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자본 도입부터 디지털 동맹 강화까지" EU, 탈미국·첨단 기술 자립 흐름 속 선택의 기로 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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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미국 흐름 속 자금 한계 부딪힌 EU, 中 자본이 해법 될까 개발도상국 휩쓴 中 일대일로 전략, 함정 외교 리스크 부각 서방 동맹국과의 협력·특정 분야 '병목' 공략 등 대안으로 떠올라

유럽연합(EU)이 첨단 기술 분야의 생존을 위해 중국 자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미국의 기술 통제 리스크가 나날이 커져 가는 가운데, 성장 자금을 충당하고 기술 자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중국에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는 진단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일대일로' 전략 등을 통해 중국 자본 투입의 위험성이 이미 명확히 증명된 만큼, 이러한 시나리오는 사실상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EU 첨단 산업계 '빨간불'
17일(현지시각)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유럽중앙은행(ECB) 창립 부총재이자 전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인 크리스티앙 누아예는 최근 홍콩 방문 일정 도중 인터뷰를 통해 "유럽이 진정한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중국 자본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며 "유럽이 자체적인 AI 생태계와 첨단 기술 인프라를 긴급히 개발해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미국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워싱턴 당국이 언제 특정 핵심 품목의 수출을 제한하거나 특정 원천 기술에 대한 접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아무도 알 수 없다"며 "유럽이 자체적인 기술 방어벽을 세우지 못하면 미국의 정책 변화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이는 현재 EU가 맞닥뜨린 상황을 정조준한 발언이다. 최근 EU는 AI, 친환경 에너지, 국방 등 전략적 미래 산업 부문에서 극심한 자금 압박에 짓눌리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전 ECB 총재가 EU에 제출한 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이 미국과 중국을 따라잡기 위해 매년 추가 투입해야 하는 자본은 8,600억~9,170억 달러(1,323조5,400억~1,411조2,63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디지털 전환, 탈탄소화, 국방 역량 확충 등을 동시에 추진하려면 단순한 재정 보강을 넘어 자본 시장 통합과 산업정책 재설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ECB도 별도 분석에서 녹색 전환, 디지털 전환, 방위 부문에 필요한 공공 자금이 연간 5,850억 달러(약 900조3,150억원)에 육박하며, 현행 재정 틀로는 이 가운데 최소 1,210억 달러(약 181조2,190억원)가 매년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문제는 유럽이 이 같은 투자 공백에 직면한 사이 미국의 기술 통제 리스크가 나날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출범 이후 중국 본토 기업을 넘어 해외 소재 중국계 자회사까지 규제 범위를 넓히는 중이며, 첨단 AI 칩뿐 아니라 앤스로픽 등 핵심 AI 기업의 특정 모델 접근권까지 국가 안보 사안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유럽이 자체적인 첨단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지 못할 시, 전략 산업의 병목은 시장 경쟁이 아닌 미국의 허가 여부에 좌우될 수 있다. 누아예가 중국 자본에 대한 개방성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유럽이 중국을 무조건 배제할 경우, 투자 재원 확보처를 찾지 못한 채 글로벌 경쟁에서 고립될 위험이 커진다. 반대로 전략산업별 보안 심사와 통제 장치를 전제로 중국 자본을 선별적으로 활용한다면 미국 의존도를 낮추는 동시에 자체 AI·첨단 기술 인프라 확보 속도를 높일 수 있다.
中 자본이 품은 핵심 리스크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중국 자본 의존도를 확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성이 큰 선택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앞서 중국의 대외 인프라 투자 전략인 ‘일대일로’가 일부 신흥국에서 부채 부담과 주권 리스크를 키운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일대일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제시한 대외 경제·외교 구상으로 육상에 중국과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을 잇는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해상에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아프리카, 유럽을 연결하는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구축하는 것이 골자다. 표면적으로는 인프라 투자를 통해 개발도상국의 성장 기반을 확충한다는 명분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중국 국영은행과 국유기업이 자금 조달과 시공을 주도하면서 수원국의 대중국 채무 의존도를 키우는 일종의 '함정 외교'가 됐다.
중국의 이러한 전략에 휩쓸린 대표적 국가로는 스리랑카가 꼽힌다. 스리랑카는 중국 자본에 기대 남부 함반토타 항만을 건설했지만, 항만이 기대만큼 수익을 내지 못하면서 상환 부담이 커졌다. 결국 스리랑카 정부는 2017년 함반토타 항만 운영권을 중국 국유기업인 차이나머천트포트홀딩스에 99년간 넘기는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거래 규모는 11억2,000만 달러(약 1조6,912억원)였다. 라오스도 일대일로의 명암이 뚜렷하게 드러난 국가로 거론된다. 라오스는 중국과 연결되는 고속철도와 수력 발전, 송전망 등 대형 인프라 사업을 추진하며 차입을 크게 늘렸으나, 관련 수익이 본격화되기 전에 상환 압박이 가중됐다. 현재 라오스 경제는 외채 부담과 고물가, 통화 약세가 맞물려 위기에 빠져 있으며, 보건·교육·기후 대응 등 필수 예산까지 위태로워진 상황이다.
이들 국가 외에도 수많은 개발도상국이 중국발(發) 채무 부담에 신음하고 있다. 호주 싱크탱크 로위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최빈·취약 75개국의 대중국 채무상환액은 220억 달러(약 33조2,200억원)에 육박하며, 전체 개발도상국 기준으로 범위를 넓히면 그 규모는 350억 달러(약 52조8,500억원)까지 커진다. 아울러 120개 개발도상국 중 54개국은 중국에 대한 상환액이 파리클럽(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일부 회원국을 중심으로 발족한 국제 채권국 협의체) 전체 상환액보다 많았고, 중국이 최대 양자채권자로 자리 잡은 국가도 53개국에 달했다. 일대일로 초기의 인프라 대출이 줄줄이 만기를 맞으면서, 중국의 역할이 개발도상국에 신규 자금을 공급하는 투자자에서 채권 회수자로 변모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 자본이 단순한 투자 재원을 넘어 장기적 정책 종속, 전략 자산 통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양날의 검'임을 보여준다.

탈미국 행보 뒷받침할 대안은
이 같은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한 대안으로는 서방 동맹국과의 협력 확대가 꼽힌다. EU는 이미 미국 주도의 안보·기술 질서와 접점이 큰 한국, 일본, 캐나다 등과 디지털 파트너십을 체결한 상태다. 협력 구도가 맨 먼저 공식화한 것은 일본이다. 양국은 2022년 5월 EU·일본 정상회의에서 첫 디지털 파트너십을 맺었고, 이후 AI, 데이터, 양자 기술, 반도체, 디지털 인프라, 온라인 플랫폼 규제 등으로 협력 범위가 넓어졌다. 지난달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4차 EU·일본 디지털 파트너십 협의회에서는 AI, 데이터, 양자, 반도체 분야의 규제·연구·산업 협력을 심화하기 위한 논의가 오가기도 했다.
캐나다는 2023년 11월 EU와 디지털 파트너십을 출범했다. 협력 분야는 AI, 양자 기술, 반도체, 사이버보안, 온라인 플랫폼, 디지털 신원, 보안 연결망 등이다. 지난해 12월 몬트리올에서 열린 첫 EU·캐나다 디지털 파트너십 협의회에서는 AI 협력, 디지털 신원 지갑, 신뢰 서비스, 독립 미디어, 반도체 공급망, 클라우드·데이터센터 인프라 등이 핵심 사안으로 거론됐다. 한국의 경우 2022년 11월 EU와 디지털 파너십을 체결했고, 지난 10일 브뤼셀에서 열린 EU·한국 정상회의에서 별도의 디지털 무역협정에 서명했다. 해당 협정은 2011년 발효된 EU·한국 자유무역협정을 보완하는 장치로, 국경 간 데이터 이동, 전자계약, 전자서명, 소비자 보호, 온라인 거래 등 디지털 통상 규칙을 구체화하는 것이 골자다.
특정 공급망의 '병목'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추는 전략 역시 기술 자립의 발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의 효용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중동이다. 중동 산유국들은 오랫동안 석유와 천연가스 자원을 바탕으로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최근에는 그 입지가 AI 인프라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지난해 5월 아랍에미리트(UAE)와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중동 순방을 계기로 아부다비에 5기가와트(GW) 규모의 AI 캠퍼스를 조성하기로 했다. 당시 UAE 측 발표에 따르면 해당 캠퍼스는 미국 외 지역 기준 최대 규모의 AI 인프라 거점으로, 미국 하이퍼스케일러와 대기업들이 역내 컴퓨팅 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후 G42, 오픈AI, 오라클, 엔비디아, 소프트뱅크, 시스코는 이 캠퍼스 안에 1GW 규모의 ‘스타게이트 UAE’ 컴퓨팅 클러스터를 구축한다고 추가 발표했다. 비슷한 시기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 산하 AI 기업 휴메인 역시 엔비디아와 함께 최대 500메가와트(MW) 규모의 AI 팩토리를 짓기로 했다.
중동 국가들이 AI 인프라 경쟁에서 주목받는 것은 저렴하고 풍부한 에너지 덕분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전력 단가는 킬로와트시(kWh)당 약 0.02~0.05달러(약 30~76원) 선으로 북미와 유럽 대비 현저히 낮다. 이는 대규모 AI 연산 시설을 운영하는 기업에 직접적인 비용 우위를 제공한다. 지리적 이점 역시 뚜렷하다. 중동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중간 지점에 놓여 있는 만큼, 글로벌 사우스 시장을 동시에 겨냥 가능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신속한 의사결정 체계도 매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사우디와 UAE는 국부펀드와 국영기업, 정부 주도 산업 전략을 결합해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를 빠르게 추진한다는 특징이 있다. 민간 기업과 지방정부, 전력회사 간 조율이 길어지는 미국·유럽과 달리, 최고 통치권자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자본과 행정력을 단기간에 집중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들 국가는 직접 고성능 AI 모델을 만드는 대신, AI 산업의 기반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글로벌 기술 공급망에서 영향력을 행사 중이다. 산업 패권이 반드시 완제품 기술력에서만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확실한 사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