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도, AI도 풀어줬다” 규제 선봉장 EU, 산업계 압박 속 완화 노선으로 본격 선회
“전기차도, AI도 풀어줬다” 규제 선봉장 EU, 산업계 압박 속 완화 노선으로 본격 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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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자동차 탄소섬유 규제 완화하며 정책 노선 조절 나서 '2035년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 규제 역시 사실상 철회 수순 산업계 반발 속 AI 법 시행도 연기, DMA·DSA 속도 조절 가능성도 거론

유럽연합(EU)이 자동차 제조 시 탄소섬유 사용을 제한하려던 당초 계획을 철회했다. 최근 '전기차 완전 전환' 목표를 수정하며 내연기관차 생산 가능성을 열어둔 데 이어 재차 규제의 완급 조절에 나선 것이다. 이 같은 완화적 노선은 비단 전기차 부문을 넘어 ‘AI 법(AI Act)’ 등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시장 규제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다.
자동차 탄소섬유 규제 방침 철회한 EU
29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EU, 유럽의회, 유럽 이사회 등 3개 기관이 폐자동차의 재활용을 규정하는 ‘폐차 처리 기준(ELV) 지침’을 개정하고, 자동차 차체에 사용할 수 없는 규제 물질 목록에서 탄소섬유를 제외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당초 유럽의회는 지난 4월 탄소섬유가 인체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으며 재활용이 어렵다는 이유로 ELV 지침 개정 검토를 진행했다. 현재 차체 사용이 금지된 수은, 납, 카드뮴 등 유해 물질과 마찬가지로 탄소섬유 사용을 제한하겠다는 구상이었다.
EU가 태도를 바꾼 배경에는 일본 기업들의 강력한 로비가 있다. 도레이, 미쓰비시케미칼, 데이진 등을 주축으로 하는 일본화학섬유협회는 유럽의회가 탄소섬유 규제 여부 검토에 착수한 4월 “탄소섬유가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며 즉각 방침 철회를 요구했다. 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 거점을 둔 ‘재유럽 일본계 비즈니스 협의회’는 5월 전담 태스크포스를 발족하고, EU 정책 입안자들을 만나 설득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달 중순에는 일본 기업들과 미국 기업 헥셀 등이 탄소섬유 관련 이익 단체를 유럽에 설립하고 로비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밖에 이탈리아의 람보르기니, 영국의 맥라렌 오토모티브 등 차체 경량화를 위해 탄소섬유를 대량 사용하는 스포츠카 제조사들도 규제 반대 흐름에 동참했다. 이익 단체 유럽복합재료산업협회 역시 “탄소섬유는 세계보건기구 기준상 유해 물질로 분류되지 않았다”며 “유럽의 규제 틀 안에 탄소섬유를 적절히 편입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 EU는 기업들의 반발에 한발 물러서면서도, 탄소섬유 추적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은 유지했다. 이에 따라 개정안에는 탄소섬유를 ‘우려 물질’에 포함하고, 지속적으로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전망된다.
전기차 완전 전환 목표, 현실 앞에 꺾였다
EU는 앞서 이달 16일(현지시각)에도 벨기에 브뤼셀에서 내연기관차 판매를 조건부로 허용하는 개정안을 발표하며 전기차 규제를 일부분 철회한 바 있다. 앞서 EU는 지난 2023년 유럽 그린딜 정책의 일환으로 2035년부터 판매되는 모든 신차의 탄소 배출량을 '제로'로 의무화하며 사실상 내연기관차 판매를 전면 금지한 바 있다.
개정안의 핵심은 2035년 이후에도 차 한 대당 최대 10%의 잔여 이산화탄소 배출을 허용하고, 이를 △합성연료(e-fuel) 사용 △지속가능 바이오연료 적용 △저탄소 강철 활용에 따라 발생하는 크레딧으로 상쇄하도록 하는 데 있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2035년 이후에도 2021년 대비 90% 수준의 배출가스 감축 목표만 달성하면 내연기관차와 하이브리드 차량을 생산·판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정책 전환의 배경에는 전기차 자체의 탄소 저감 효과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깔려 있다. 전기차 보급이 탈탄소 흐름을 견인하기 위해서는 전력 생산 단계에서의 탄소 배출 감축이 전제돼야 한다. 이에 유럽 내에서는 석탄·가스 발전 비중이 높고, 에너지 믹스(석유, 천연가스, 석탄, 원자력, 재생에너지 등 다섯 가지 1차 에너지의 전체 사용량 중 각 에너지원이 차지하는 비중) 차이가 큰 지역의 경우 전기차 확산이 곧바로 온실가스 감축으로 연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거듭 제기돼 왔다.
비용 부담과 인프라 부족 역시 문제로 꼽혔다. 다임러 트럭 AG의 카린 로드스트룀 CEO에 따르면 현재 유럽 내 대형 화물차용 공공충전소는 1,500개뿐이다. 전기차를 상용화하기 위해 필요한 충전소가 약 3만5,000개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2035년까지 매달 500개에 육박하는 충전소가 설치돼야 하는 셈이다. 전기트럭 가격도 40톤 2축 기준 30만 유로(약 5억2,000만원)로 디젤 차량의 2배에 달한다.
산업 현실 역시 EU에 무시할 수 없는 압박을 가했다. 그간 독일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유럽 자동차업계는 급격한 전기차 전환이 전통 내연기관 기술과 전기차 생산 기반을 동시에 유지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가중한다고 거듭 호소해 왔다. 이러한 흐름이 자동차 산업 전반에 큰 타격을 주고 일자리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EU가 개정안에 승합차 부문의 2030년 이산화탄소 감축 목표를 50%에서 40%로 낮추고, 2030~2032년 사이 크레딧 차입·적립을 허용하는 유연성 조항을 포함한 이유다.

디지털·첨단 기술 규제 장벽도 낮아져
이 같은 규제 철회 행보는 비단 전기차 부문을 넘어 기술 산업에서도 두드러진다. 앞서 EU는 2024년 8월 세계 최초로 포괄적인 AI 규제 법안인 AI 법을 발효하고, AI를 위험 수준에 따라 분류·관리하는 체계를 도입한 바 있다. AI 법은 기업이 건강, 안전, 기본권 등을 심각히 위협할 수 있는 '고위험' AI를 사용할 때 EU의 엄격한 규정을 따르도록 강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문제는 EU가 실제 법 시행 과정에서 각국 기업들의 반발에 직면했다는 점이다. 미국 빅테크뿐 아니라 에어버스, 루프트한자, 메르세데스-벤츠 등 유럽 주요 기업 상당수도 해당 법안이 혁신을 저해하고 기술 발전을 옥죌 소지가 있다며 시행을 유예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EU는 지난달 '디지털 간소화 방안'을 발표하며 규제 수위를 낮췄다. 해당 방안에는 AI 규제 시행 시기를 당초 내년 8월에서 2027년 12월로 16개월 연기하고, 합법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면 기업이 AI 모델을 훈련할 때 개인 정보 등에도 접근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EU 집행위원회는 간소화 방안이 AI 등 첨단 기술 경쟁에서 뒤진 유럽 기업의 경쟁력 확보 및 중국·미국 등 역외 테크 기업에 대한 의존도 감소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EU가 향후 디지털시장법(Digital Markets Act, DMA)과 디지털서비스법(Digital Services Act, DSA)에 담긴 규제를 단순화할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DMA와 DSA는 유럽 디지털 시장의 질서를 재정립하기 위한 핵심 규제 장치다. DMA는 앱스토어, 검색엔진, 소셜미디어, 광고 플랫폼 등 이른바 ‘게이트키퍼(Gatekeeper)’의 시장 지배 행위를 제한하는 것이 골자다. 자사 서비스 우대나 경쟁 서비스 차단을 금지하고, 위반 시 전 세계 매출의 최대 10%(재범의 경우 20%)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DSA는 DMA의 틀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온라인 서비스를 규율 대상으로 삼되, 이용자 수 4,500만 명을 넘는 초대형 온라인 플랫폼(Very Large Online Platforms)과 검색엔진에는 보다 엄격한 의무를 부과한다. 이들은 시스템적 위험에 대한 평가와 완화 조치를 수행해야 하고, 승인된 연구자에게 관련 데이터를 제공해야 한다.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전 세계 매출의 최대 6% 규모까지 제재가 가능하다. DSA는 2023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됐으며, 2024년 2월 17일부터 모든 플랫폼에 전면 적용됐다. 지난 4월에는 DMA와 DSA에 의거해 애플에 5억 유로(약 7,500억원), 메타에 2억 유로(약 3,000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되기도 했다.
문제는 해당 법안들의 준수 부담이 지나쳐 역내 기업들의 성장에 제동이 걸렸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한 시장 전문가는 "복잡한 규제로 인해 유럽 기술 시장에 대한 투자는 점점 위축되고 있으며, 현지 기업들은 복잡한 규제 해석과 보고 의무에 비용을 쏟아붓느라 성장 여력을 잃어가는 추세"라며 "해석 부담과 행정 비용을 경감하고, 명확한 설계 기준으로 불확실성을 제거해 규제가 '족쇄'가 아닌 성장 기반이 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