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재무장 힘입어 함정 사업 확대하는 獨 방산업계, 역내 방산 생태계 강화에 역외 기업 입지 '시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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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메탈·TKMS 등 獨 방산 기업, 함정 건조 사업 확장 '속도' 美 방위비 분담 압박에 유럽 재무장 가속화, 국방비 지출도 확대 역내 조달 전략 강화하는 EU, 아시아 방산업계에는 부담이자 기회

독일 방산 기업 라인메탈이 루마니아 망갈리아 조선소를 인수한다. 미국의 방위비 분담 압박과 러시아발 안보 위협을 계기로 유럽 각국의 재무장 행보에 속도가 붙는 가운데, 독일 방산업계 역시 해상 전력 분야로 사업 영역을 빠르게 넓히는 모습이다. 시장에서는 이러한 유럽의 자력 방위 강화 및 역내 조달 확대 기조가 한국 등 역외 방산업체의 유럽 진출 문턱을 높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라인메탈의 조선 사업 진출
지난 9일(현지시각) 해운·조선 전문 매체 더 마리타임 익제큐티브는 라인메탈이 망갈리아 조선소를 1억3,800만 유로(약 2,070억원)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했다. 이는 당초 경매 기준가의 약 75% 수준이다. 한때 유럽 최대 규모 조선소 중 하나였던 망갈리아조선소는 2018년부터 네덜란드 조선기업 다멘과 루마니아 정부의 합작 사업으로 운영돼 왔으나, 이러한 구조는 지난 2023년 루마니아 정부가 민간 기업 경영 관련 규정을 전격 변경하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다멘은 이를 명백한 계약 위반으로 규정했고, 2024년 조선소 현대화와 운영에 투입한 대규모 대출을 이유로 지급불능 절차를 신청했다. 현지 법원은 지난 4월 망갈리아 조선소의 파산 상태를 선언했으며, 이후 이뤄진 경매는 세 차례 유찰됐다.
이번 거래는 라인메탈의 사업 확대 행보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라인메탈은 지난 3월 독일 조선 기업 뤼르센그룹의 군함 건조 부문인 나발 베슬스 뤼르센(NVL) 인수 절차를 마무리하고, 기존의 지상 무기·군용 차량·탄약 중심 사업을 넘어 해상 방산 분야까지 사업 영역을 넓혔다. 이후 5월에는 루마니아 해군에 연안순찰함 2척, 잠수부 지원함 2척을 공급하는 총 9억2,000만 유로(약 1조3,790억원) 상당의 계약을 체결하며 첫 대규모 현지 함정 수주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해당 계약에는 선체 건조, 상부 구조물 제작, 무장·장비 설치 등을 루마니아 내 조선소에서 수행한다는 조건이 포함돼 있다. 라인메탈이 현지 생산 거점을 확보할 유인이 분명했던 셈이다.
급성장하는 獨 방위산업
독일의 또 다른 방산 기업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스(TKMS) 역시 기존 잠수함·수상함 건조 사업을 기반으로 대형 군함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독일 해군이 추진하는 차세대 방공호위함 F127 사업에 참여하며 장거리 방공·탄도미사일 요격 능력을 갖춘 대형 함정 개발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해당 함정은 TKMS의 기존 MEKO A400 설계를 기반으로 개발되고 있으며, 적의 탄도미사일을 대기권 밖에서 요격하는 해상 방어 체계 구축을 목표로 한다.
기존 민간 조선업체가 방위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는 움직임도 관찰된다. 일례로 독일 조선사 마이어베르프트는 대형 크루즈선 건조를 주력으로 삼아 왔지만, 최근에는 해군 함정 건조 사업에도 무게를 싣고 있다. 지난해 5월 마이어베르프트의 최고구조조정책임자(CRO)인 랄프 슈미츠는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와의 인터뷰에서 "방산 사업에 역량을 집중할 경우 호위함 4~5척을 연속 건조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실제 마이어베르프트는 계열사 넵툰조선소를 통해 독일 해군의 707급 군수지원함 건조 사업에 참여하며 군용 선박 건조 경험을 축적해 왔고, 현재는 본업인 크루즈선 사업의 수주 회복과 방산 분야 진출 노력을 병행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표1. 독일 방산·조선업체의 해상 방산 사업 확대
| 기업 | 주요 움직임 |
|---|---|
| 라인메탈 | NVL 인수로 군함 건조 사업 진출, 루마니아 망갈리아 조선소 인수 및 현지 함정 생산 추진 |
| TKMS | 잠수함·수상함 건조 역량을 기반으로 차세대 방공호위함 F127 등 대형 군함 시장 공략 |
| 마이어베르프트 | 크루즈선에서 해군 함정 분야로 사업 확장 시사, 계열사를 통해 군수지원함 건조 경험 확보 |
유럽 안보 지형 변화
이처럼 독일 방산업계 전반에서 사업 확장·생산 역량 강화 흐름이 두드러지는 배경에는 급변하는 유럽 안보 지형이 자리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재집권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동맹국들이 미국의 군사력에 과도하게 의존한다고 비판하며 꾸준히 방위비 분담 확대를 요구해 왔다. 이에 독일을 비롯한 주요 회원국들은 미국과의 군사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독자적인 병력·무기체계·방위산업 기반을 확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이들 국가는 지난해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2035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5%를 국방·안보 관련 지출에 투입하기로 합의했다. GDP의 최소 3.5%는 병력 운용·무기 체계 확보 등 핵심 국방 분야에, 최대 1.5%는 군사 인프라·사이버 안보·방위산업 기반 확충 등에 배정하는 방식이다. 이에 더해 나토는 회원국들에 새로운 목표 달성을 위한 연례 지출 계획을 제출하도록 했으며, 2029년에는 목표 이행 상황과 지출 구조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방산업계에 자금 대거 유입
독일은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기 위해 재정 제도를 개편했다. 헌법상 국가 차입을 제한하는 재정 준칙인 '부채 브레이크(Schuldenbremse)'를 완화해 GDP의 1%를 초과하는 국방·안보 관련 지출을 차입 제한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독일 정부는 이를 토대로 주요 군사 장비 조달 및 병력 확충을 위한 투자를 확대 중이다. 독일 재무부에 따르면 올해 국방부 예산과 독일군 특별기금을 합친 지출 규모는 1,082억 유로(약 162조2,330억원)이며, 내년에는 1,397억 유로(약 209조4,630억원), 2028년에는 1,539억 유로(약 230조7,546억원)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 같은 국방비 증액 움직임은 독일 외에도 다수 유럽 국가에서 관찰되고 있다. 러시아와 인접한 폴란드는 올해 국방비로 GDP의 4.81%에 해당하는 2,001억 즈워티(약 68조5,080억원)를 편성하며 유럽 내 군비 증강을 주도 중이다. 프랑스는 지난 8월 군사계획법을 개정해 2026~2030년 국방예산을 기존 계획보다 360억 유로(약 53조9,780억원) 증액하기로 했다. 발트해 연안의 라트비아도 올해 국방비로 GDP의 4.73%에 해당하는 21억6,000만 유로(약 3조2,390억원)를 편성했으며, 2027년에는 지출 규모를 GDP 대비 5% 수준까지 확대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아시아 방산업계, 향후 입지는
이러한 유럽의 자력 방위 강화 기조는 역외 방산 기업들의 유럽 시장 진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지난해 발표한 '유럽 재무장(ReArm Europe)' 구상의 일환으로 회원국들에 최대 1,500억 유로(약 224조9,070억원)의 방위산업 투자 대출을 제공하는 '유럽 안보행동(SAFE)'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해당 제도에 따라 금융 지원을 받는 역내 공동 조달 사업은 최종 제품의 부품 비용 중 최소 65%를 EU·우크라이나·유럽경제지역(EEA) 등 적격 지역에서 조달해야 한다. 역외 기업의 참여가 원천 차단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지 생산 역량 및 유럽 기업과의 협력이 수주 경쟁력을 좌우하는 구조다.
최근 유럽의 주요 함정 도입 사업에서도 역내 방산 기업들의 수주 성과가 두드러지고 있다. 지난해 8월 노르웨이는 영국 BAE시스템스의 26형(Type 26) 호위함을 차세대 대잠수함전 함정으로 낙점했으며, 같은 해 11월 폴란드 역시 신형 잠수함 도입을 위한 오르카 사업의 우선 협력 대상으로 스웨덴 사브의 A26 잠수함을 선정했다. 프랑스 국영 조선업체 나발그룹 역시 역내 재무장 수요를 대거 흡수 중이다. 지난 8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나발그룹의 전체 매출에서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고객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0%에서 최근 20~25%까지 상승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아직 아시아 기업들이 현지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여지가 남아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장기간에 걸친 군함 발주 둔화로 생산 기반이 제한된 유럽 조선업체들이 급증하는 군함 수요를 단기간에 감당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실제 다멘이 수주한 독일 해군의 F126 호위함 사업은 설계 지연과 비용 증가로 차질을 빚다 올해 6월 중단됐으며, 다멘이 참여하는 벨기에·네덜란드의 차세대 대잠수함 호위함 사업 역시 설계 변경 문제로 첫 함정 인도 일정이 기존보다 3년 늦어진 2033년으로 조정됐다. 이런 상황에 한국, 일본 등 탄탄한 생산 인프라와 설계·건조 경험을 보유한 역외 국가와의 협력은 유럽에 있어 유의미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