 반대에 부딪히자, 주가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약속된 주가에 주식을 매입하는 주식매수청구권, 합병 비율 수정안 등을 제시하며 양사 주주들의 반대를 무마한 바 있다. 수 차례 보완 끝에 겨우 금감원 승인을 받은 최종 재편안은 오는 12일 임시 주총에서 의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돌발 변수가 나타났고, 주가가 급락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0일 오전 10시 기준 두산에너빌리티 주가는 1만6,960원으로 회사가 제시한 주식 매수 예정가액인 2만890원보다 20%가량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주주들이 회사 측에 주식매수를 청구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결국 두산에너빌리티는 분할 합병의 실익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주가 폭락에 무색해진 찬반 논란
그간 시장에서는 두산의 사업 재편안과 관련해 의견이 분분했다. 먼저 의결권자문사인 글래스루이스, 한국ESG기준원, 한국상장회사협의회 부설 독립기구인 지배구조자문위원회 등은 찬성표를 던졌다. 회사가 제시한 분할합병 방안이 두산의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주주가치 제고에 기여하는 만큼 투자자들의 지지를 받을 근거가 충분하다는 판단이다.
반면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 등 주요 해외 기관 투자자와 아주기업경영연구소, 서스틴베스트 등 국내 의결권 자문사들은 반대했다. 두산에너빌리티 분할신설법인과 두산로보틱스 간 분할 합병 비율(1대 0.0432962)이 두산밥캣의 기업 가치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이는 소액주주를 희생시켜 지배주주가 이익을 보는 중대한 이해 상충에 해당한다는 게 반대론자들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이처럼 팽팽히 맞서던 시장 내 의견은 두산에너빌리티 주식 6.85%를 보유하고 있는 2대 주주 국민연금의 조건부 찬성 결정으로 새 국면을 맞는 듯 보였다. 9일 국민연금기금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는 두산에너빌리티와 두산로보틱스 분할 합병 승인의 건에 대해 조건부 찬성을 결정했다. 합병 반대 의사 통지 마감일 전일(10일) 기준 주가가 매수 예정가액보다 높은 경우엔 찬성 표결을 행사하고, 그 외에는 기권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는 최근 두산에너빌리티의 주가가 매수 예정가액을 상당 폭 밑도는 상황에서 나온 결정으로, 주가 하락 등 주주들의 막대한 손해가 예상된다는 시장의 판단을 반영한 ‘사실상 반대’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국가 차원 상호 신뢰 무너지며 시장 먹구름
이와 같은 주가 하락은 비단 두산에너빌리티만의 문제가 아니다. 계엄 선포 직전인 3일 2,046조원에 달하던 코스피 시장 시가총액은 9일 1,944조원으로 쪼그라들었다. 같은 기간 코스닥 시가총액도 344조원에서 315조원으로 30조원 가까이 빠졌다. 불과 6일 만에 130조원 넘는 시총이 증발한 것이다. 시장 참여자들의 불안심리가 고조되면서 외국인, 기관, 개인 가릴 것 없이 주식을 내다 판 결과다.
그중에서도 원전 관련주들은 더 큰 타격을 입었다. 현 정부의 역점 사업이 원전인 만큼 정권 유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시장 전망에도 먹구름이 몰려든 것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전날 종가 기준 두산에너빌리티 주가는 1만7,380원으로 3일(2만1,150원) 대비 20% 가까이 하락했다. 같은 기간 비에이치아이 (-27.57%), 한전기술(-27.30%), 우리기술(-25.18%) 등도 일제히 폭락했다.
이렇다 보니 업계에서는 사실상 신규 사업은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평가가 나온다. 원전 건설은 정부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탓이다. 한 원자력 업계 관계자는 “원전 사업은 경제성이나 기술력도 중요하지만, 국가 차원의 보증과 상호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짚으며 “프랑스 등 주요국과의 경쟁에서도 기술력으로 앞섰던 K-원전산업이 느닷없는 계엄으로 위기에 처했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