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력망] 트럼프 행정부, AI發 ‘에너지 셧다운’ 공포에 ‘원자로 환경영향평가 면제’ 강행
[미국 전력망] 트럼프 행정부, AI發 ‘에너지 셧다운’ 공포에 ‘원자로 환경영향평가 면제’ 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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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DOE, 안전·환경·보안 기준 비밀리에 손질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폭증 영향 노후한 인프라까지 겹쳐 정전 위험도 가시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원자로 건설의 핵심 규제인 환경영향평가(EA)를 전격 면제한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폭증하자, 환경·안전 검증이라는 제도적 안전판을 후순위로 밀어낸 채 원자로 배치를 서두르는 모습이다. 이는 24시간 상시 가동되는 AI 인프라 확대로 인해 미국 내 전력망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위기감과 사상 최고치를 기록 중인 전기요금 부담을 해소하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전력 공급 명분 앞세워 규제 철거
3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NPR에 따르면 전날 미 에너지부(DOE)는 연방관보(Federal Register, 91 FR 4550)를 통해 신규 실험용 원자로를 국가환경정책법(NEPA)의 주요 검토 대상에서 제외하는, 이른바 ‘범주형 제외(Categorical Exclusion, CX)’ 조항인 ‘B5.26’을 공식 발표했다. 에너지부는 관보에서 "이 범주에 속하는 원자로들은 수동형 안전 시스템(Passive Safety Systems) 등 사고를 원천 차단하는 설계 특징을 갖추고 있다"며 "방사성 물질 유출 위험이 극도로 낮아 별도의 환경 검토가 불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조치에 따라 신형 원자로 관련 일부 사업은 환경영향평가나 환경영향평가서(EIS) 작성 없이 신속한 추진이 가능해졌다. 에너지부에 의하면 신형 원자로의 부지 선정부터 건설, 운영, 재허가, 해체에 이르는 전 수명 주기가 범주적 제외 적용 대상에 포함된다. 다만 모든 원자로가 자동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방사성 물질 누출 위험이 현저히 낮고, 현대적 안전 기술을 적용해 안전성이 검증된 신형 원자로에 한해 에너지부가 개별 사안별로 판단할 예정이다.
이러한 행보는 지난해 5월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원자력 산업 활성화’ 행정명령에 따른 후속 조치다. 원자력 산업 관련 규제를 대폭 줄여 원자로 배치를 앞당기는 내용이 골자다. 이에 따라 에너지부는 오는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까지 최소 3기의 차세대 실험용 원자로를 가동한다는 목표 아래 인허가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고 있다.
NPR에 따르면 에너지부는 이번 발표에 앞서 원자로의 안전 및 환경 수칙도 비밀리에 수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에너지부 산하 아이다호 국립연구소(INL)의 내부 지침에서 환경 보호 의무를 규정한 문구가 ‘반드시 보호해야 한다(must)’에서 ‘실용적인 경우 고려할 수 있다(may be given)’로 후퇴한 것이다. 원자력 안전의 핵심 원칙 가운데 하나인 ‘ALARA(As Low As Reasonably Achievable)’ 개념도 지침에서 빠졌다. ALARA는 법적 한도 이하라도 가능한 한 방사선 노출을 더 낮추도록 요구하는 원칙으로, 에너지부와와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에서 수십년간 사용돼 왔다.
‘전기 먹는 하마’ 데이터센터 수요 급증
미국 정부가 이 같은 무리수를 두는 이면에는 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인 전력 수요가 자리한다. AI 모델이 고도화되면서 학습과 추론에 필요한 연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이를 감당하기 위한 전력 수급과 냉각 문제가 한계에 도달했다. 특히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 확산 이후 연산 구조가 크게 바뀌었다. 과거 대규모 학습 중심이던 연산 패턴은 서비스 운영 과정에서 상시 발생하는 추론 중심으로 이동했다. 추론은 서비스가 존재하는 한 24시간 상시 가동된다. AI가 실험적 기술 단계를 지나 상시 전력을 소비하는 산업 인프라로 전환되면서 지상 전력망이 감당하기 어려운 구조가 고착화됐다.
하지만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는 기상 조건에 따라 발전량이 널뛰는 간헐성 문제와 인버터 기반 설비의 기술적 불안정성 탓에 24시간 가동해야 하는 데이터센터의 기저 전력으로 쓰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2024년 415테라와트시(TWh)에서 2030년 945TWh로 두 배가 될 전망이다. AI의 급속한 확산으로 데이터센터 개발이 빨라지면 2030년 1,260TWh를 초과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는 세계 전력 소비의 약 4%에 해당하는 수치로, 최소 1기가와트(GW)급 원전(연간 발전량 7~8TWh) 158기가 1년 내내 완전 가동 돼야 감당할 수 있는 전력이다.
미국의 전력 사정은 이미 임계 구간에 진입했다. 지난해 말 기준 미국 내 데이터센터는 전체 전력 수요의 약 6%를 차지하고 있으며, 2030년까지 이 비율은 11%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이 같은 급속한 성장세에도 신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늦어지면서 미국 내 13개 지역 전력망 중 8곳의 잉여 발전 용량은 임계 수준 이하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러한 전력 상황은 2030년까지 미국 데이터센터의 확장을 제한할 전망이다. 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들은 "제한된 유효 예비 전력 용량은 미국 내 추가 데이터센터 개발의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고,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엄청난 양의 칩을 확보하더라도 이를 구동할 전력이 부족할까 우려된다"고 토로했다.
데이터센터 확장과 함께 전기요금 부담도 가시화되고 있다. 미국 내 평균 소매 전기요금은 지난해 9월 1KWh당 18.07센트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AI 데이터센터 확산이 국가 전력망에 가하는 압박이 실질적 비용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전력난은 사회적 갈등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데이터센터 건설로 전기요금 인상이 우려되면서 주민 반발이 거세지고 있는 데다, 이에 따라 사업이 중단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데이터센터워치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에만 20여 건의 데이터센터 건설 프로젝트가 무산됐다.

인구 절반 1억5,100만 명 ‘에너지 셧다운’ 위기
전력 공급이 수요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미 전역에 에너지 부족 사태가 촉발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가뜩이나 미 전력망은 수년 전부터 정전 위험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상태다. 노후한 전력 인프라가 점점 더 빈번해지는 폭풍과 산불에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AI 확산에 따른 데이터센터의 급격한 증가는 최근 20년간 정체 상태였던 미국의 전력 수요를 빠르게 끌어올리며 전력망에 추가적인 부담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북미전력계통신뢰도공사(NERC)는 노후한 인프라, 데이터센터가 촉발한 전력 수요 증가가 맞물리면서 미국 전력 시스템이 이른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미국 전력망 안전을 감시하는 NERC는 지난달 29일 발표한 연례 보고서를 통해 향후 10년간 미국 전역의 여름철 최고 전력 수요가 224GW가량 증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지난해 전망치보다 69%나 높은 수치로, 약 1억7,900만 가구가 새로 사용하는 전력량과 맞먹는 규모다.
NERC에 따르면 전력 부족 위험이 큰 ‘고위험 지역’에는 미 대륙 중부와 대서양 연안, 태평양 연안 북서부, 텍사스주가 포함됐다. 모두 3대 주요 전력망이 운용되고 있는 곳이다. 위험군을 ‘주의 단계’까지 넓히면 미 인구의 60%가 넘는 2억 명 이상이 정전 위협 아래 놓이게 된다. 지역별로는 13개 주에 걸친 PJM 인터커넥션(PJM Interconnection)과 미 중서부 전력계통운용기구(MISO), 사우스웨스트 파워풀(SPP), 텍사스 전기신뢰성위원회(ERCOT) 등이 가장 취약한 곳으로 꼽혔다. NERC는 MISO 지역의 경우 이르면 2028년부터 전력 부족 위험이 급격히 상승하며, 2029년부터는 다른 주요 지역으로 위기가 확산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