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유가보다 무서운 신뢰 위기, 산유국도 예외 없는 석유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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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공급망 불안 확산, 산유국도 재정·금융 부담 직면 OPEC 공조 약화 속 자본 분산 조짐 투자 신뢰 시험대 물가 대응 넘어 노동시장 보호·에너지 안보 강화 과제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근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긴장으로 촉발된 석유 충격은 산유국에 수익을 안기고 소비국에 부담을 지우던 과거의 양상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가 상승에도 산유국들은 수출 차질과 안보 비용 증가, 투자자 신뢰 약화라는 새로운 부담에 직면하고 있으며 공급망 불안은 재정 건전성과 자본시장 안정성까지 압박하는 양상이다. 특히 이번 충격은 에너지 가격 상승을 넘어 자본 흐름과 노동시장, 금융시장 전반으로 확산되며 산유국과 소비국 모두의 경제적 부담을 키우는 요인으로 부상했다. 이에 따라 정책 대응도 물가 관리에 머물기보다 금융시장 신뢰 유지와 노동시장 충격 완화, 에너지 안보 강화까지 아우르는 방향으로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중동 경제권 전반으로 확산
에너지 물류의 핵심 요충지인 걸프 해상 운송로에는 하루 평균 약 2,000만 배럴의 원유가 이동한다. 이는 전 세계 석유 소비의 20%, 국제 원유 교역의 25% 이상, 액화천연가스(LNG) 교역의 20%를 차지하는 규모다. 이 경로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현재 세계 원유 공급은 하루 1,100만~1,400만 배럴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글로벌 공급량의 11~14% 수준이다. 문제는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더라도 공급망 정상화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유전은 비교적 빠르게 재가동될 수 있지만 정유시설과 석유화학 설비, LNG 생산기지 복구에는 장기간이 소요될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충격은 걸프 경제권 전반의 재정과 금융시장에도 부담을 주고 있다. 이번 위기의 직접 영향권에 놓인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라크, 레바논, 이스라엘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약 4조 달러(약 6,130조원)로 중동·북아프리카(MENA) 경제의 70%, 세계 경제의 약 3%를 차지한다. 1970년대 석유 파동 당시 산유국들은 원유 가격 상승의 수혜를 누렸다. 그러나 현재는 유가 상승과 함께 수출 물량 감소, 물류비 증가, 안보 비용 확대가 동시에 관측된다. 과거에는 높은 유가가 재정 수입 확대로 이어졌지만, 지금은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산유국 역시 상당한 부담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가격 결정력에서 얻는 이익보다 공급망 불안과 투자 위축에 따른 비용이 더 빠르게 확대되는 모습이다.
산유국 공조 약화와 자본 분산 조짐
산유국 간 공조 체제 약화도 시장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아랍에미리트의 석유수출국기구(OPEC) 및 OPEC+(OPEC과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 10개국의 연대체) 탈퇴는 주요 산유국들이 더 이상 단일한 공급 조정 체계 아래 움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각국은 재정 수입 확충과 시장점유율 방어를 위해 생산 확대 유인을 안고 있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확산될 경우 공급 조절 기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변화는 금융 부문에서도 감지된다. 두바이와 아부다비는 그동안 글로벌 부유층과 패밀리오피스, 국제 투자자금을 끌어들이며 중동의 대표적인 자본 허브로 성장해 왔다. 정적인 제도 환경과 풍부한 유동성은 걸프 경제의 투자 매력을 뒷받침하는 핵심 요인이었다. 그러나 지정학적 긴장이 장기화되면서 투자자들의 자산 배분 전략에도 변화의 기류가 뚜렷하다.
현재까지 대규모 자금 유출이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신규 투자자들은 싱가포르 등 다른 금융 중심지로 투자처를 다변화하거나 투자 기준 수익률을 높이며 위험 노출을 줄이고 있다. 자본 이탈보다 투자 분산이 먼저 진행되는 양상이다. 이러한 흐름이 이어질 경우 지역 금융 경쟁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국부펀드의 투자 여력 변화가 시장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중동 국부펀드의 자산 규모는 약 4조9,000억 달러(약 7,510조원)에 달한다. 글로벌 기술 산업과 인프라, 사모펀드 시장의 주요 투자 재원이다. 그러나 산유국 정부가 재정 적자 확대와 안보 비용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국부펀드 활용을 늘리거나 차입 규모를 확대할 경우 해외 투자 여력은 줄어들 수 있다. 이는 글로벌 자본시장의 유동성과 장기 투자 기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로 평가된다.
노동시장 먼저 흔드는 에너지 충격
에너지 가격 급등의 부담은 수입국과 산유국 모두에서 노동시장 취약계층에 가장 먼저 집중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독일 노동시장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유가가 10% 상승할 경우 소득 하위 10% 계층의 임금은 2년 후 약 2% 감소하고 취업 확률은 약 4%포인트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고소득층이 받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고물가와 고금리로 실질임금 증가세가 둔화된 상황에서 교통비와 식비, 에너지 비용 상승은 저소득층의 가계 부담을 키우고 고용 안정성도 약화시킬 수 있다.

산유국 역시 노동시장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걸프 국가들의 관광과 부동산, 서비스업 성장세는 확대되고 있지만, 상당 부분이 정부 재정 지출과 국영기업 투자, 국가 주도의 신용 공급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걸프 지역의 재정승수는 1을 밑돌아 추가 재정 투입이 생산과 투자, 고용 증가로 충분히 연결되지 못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실제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 수입 감소와 지출 증가가 겹치며 대규모 재정 적자에 직면했다. 단기적으로는 국부펀드와 차입을 통해 대응할 수 있지만, 재정 부담이 장기화될 경우 공공부문 고용과 대형 개발 사업, 민간 투자 여력마저 위축시킬 우려가 크다. 이로 인해 에너지 충격이 재정 압박으로 이어지고, 다시 노동시장 둔화로 연결되는 악순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정책 신뢰와 제도 안정성 확보 과제
변화한 에너지 환경 속에서 수입국과 산유국 모두 정책 대응 방향을 재정비해야 한다. 에너지 수입국은 공급망 안정성 확보에 정책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LNG 공급선 다변화와 전력망 확충, 에너지 효율 개선 등을 통해 에너지 안보 기반을 강화하는 일이 시급하다. 취약계층 지원 역시 광범위한 연료 보조금보다 직접 지원 방식을 확대해 재정 부담을 줄이고 정책 효과를 높이는 방향이 요구된다.
산유국의 과제는 재정 운용과 산업 경쟁력 강화에 있다. 안보 환경 악화로 국방비 확대가 불가피하더라도 지출 증가가 성장 기반 확충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정책 연계성을 높여야 한다. 방위산업 육성과 기술 개발, 제조업 경쟁력 강화 등을 통해 재정 지출의 파급효과를 확대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장 신뢰 유지다. 이를 위해 국부펀드 운용 원칙과 재정 개입 기준의 투명한 제시와 함께 국영기업 부채 관리 체계의 고도화가 필수적이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지정학적 위험 자체보다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 제도적 안정성을 더욱 중요하게 평가하는 추세다.
1970년대 석유 파동이 산유국의 영향력 확대와 부의 축적으로 이어졌다면 2026년 걸프 석유 충격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유가 상승만으로 경제적 우위를 확보하기 어려워졌으며 공급망 안정성과 투자자 신뢰, 자본 유치 능력까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로 부상했다. 결국 앞으로의 에너지 위기는 에너지 정책과 노동시장, 자본시장을 하나의 경제 시스템으로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국가에 유리하게 작용할 전망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The Gulf Oil Shock Is No Longer a One-Way Transfer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