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시 연준] ‘깜빡이’ 없앤 워시 의장, ‘그린스펀 연준’과 같은 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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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워드 가이던스·점도표 축소로 시작된 연준 소통체계 재편 정책 예측 가능성 약화에 따른 국채시장 위험 프리미엄 확대 우려 그린스펀식 재량 중심 통화정책 체제로의 회귀 움직임 가속화

케빈 워시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신임 의장이 연준의 역할을 다시 정의하기 시작했다. 포워드 가이던스(기준금리 선제 안내)와 점도표 체계 재검토를 통해 미래 경제 전망 중심의 정책 운영에 제동을 걸고 물가 안정이라는 법정 책무에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경제 전망과 정책 신호보다 실제 정책 결정에 무게를 두는 앨런 그린스펀식 중앙은행 운영 철학이 다시 연준 내부로 회귀하는 모습이다.
첫 회의부터 ‘덜 말하는 연준’ 예고
21일(이하 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워시 의장이 연준을 뜯어고치려 하면서 주요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시장 변동성 확대와 차입비용 상승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워시 의장이 취임한 이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는 제롬 파월 전 의장 때와 많은 부분이 달라진 점을 알 수 있었다. 연준은 금리 결정 회의를 마친 뒤 결정된 금리를 공개하는 성명서를 내놓는다. 이번 성명서에는 132개의 단어만 담겨 직전인 지난 4월 성명서(246개 단어)에 비해 가벼워졌다. 워시 의장도 “조금 더 짧고, 조금 더 단순하며, 일부 오래된 문구를 버렸다”며 성명서 내용을 대폭 줄였다는 점을 인정했다.
시장이 주목한 부분은 정책 방향에 대해 힌트를 주는 문구인 포워드 가이던스의 삭제다. 포워드 가이던스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등장했다. 당시 연준은 기준금리를 사실상 제로 수준(연 0~0.25%)까지 낮추며 더 이상 내릴 여지가 없었다. 이에 성명서에서 포워드 가이던스를 통해 “앞으로도 금리를 낮게 유지한다”는 방향을 알려주며 금리를 낮게 형성하도록 유도했다. 투자자들은 연준이 제시하는 문구를 통해 금리를 예측했다. 그런데 앞으로는 성명서에 더 이상 이를 담지 않기로 했다.
또 연준 위원 19명이 향후 금리 수준을 전망하는 점도표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점도표는 2012년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 시절 도입됐다. 포워드 가이던스와 마찬가지로 시장에 방향타를 제시하지만, 워시 의장은 이번 회의에서 자신의 전망치를 제출하지 않았다. 결국 워시 체제하에서 연준은 향후 금리 전망을 지금과는 다르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겠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으로 읽힌다.
투자자들은 “투명성 약화가 위험 프리미엄 키워” 지적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직전까지만 해도 미국 국채시장은 사실상 연준보다 먼저 긴축을 반영했다. 이란 전쟁발 유가 충격과 인플레이션 재점화 우려가 겹치면서 30년물 국채금리는 5%선을 돌파했고, 10년물 금리도 4.5%선을 회복했다. 정책금리에 민감한 2년물 금리 역시 연준 기준금리 상단을 웃돌며 채권시장 스스로 금융여건을 조이는 양상이 나타났다. 당시 시장은 워시 체제 출범 직후 금리인하 여지가 빠르게 축소될 것으로 봤고, 시카고상업거래소(CME) 연방기금금리 선물에는 연말 금리인상 가능성까지 반영됐다.
그러나 워시 의장이 첫 FOMC에서 내놓은 신호는 기존 시장의 긴축 선반영과 다른 결을 드러냈다. 2008년 경제 불황을 예측했던 경제학자 데이비드 로젠버그는 FOMC 직후 2년물 금리가 뛰는 동안 30년물 금리가 하락한 흐름을 수익률곡선 평탄화로 짚었다. 단기물은 매파적 연준을 반영했으나 장기물은 성장 둔화와 정책실수 가능성을 가격에 반영했다는 해석이다.
채권시장의 반발은 위험 프리미엄 논리로 옮겨붙었다. 선제 안내가 약화되면 투자자는 고용보고서, 소비자물가지수(CPI),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 발표 때마다 정책 경로를 새로 계산해야 한다. 이에 JP모건자산운용의 최고투자책임자(CIO) 밥 미셸(Bob Michele)은 투명성 저하가 추측과 불확실성을 키우고 변동성과 위험 프리미엄을 높인다고 지적했고, BNP 파리바의 전략 및 경제 부문 책임자 캘빈 체(Calvin Tse) 역시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한 시장 반응이 커지면서 금리인상 위험 프리미엄과 향후 변동성 확대가 동시에 가격에 반영될 수 있다고 봤다.

경제 전망 제시에 부정적인 워시 의장, ‘조용한 연준’으로 전환
하지만 시장의 우려와 달리 워시 의장은 연준의 소통 방식 자체를 문제로 보고 있다. 연준의 체제 전환 배경에는 연준 역할에 대한 워시 의장의 평소 신념이 반영돼 있다. 워시 의장은 월가와 정책권을 모두 거친 보수 성향 금융정책 인사로 분류된다. 모건스탠리 투자은행(IB) 출신으로 인수합병(M&A) 부서에서 경력을 쌓았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경제정책 보좌관(특별보좌관)을 지냈다. 2006년 만 35세에 연준 이사로 지명돼 2011년까지 활동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연준 내부에서 위기 대응에 직접 관여한 경력은 이번 의장 선임 과정에서도 중요한 자산으로 거론됐다.
그는 대체로 ‘연준 개혁론자’에 가깝다. 그동안의 칼럼·강연·청문회 발언을 종합하면, 워시 의장은 “연준이 너무 많은 메시지를 내고, 금융안정·기후·자산가격 등 통화정책 외 영역까지 무리하게 확장됐다”고 비판해 왔다. 그가 강조하는 노선은 단순하다. ‘연준은 덜 말하고, 본연의 임무인 물가 안정과 고용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외교문제협의회(CFR)도 인사청문회 분석에서 “워시 시대의 연준은 더 좁은 임무, 더 절제된 소통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연준을 더 작고, 조용하고, 본연의 통화정책 중심으로 되돌리려는 개혁형 의장인 셈이다.
실제 워시 의장은 향후 금리 전망에 대해 연준이 자세하게 설명하는 현재 관행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포워드 가이던스와 점도표를 통해 개별 위원의 개인 전망을 내놓으면 연준이 이에 얽매여 오히려 활동 반경이 줄어들 수 있다는 의미다. 취임 직후 연준 내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통화정책 운영체계와 대차대조표, 경제전망 체계를 전면 재검토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인플레이션 변동성이 커진 환경에서 경제 전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신뢰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다.
이 같은 철학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강경한 태도와 맞물린다. 워시 의장은 취임 직후부터 '2% 물가 목표 달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했고, 이번 첫 FOMC에서도 위원회가 물가 안정에 대해 "명확하고도 만장일치의 의지"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연준 내부 전망이나 시장 기대보다 실제 물가 흐름을 정책 판단의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의미다. 그는 최근 수년간 이어진 공급망 충격과 지정학적 리스크, 에너지 가격 급등이 경제 전망의 오차를 키웠다고 보고 있다. 미래 경로를 제시하는 행위 자체보다 물가를 통제하는 결과가 중앙은행의 신뢰를 결정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깔려 있다.
워시 의장의 이 같은 구상은 그린스펀 전 의장이 구축했던 연준 운영 방식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1987년부터 2006년까지 19년 동안 연준을 이끈 그린스펀 전 의장은 1987년 블랙먼데이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2000년 닷컴버블 등 굵직한 충격을 거치는 동안 금리 경로를 제시하지 않았다. 물가와 고용, 생산성, 금융시장 흐름을 점검하며 회의마다 정책 강도를 조정했고 시장 역시 연준의 전망보다 실제 결정에 반응했다. 당시 미국 경제는 역사상 가장 긴 확장 국면 중 하나를 경험했고 실업률은 4% 안팎까지 하락했다.
그린스펀 체제의 특징은 통화정책을 예고하는 데 있지 않았다. 경제지표 변화에 맞춰 기준금리를 세밀하게 조정하는 데 역량이 집중됐다. 1990년대 들어 0.25%포인트 단위 금리 조정이 사실상 표준으로 정착한 배경에도 이런 접근법이 자리 잡고 있다. 연준은 경기 과열 신호가 감지되면 금리를 소폭 인상했고 성장세가 둔화되면 긴축 강도를 낮췄다. 금융시장 또한 연준 위원들의 전망표보다 물가와 고용지표, 생산성 통계를 먼저 해석하는 구조 아래에서 움직였다.
워시 의장이 점도표와 포워드 가이던스에 거리를 두는 이유도 같은 흐름에서 읽힌다. 연준이 제시한 전망이 시장의 기준점으로 굳어질수록 정책 결정권자의 선택지는 좁아진다. 전망이 빗나갈 경우 금융시장은 잘못된 신호를 따라 움직이게 되고, 이후 수정 과정에서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 최근 수년 동안 반복된 인플레이션 전망 수정과 금리 경로 변경 역시 워시 의장이 문제로 지적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