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검증된 신뢰 위에 여는 새로운 통상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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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무역 네트워크가 남긴 통상 협력의 교훈 中 국가 주도 경제, 협정만으로는 한계 검증 가능한 규범이 새로운 경쟁력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1815년부터 1919년까지 유럽 국가들은 약 900건의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들 협정은 체결국 간 교역을 평균 14% 늘린 것으로 분석됐다. 당시 유럽에는 이를 강제할 국제기구나 중앙 권한이 없었지만, 국가들은 양자협정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며 하나의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협력은 시장 개방과 교역 확대의 기반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을 모든 국가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중국은 국가가 기업과 금융, 토지, 자원 등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만큼 협정만으로 공정한 경쟁 질서를 확보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중국과의 통상에서는 시장 개방 확대보다 국가 개입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조약으로 연결된 유럽의 무역 질서
유럽의 초기 통상 질서는 단일한 제도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국가 간 양자협정이 축적되면서 점차 하나의 무역 네트워크로 이어졌다. 소규모 국가는 인접 시장과 항만 접근성을 넓히는 데 주력했고, 강대국은 안정적인 교역로 확보와 영향력 확대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체결된 협정은 관세장벽을 낮추고 시장 접근성을 확대하는 기반이 됐다.
특히 특정 국가에 부여한 통상 혜택을 다른 협정 체결국에도 적용하는 최혜국 대우(MFN) 조항은 개별 협정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핵심 장치였다. 새로운 협정이 체결될수록 기존 협정의 효과도 함께 커졌으며, 1860년 영국과 프랑스가 체결한 콥든-슈발리에 협정(Cobden-Chevalier Treaty)은 이러한 흐름을 유럽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전환점이 됐다. 그 결과 양자협정은 개별 국가 간 합의를 넘어 유럽 통상 질서의 기반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에는 협정 위반을 제재할 국제기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들은 반복적인 협상과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협정을 유지했고, 무역 특혜를 철회할 수 있다는 점이 사실상의 견제 장치로 기능했다. 협정이 연결될수록 한 국가의 약속 불이행은 다른 협정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고, 신뢰를 잃는 비용 역시 함께 높아졌다. 물론 당시 유럽 질서는 식민지 지배와 무력 사용이라는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장 접근을 일정한 규범에 따라 관리하고, 이를 토대로 국가 간 신뢰를 축적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유럽과 다른 중국의 통상 질서
그러나 유럽의 경험을 중국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유럽은 국가 간 조약을 축적하며 통상 질서를 발전시켜 왔지만, 중국은 오랫동안 중앙 권력을 중심으로 주변국과 외교·무역 관계를 형성해 왔다. 조공 관계와 무역 특혜도 국가 간 계약보다 중앙 권력과의 관계를 토대로 이뤄졌다. 물론 이러한 질서가 2,000년 동안 동일한 형태를 유지한 것은 아니다. 시대에 따라 전쟁과 국경무역, 지역별 협력 방식은 계속 변화했다. 다만 국가 간 조약을 확대하며 협력 범위를 넓혀온 유럽과 비교하면 중국은 국가의 영향력이 시장 전반에 미치는 통상 구조가 오랫동안 유지됐다.
이 같은 차이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이자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의 핵심 참여국이며, 다수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주요 교역국이다. 하지만 국가 지원과 시장 경쟁이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만큼 협정만으로 공정한 경쟁 여건을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WTO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금융과 전력, 토지, 공공조달, 국부펀드 등을 통한 국가 지원이 중국 핵심 산업 전반에서 폭넓게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교역 상대국은 기업 경쟁력이 시장 경쟁의 결과인지, 국가 지원의 영향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유럽이 시장 개방을 중심으로 통상 질서를 확대했다면 중국은 국가의 역할이 시장 전반에 폭넓게 미치는 만큼 같은 방식의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환율·보조금 논란이 보여준 입증의 중요성
이 때문에 중국의 국가 개입을 평가할 때는 추정보다 객관적인 입증이 중요하다. 최근 환율과 보조금을 둘러싼 논란은 국가 주도 산업정책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판단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중국의 실질환율이 저평가됐다고 평가하면서도 이를 환율 조작으로 단정하지 않았다. 부동산 경기 침체와 내수 부진, 자본 유출 등 다양한 경제·정책 요인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반면 유럽연합(EU)은 중국산 전기차 보조금 조사에서 정부 지원 규모와 방식, 산업 피해 등을 근거로 7.8~35.3%의 상계관세를 부과했다. 충분한 조사와 객관적인 입증을 거쳐 법적 조치를 내렸다. 이는 국가 주도 경제에 대응할 때 추정이나 정황보다 확인된 사실과 실증 자료가 우선돼야 함을 시사한다. 국가 지원 여부는 확인된 지원 방식과 객관적인 자료, 실질적인 산업 피해를 토대로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역사적 경험은 위험을 가늠하는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지만 법적·경제적 판단의 근거를 대신할 수는 없다.
중견국 네트워크가 필요한 이유
국가 주도 산업정책과 공급망 재편에 대응하려면 개별 국가의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공통 기준을 마련하고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중견국 간 협력 확대가 요구된다. 이미 협력의 기반은 마련됐다. EU는 80개국과 45건의 무역협정을 체결했고,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은 5대륙 12개국을 포괄하는 경제권으로 세계 경제의 약 15%를 차지하는 규모다. 앞으로는 이러한 기존 협정을 연계해 시장 접근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대상은 주요 중견국이다. EU와 영국, 캐나다, 일본, 한국, 호주, 인도, 아랍에미리트(UAE)는 외교·안보 전략에는 차이가 있지만 특정 초강대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경계하고 개방적인 통상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공통된 이해를 공유한다. 협력 기반이 넓어질수록 개별 국가의 협상력도 함께 커질 수 있다.
다만 협력의 방향은 획일적인 통합보다 호환 가능한 연결망 구축에 맞춰야 한다. 모든 참여국이 공동으로 적용할 수 있는 핵심 규범부터 마련하는 방식이다. 국가 보조금 공시 기준과 관세 인하 일정, 서비스 분야의 공통 기준을 마련하고 시험·인증 결과의 상호 인정, 우수 기업의 통관 절차 간소화, 공공조달시장 개방 원칙 등을 함께 구축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기반이 마련되면 국가별 정책 차이를 유지하면서도 협력 범위는 자연스럽게 확대될 수 있다.
협력 체계가 실효성을 확보하려면 공동 감시 기반도 뒷받침돼야 한다. 관세뿐 아니라 저금리 대출과 세제 지원, 토지·전력 지원, 공공조달, 국유기업을 통한 우회 지원까지 포괄하는 점검 체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공동 데이터베이스와 합동 조사 체계를 구축하고 조사 결과와 통관 자료, 공급망 정보를 공유하는 협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공조는 조사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거대 경제권에 대한 공동 대응 역량을 높이는 기반이 될 수 있다.
검증된 신뢰 위에 여는 통상질서
중국을 국제 무역체제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디커플링(탈동조화)은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 어렵다. 중국 제조업은 글로벌 공급망과 가격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세계 경제가 블록화될 경우 중국 역시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안게 된다.
현실적인 해법은 검증을 전제로 한 단계적 협력이다. WTO 규범은 국제 통상의 공통 기준으로 유지하면서 자동차와 철강, 태양광, 환율 등 민감한 분야에서는 다자간 협의를 이어가야 한다. 추가적인 통상 혜택도 합의 이행과 투명성이 객관적으로 확인된 이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중국이 다른 회원국과 동일한 수준의 투명성과 시장 규범을 충족할 경우 중견국 협력 체계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도 열어둘 필요가 있다.
중견국 협력 체계의 목적은 새로운 진영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보편적인 통상 규범을 유지하고 가입 기회를 열어두는 동시에 통상 분쟁을 객관적인 사실과 증거를 토대로 해결하는 데 의미가 있다. G7과 주요 중견국도 과거의 경험만으로 모든 국가를 동일한 기준에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중견국 간 협력은 더욱 강화하되 중국과의 통상 관계는 상호주의 이행 여부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검증하는 방식으로 신뢰를 축적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응 방안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Middle-Power Trade Network: Europe’s Treaty Model for a Fragmented Trade Order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