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 진단] '저생산의 덫'에 빠진 韓 경제, 자본은 떠나고 성장은 멈췄다
[생산성 진단] '저생산의 덫'에 빠진 韓 경제, 자본은 떠나고 성장은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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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생산성 하락에 국내 투자 줄고 GDP도 감소 금융·통신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업도 저생산 고착 생산성 제고 없는 근로시간 단축은 부담으로 작용

한국 경제가 저생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생산성 둔화가 기업의 국내 투자수익률을 떨어뜨리며 자본의 해외 유출을 자극하고, 이는 다시 성장 둔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고착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서비스업의 부진이 이어지는 데다 내수 침체와 고임금·고비용 구조가 맞물리면서 기업의 투자 여력이 빠르게 위축되고, 산업 전반의 경쟁력까지 약화되고 있다.
생산성 0.1% 하락하면 GDP 0.15% 감소
4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해외투자 증가의 거시경제적 배경과 함의' 보고서를 통해 생산성 하락이 기업과 가계의 해외 투자를 부추기고, 그만큼 국내총생산(GDP)에 미치는 충격을 키운다는 분석을 내놨다. 보고서에 따르면 국민소득(GDP에 소득수지를 더한 값) 대비 순해외투자 비중은 2000~2008년 0.7%에서 2015~2024년 4.1%로 약 6배 증가했다. 순해외투자가 늘어난 것은 국내 생산성이 하락한 영향으로, 2000년대 들어 총요소생산성(TFP)이 빠르게 둔화하면서 국내 투자수익률이 떨어졌다는 지적이다.
국내 투자수익률은 2000년대 중반부터 해외 투자수익률을 밑돌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가계는 국내 주식과 채권을 매도하는 대신 해외 자산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서학개미 열풍도 확산됐다. 기업 역시 해외 설비투자와 국경 간 인수합병(M&A)을 확대했다. 생산성 둔화가 국내 자본을 해외로 옮기게 만든 셈이다. 일본 역시 1980년대 이후 자본수익성이 하락해 국내투자와 해외투자 수익률이 역전되고 해외투자가 늘었다. 경제활력이 저하되면서 국민소득의 더 많은 부분이 해외 투자수익에 의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KDI는 국내 생산성이 0.1% 하락할 때 기업들이 해외 투자를 늘리면서 국내 자본투입을 평균 0.05% 줄이고, 이로 인해 GDP가 0.15% 감소할 것으로 분석했다. 생산성 하락 대비 국내 자본스톡(일정 시점의 고정자본량)이 1.5배 정도 감소하는 것이다. 생산성 저하가 직접적으로 GDP를 떨어뜨리고, 동시에 국내 자본 축소로 GDP를 한 번 더 끌어내리는 구조다. 이 같은 충격은 노동소득 비중이 높은 사람들에게 더 부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분석된다. 자본소득이 국내에서 감소해도 해외에서는 늘어나는 만큼 전체 규모는 줄지 않기 때문이다.
팬데믹 이후엔 서비스업 생산성 하락 심화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사태는 이러한 흐름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실제 팬데믹 이후 내수가 위축되면서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생산성 저하가 두드러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정보통신업·도소매업 등 국내 민간 서비스 산업의 1인당 노동생산성은 제조업의 39.7%에 불과하다. 2005년 이후 20년 가까이 제조업 생산성의 40% 수준에서 정체된 것이다. 양적으로는 명목 GDP의 44%, 취업자 수의 65%를 차지할 만큼 규모가 커졌지만, 질적 측면에서는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고부가가치 서비스업도 반짝 성장에 그쳤다. 팬데믹 기간 중 비대면 수요 확대, 디지털 전환 등 영향으로 생산성이 급등했지만, 2022년 이후 하락 전환했고 여전히 팬데믹 이전 추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서비스업의 성장 기여도도 팬데믹 이전인 2014~2019년 1.7%포인트에서 2020~2024년 1.1%포인트를 기록하며 0.6%포인트 하락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서비스업이 오랜 기간 제조업을 지원하는 보완적 역할에 그치면서 독립적인 수요 기반을 만들지 못한 것이 생산성 저하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금융·보험, 정보·통신 등은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임에도 내수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이 문제로 꼽힌다. 지식서비스업의 경우, 2021년 기준 총매출의 98%가 내수에 집중돼 있고, 해외 진출 경험이 있는 기업 비중도 2.2%에 불과했다. 이는 팬데믹 이후 첨단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스타트업 창업과 일자리 확충이 활발히 이뤄진 미국과 대조적인 흐름이다. 더욱이 2020년 이후 인구 감소로 국내 수요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구글·애플 등 글로벌 빅테크의 국내 시장 진입이 가속화하면서 생존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노동생산성보다 빠르게 오르는 임금 상승률
낮은 생산성에 비해 빠르게 오르는 임금도 한국 경제의 구조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2018년 이후 한국의 임금 상승률은 노동생산성 증가 속도를 크게 앞지르며 격차를 빠르게 확대하는 양상이다. 2000년부터 2017년까지는 연평균 임금 상승률과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각각 3.2%로 균형을 유지했지만, 2018년 이후부터는 임금이 연평균 4.0% 오르는 동안 노동생산성은 1.7% 증가에 그쳤다. 생산성이 받쳐주지 못한 상태에서 임금이 과도하게 오른 탓에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커졌고, 이는 투자 위축과 고용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특히 노동집약적 산업과 중소·중견기업에 직격탄이 됐다. 노동생산성이 낮은 산업일수록 인건비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8년 이후 노동집약적 기업의 총자산이익률(ROA)은 자본집약적 기업보다 더 큰 폭으로 하락했고, 중소·중견기업의 ROA 하락 폭은 1.5%포인트에 달해 대기업(0.4%포인트)의 4배 수준이었다. 대기업은 자동화·디지털 전환을 통한 생산성 개선으로 대응할 여력이 있었지만, 중소기업은 이를 감당하지 못해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됐다. 일부 업종에서는 인력 구조조정과 신규 채용 중단이 현실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생산성 향상 없이 근로시간 단축이나 임금 인상이 이어질 경우, 한국이 선진국과의 소득 격차를 좁히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디지털 전환과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성 제고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2023년 기준 한국의 취업자 1인당 GDP는 6만5,000달러(약 9,400만원)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22위에 그쳤다. 이는 주 4일제를 도입한 벨기에(12만5,000달러)와 아이슬란드(14만4,000달러)의 절반 수준이며, 프랑스(9만9,000달러)·독일(9만9,000달러)·영국(10만1,000달러) 등 주 4일제 시범 운영국에도 크게 뒤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