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 진단] 능력보다 연공서열 중요한 한국, 노동생산성도 혁신도 바닥
[생산성 진단] 능력보다 연공서열 중요한 한국, 노동생산성도 혁신도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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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화된 한국·일본 노동시장 韓 노동생산성 OECD 최하위 임금 4% 올라도 생산성은 1.7% ‘찔끔’

경직된 노동 시장이 한국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주요국들이 노동생산성 혁신을 모색하는 사이 한국은 여전히 높은 임금과 고용 안전성에 묶인 채 생산성 하락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 노동 시장을 왜곡시킨 주요인은 '호봉제 보호막'이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근속기간에 따라 임금이 3배 가까이 차이 나는 상황에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기업들이 인건비 부담을 높이고 있음에도 생산성이 동반 상승하지 않는 상황은 경쟁력 저하, 수익성 악화, 자본의 해외 이탈 등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어 우려가 커진다.
일본 연공주의에 균열, 생산성 하위권
7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최근 일본의 뿌리 깊은 연공주의에 균열이 가고 있다. 일본의 젊은 인재들이 능력과 성과를 인정받을 수 있는 외국계 기업을 선호하기 시작하면서다. 글로벌컨설팅업체 매크로밀이 최근 일본 22~25세 사회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사회초년생의 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를 선호하는 사회초년생은 34%, 성과주의 선호는 42%로 나타났다. 현 직장 근무 희망기간은 ‘정년까지(40%)’가 가장 많았지만, ‘좋은 조건의 직장이 있으면 전직하고 싶다(39.5%)’와 큰 차이는 없었다.
청년들의 인식 전환 외에 생산성 저하도 연공서열제 타파를 부추기고 있다. 일본의 노동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38개 중 29위다. 일본 생산성본부가 내놓은 국제 비교 자료를 살펴봐도, 혁신 역량을 나타내는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 달러, 약 1조3,000억원 이상 비상장 신생기업)은 올해 9월 기준 미국 700개 이상에 비해 일본은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1980년대 세계 경제를 주름잡던 일본의 혁신 능력이 낮은 노동생산성에 의해 사라진 것이다.
이에 의류 기업 유니클로, 대형 은행 미쓰이스미토모은행, 전자 기업 소니 등 호봉제에서 성과주의로 선회하는 기업이 늘고 있지만, 대다수 기업은 중장년층의 반발에 부딪혀 개혁의 속도가 더딘 상황이다. 과거에도 일본은 금융권을 중심으로 유능한 젊은 직원들에게 고임금을 지급하려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 지난 2011년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는 일본의 연공서열제가 국제 경쟁의 격화와 장기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부장인 나보다 월급이 높은 평사원이 나오는 건 괘씸하다”와 같은 반대에 부딪혀 번번히 무산됐다. 이 때문에 일본의 전통적인 중후장대 산업과 그 수많은 하청업체들은 지금도 연공서열 체계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한국 노동생산성은 꼴찌 수준, 사회적 비용 늘어날 수도
그런데 한국의 상황은 일본보다 더 심각하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의 연구에 따르면 2018년 이후 우리나라의 임금 상승률이 생산성 증가율을 앞서면서 노동생산성을 크게 낮추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2017년 사이에는 한국의 임금과 생산성이 모두 연평균 3.2%씩 늘어 균형을 맞췄지만, 2018~2023년에는 임금이 연 4.0%씩 오르는 동안 생산성은 1.7% 상승하는 데 그쳤다.
이는 주 4일제를 도입한 벨기에(12만5,000달러)·아이슬란드(14만4,000달러)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마찬가지로 주 4일제를 시범 운영 중인 프랑스(9만9,000달러)·독일(9만9,000달러)·영국(10만1,000달러)보다도 낮다. 경기 침체에 비해 가파른 임금 상승세가 노동경쟁력을 약화시켰다는 게 연구진의 분석이다. 이는 연공서열형 임금체계와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의 결과다. 한국의 연간 노동생산성은 6만5,000달러(약 9,058만원)로, OECD 38개국 중 34위다. 이는 OECD 평균(9만 7,000달러)의 67% 수준에 불과하다.
실제 한국에서 근속 1년 미만 근로자 임금 기준으로 근속 15~19년 근로자의 임금은 이들보다 3.33배 크고, 근속 30년 이상 근로자는 4.39배에 달한다. 이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유독 높다. 제조업(근속 20~30년) 기준으로 한국 임금은 1년 미만 근로자 대비 2.83배로, 심지어 임금 연공성이 강한 일본(2.55배)보다도 높다. 이외 독일(1.88배), 영국(1.5배) 등 다른 유럽 국가는 훨씬 낮은 수준이다. 사실상 한국에서는 한 번 채용하면 60세 정년까지 경영상의 중대한 이유가 없으면 해고가 거의 불가능한데, 이 같은 경향은 대기업일수록 더 뚜렷하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2년 기준 500인 이상 사업장의 평균 근속연수는 11.2년으로 5~29인 사업장(5.8년)의 두 배 수준이었다. 대기업의 고용 안정성이 훨씬 높다는 뜻이다.
연공서열제에 따른 노동 경직성은 총소요생산성(TFP·Total Factor Productivity)까지 둔화시켰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의 총요소생산성은 대체로 3% 안팎 증가율을 유지해 왔으나 2011년부터 1% 수준으로 추락했다. 전문가들은 총요소생산성은 기술 혁신 그 자체보다는 조직·제도·노동 시장의 혁신 흡수 능력에 좌우된다고 본다. 결국 한국이 지난 수십년간 IT 기술 고도화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었음에도 총요소생산성이 추락한 것은 노동개혁 지체로 영역 간 혁신 확산에 제동이 걸린 결과로 분석된다. 노동개혁 지체는 한계기업 양산을 낳고 종국에는 자본 배분의 비효율성을 높인다. 이는 생산성 높은 신생·혁신 기업으로의 자원 이동을 가로막아 ‘기술 혁신 확산 저하 → 총요소생산성 둔화’의 악순환을 낳는다.

연공서열 깨고 성과위주 직무평가 도입해야
전후 고도성장기의 산물인 일본식 연공서열 관행은 오랜 세월 일본 기업의 조직 안정성을 유지시켰고, 1970~1980년대 한국도 이를 도입해 빠르게 성장했다. 당시 인구구조상 연공급제는 정년 제도와 함께 근로자의 장기근속을 유도하고, 기업 입장에서 인적 자본 축적을 돕는 제도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저출생·고령화 흐름으로 바뀌면서 연공급제의 유용성이 낮아지고 있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만일 기업이 지금과 같은 장기 임금계약 체계를 유지한다면 경영상 위기에 처할 수 있고, 이는 세금 등 사회적 비용으로 전가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지금의 생산성과 인구증가율 구조가 지속된다면 향후 국내총생산(GDP) 대비 약 7% 정도의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한국노동연구원의 분석도 있다.
생산성 향상 없이 임금만 올라가는 사이 경직된 노동 시장이 자본의 유입보다 유출을 되레 부추기고 있는 점도 문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의 생산성 정체가 국내 투자를 위축시키고 자본을 해외로 밀어내는 핵심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KDI는 생산성이 0.1% 떨어질 때 GDP가 0.15% 감소한다고 분석했다. 제조업 생산성 부진이 청년 일자리 축소로 이어지고, 자본과 일자리가 함께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일부 산업의 반짝 회복만으로는 경제 체력을 복원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에 전문가들은 한국 노동 시장의 경직성을 깨는 일이 시급하며 임금과 고용 유연성을 함께 높이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생산성이 중시되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이 같은 임금제도는 지속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GE, IBM, 구글, 아마존 등 미국의 유수 대기업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중국의 화웨이, 샤오미, 텐센트 같은 곳도 직무급제를 도입 중이다. 유럽에선 직무급제를 기반으로 한 직능급제(직무+역량 혼합형) 또는 직무 기반 연봉제를 운영하고 있으며, 영국에서는 기업의 80%가량이 직무급제로 임금을 준다는 통계도 있다. 이렇듯 직무급제가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한국만 도태되는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