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집권 후 투자 유인 늘어" 美 현지 투자 확대하는 기업들, 中·동남아 '찬밥 신세'
"트럼프 집권 후 투자 유인 늘어" 美 현지 투자 확대하는 기업들, 中·동남아 '찬밥 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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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0대 그룹사 미국 생산법인 자산, 8년 사이 600% 폭증 '포스트 차이나'로 꼽히던 동남아서도 韓 기업 줄줄이 이탈 미국으로 쏠리는 글로벌 자금, 관세·세제 혜택 등이 영향 미쳐

미국이 한국 주요 대기업 집단의 최대 해외 생산 거점으로 부상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대미 투자 유인이 급격히 늘어나자, 다수의 기업이 기존 생산 기지였던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떠나 미국에 자리를 잡는 양상이다. 이 같은 대미 투자 확대 흐름은 한국 산업계를 넘어 글로벌 시장 전반에서 관측되고 있다.
韓 기업들, 줄줄이 미국행
4일 기업 데이터 연구소 CEO스코어 조사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의 해외 생산법인 자산 규모는 트럼프 1기 행정부 출범 직전인 2016년 말 209조1,608억원에서 2024년 말 490조7,083억원으로 8년 만에 281조5,475억원(134.6%) 늘었다. 이 중 미국 내 생산법인 자산은 2016년 말 21조6,957억원에서 2024년 말 157조7,263억원으로 136조306억원(627%) 폭증했다. 반면 같은 기간 이들 그룹의 중국 내 생산법인 자산은 91조7,595억원에서 116조6,073억원으로 약 27% 증가하는 데 그치며 1위 자리를 미국에 내줬다. 2016년 말 26조9,316억원으로 중국을 이어 2위를 기록했던 베트남 생산법인 역시 2024년 말 자산 규모가 52조890억원에 그쳐 3위로 내려앉았다.
2024년 말 기준 미국 생산법인의 자산 규모가 가장 큰 그룹은 삼성(43조1,685억원)이었으며, 이어 SK(40조421억원), LG(38조8,325억원), 현대자동차(28조4,154억원) 순이었다. 이들 4대 그룹의 미국 생산법인 자산 규모는 10대 그룹 전체 합산액의 95.4%(150조4,585억원)에 달했다. 2016~2024년 미국 생산법인 자산 증가액이 가장 컸던 그룹은 SK로, 배터리 합작 공장인 블루오벌SK와 SK배터리아메리카 신설에 집중적인 투자를 단행하며 약 39조6,000억원이 늘었다. 삼성은 오스틴 반도체 법인의 자산 확대와 배터리 합작사 스타플러스 에너지 투자로 37조7,000억원이 증가했다. LG와 현대자동차 역시 배터리와 전기차 생산 라인을 확대하며 미국 생산법인 자산이 확대됐다.
외면당하는 동남아 시장
시장은 한국의 주요 기업들이 중국의 '대체재'로 꼽히던 동남아를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 기업의 탈동남아 흐름은 실제 투자 철회 및 시장 철수 사례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베트남 건설 신문 바오샤이둥에 따르면 SK그룹은 7년간 베트남 대기업들에 투입했던 35억 달러(약 5조원)를 대부분 회수하고, 남은 6억5,000만 달러(약 9,320억원)의 자산만 유지 중이다. SK그룹은 빈그룹, 마산그룹, 페트롤리멕스, PV오일, 이멕스팜 등 현지 기업에 순차적으로 출자를 단행하며 베트남 재계 내 영향력을 키웠으나, 지난 8월 빈그룹 지분 전량을 매각하며 투자 기조 변화를 시사했다. 이후 지난달 SK그룹이 보유 중인 마산그룹 주식 상당수가 처분됐고, 이멕스팜 지분은 전량이 중국 기업에 넘어갔다.
롯데건설은 지난 5월 베트남 호찌민 라 프리미어(La Premier) 개발 사업과 관련해 출자했던 지분 전량을 현지 파트너사인 베트남 중견 개발 기업 푸끄엉(Phu Coung) 그룹에 매각했다. 라 프리미어는 2018년 롯데건설과 푸끄엉 그룹이 호찌민 배후 주거 지구인 탄미로이 신도시 내 1만5,848㎡ 규모 부지에 지상 25층, 2개 동 규모의 공동주택 725가구 및 상업 시설을 개발하기 위해 추진한 사업이다. 양 사는 공동 출자를 통해 시행사인 특수목적법인(SPC) ‘Hau Giang Commercial and Construction Investment Co.’를 설립했고, 롯데건설은 SPC의 지분 51%를 146억6,600만원에 취득했다. 당초 양 사는 2018년 10월 공사를 시작해 2020년 5월 준공할 계획이었으나, 사업은 지분 매각 시점까지도 전혀 진척되지 못했다.
지난 9월에는 롯데건설의 모회사인 롯데그룹도 호찌민에서 대규모 사업 철수를 진행했다. 롯데그룹은 9월 20일 호찌민시 인민위원회에 1조원 규모의 호찌민 복합단지 사업 ‘투티엠 에코스마트스티’를 인·허가 절차 지연 등으로 중단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롯데그룹은 2017년 롯데프라퍼티스호치민을 통해 호찌민시와 사업 계약을 체결하고, 자본금 2,200억원을 선투자해 해당 사업에 착수했다. 호찌민시 투티엠 지구 5만㎡ 부지에 지하 5층~지상 60층 규모로 쇼핑몰 등 상업 시설과 오피스, 호텔, 레지던스, 아파트 등으로 구성된 대형 복합 단지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인허가와 토지 사용료 협상이 8년이 지난 지난 7월에야 마무리됐고, 베트남 당국은 토지 사용료를 기존 1,000억원대에서 1조원 수준으로 늘려 요구했다. 이에 롯데그룹은 사업성이 악화한 것으로 판단해 사업을 중단하기로 했다.

트럼프 행정부, 투자 어떻게 끌어모았나
중국·동남아를 떠나 대미 투자를 확대하는 흐름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산업계에서 관측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기준 미국 내 외국인 직접투자는 총 1,020억 달러(약 144조6,300억원) 규모로 전 분기 대비 137% 급증했다. 산업별로는 제조업의 대미 투자가 가장 활발했으며, 정보와 도매업이 그 뒤를 따랐다.
대미 투자가 급증한 배경으로는 트럼프 대통령 집권 후 강화된 관세 정책이 지목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2기 행정부가 출범한 뒤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매기면서 각국에 미국 내 생산 확대를 주문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미국 현지 생산 기지 구축에 자금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 1위 업체인 대만 TSMC는 지난 3월 미국 애리조나주에 1,000억 달러(약 143조7,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공장 5곳을 추가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650억 달러(약 92조원) 수준인 미국 내 총투자액을 1,650억 달러(약 233조9,700억원)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미국의 세제 혜택 확대 기조 역시 기업들에 대미 투자 유인을 제공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3월 발효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을 통해 법인세를 인하하고, 제조업 설비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을 대폭 확대했다. 해당 법안에는 개별 세율 영구 연장, 주·지방세 공제 상한 인상, 일부 소득 공제 확대 등 기업 투자를 촉진하는 여타 내용도 다수 포함됐다.
인공지능(AI) 등 일부 기술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 지원 역시 글로벌 투자 수요를 끌어모으고 있다. 앞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제롬 파월 의장은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에서 “닷컴 시대는 아이디어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수익과 실체가 있는 기업들이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의 AI 투자 붐과 2000년대 초 닷컴 버블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오늘날 AI 기업들은 실제 수익을 내고 사업 모델이 확립된 ‘진짜 기업’이라는 평가다. 중앙은행의 핵심 인사가 직접 AI 열풍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내비치며 관련 시장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원전업계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관측된다.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는 2050년까지 원자력 발전 용량을 현재 약 100GW(기가와트)에서 300GW로 확대하는 목표를 세웠고, 지난 5월 트럼프 대통령은 2050년 목표치를 400GW까지 확대하는 내용의 원자력 산업 발전을 위한 행정명령 4건에 서명했다. 정부가 직접 원전 시장의 부활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블룸버그 인텔리전스(BI)는 지난 9월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미국에서 2050년까지 모두 3,500억 달러(약 490조원) 규모의 원자력 발전 투자 붐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