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 없인 경쟁력도 없다” ECB 전 총재가 짚은 안보·재정 위기 속 유럽의 한계
“연방 없인 경쟁력도 없다” ECB 전 총재가 짚은 안보·재정 위기 속 유럽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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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산업 ‘실용적 연방주의’ 필요성 주요국 성장 압박에도 재정 통합 공백 안보·외교 자율성 문제로 논의 재점화

유럽이 탈산업화와 그에 따른 쇠퇴를 피하려면 ‘진정한 연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경고 메시지가 나왔다. 미·중 경쟁 심화와 안보 불확실성이 겹치는 상황에서 유럽은 재정·산업·방위 정책에서 분절된 구조를 유지하며 대응력이 제한돼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프랑스·독일·영국 등 핵심 국가들의 재정 압박이 심화하는 가운데 공동 예산과 조세 체계 부재는 연방 논의를 가로막는 핵심 제약으로 지목된다. 여기에 미국의 안보 기조 변화까지 더해지면서 유럽 내부에서는 통합의 범위와 속도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확산하는 추세다.
“위기 대응 속도 및 정책 집행력 떨어져”
2일(현지시각) 다국어 뉴스채널 유로뉴스에 따르면 이날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벨기에 루뱅 가톨릭대학 명예 학위 수여식 연설에서 유럽연합(EU)이 탈산업화와 장기적 쇠퇴를 피하기 위해서는 보다 끈끈한 연방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EU가 미국과 중국에 비해 경쟁에서 밀리는 상황임에도 그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지금과 같은 대응 속도와 정책 강도로는 산업 기반과 정치적 자율성 모두가 훼손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드라기 전 총재는 유럽이 처한 환경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현재의 국제 환경을 “기능을 상실한 체제”로 규정하며 그 출발점으로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서방 국가들이 앞다퉈 교역 확대에 나섰던 시기를 지목했다. 유럽 국가들의 선택이 중장기적으로 정치적 반작용과 규범 약화를 초래했다는 평가다. 드라기 전 총재는 “더 큰 문제는 이후에 형성된 환경”이라고 짚으며 “미국은 관세와 산업 보조금, 안보 논리를 결합해 유럽에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고, 중국은 공급망 핵심 고리를 장악한 채 물량 조절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유럽이 무역·경쟁·통화 정책처럼 이미 연방에 가까운 방식으로 운영되는 영역에서는 단일 행위자로서 실질적인 협상력과 집행력을 확보한 반면, 방위·산업·외교처럼 각국 권한이 분절된 영역에서는 정책 지연과 무력화 탓에 외부 강대국의 압박에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꼬집었다. 이 같은 상황이 유럽 전체를 ‘느슨한 중견국 집합체’로 인식하는 배경으로 작동한다는 설명이다. 드라기 전 총재는 “지금과 같은 분절 상태는 외부 세력으로 하여금 유럽을 순차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고 일갈했다.
앞서 드라기 전 총재는 2024년 9월에도 ‘EU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통해 유럽의 성장 모델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한 바 있다. 당시 그는 EU의 경쟁력 회복을 위해 매년 8,000억 유로(약 1,370조원) 규모의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으나, 이후 1년 동안 이행된 비율은 11.2%에 그쳤다. 이 때문에 ‘진정한 연방’과 ‘실용적 연방주의’를 반복 강조하는 그의 주장은 탈산업화와 저성장이 이미 정책 성과로 확인되는 상황에서 느슨한 합의와 국가별 계산을 더 이상 지속할 여지가 없다는 판단으로 읽힌다.
공동 예산·조세 체계 합의 요원
이처럼 유럽 내부의 위기의식이 짙어진 데는 유럽 경제의 주축 국가들이 일제히 재정 압박을 받는 암울한 현실이 자리한다. 먼저 프랑스의 상황은 유럽 내에서도 가장 취약한 축에 속한다. EU 통계기구 유로스타트에 의하면 지난해 1분기 기준 프랑스 국가부채는 3조3,000억 유로(약 5,650조원)를 넘어섰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은 114.1%에 달했다. 재정적자 또한 GDP 대비 -5.8%로, EU가 권고하는 -3% 기준을 크게 상회했다. 에리크 롬바르 프랑스 재무장관까지 나서 “국제통화기금(IMF) 개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위기의 심각성을 알렸지만, 재정 건전성 회복을 위한 긴축 조치는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다.
영국 역시 재정 경고등이 켜진 상태다.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은 96.3%로 선진국 가운데 최상위권에 속하며, 30년 만기 국채 금리는 6% 수준을 유지 중이다. 이 때문에 영국 예산책임청은 지난 한 해 부채 이자 상환액이 1,112억 파운드(약 219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특히 영국은 지난해 6월에만 210억 파운드(약 41조원)를 추가 차입했는데, 이는 최근 32년 사이 두 번째로 큰 월간 차입 규모다. 이에 재정 운용이 갈수록 늘어나는 차입에 의존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오랫동안 긴축 재정을 고수한 독일도 경기 둔화와 국방비 증액 압박 속에서 ‘부채 브레이크(Schuldenbremse)’로 불리는 재정준칙을 완화했다. 그간 독일은 해당 준칙에 따라 정부의 재정적자를 GDP 대비 0.35% 이내로 제한했지만, 수년간 지속되는 역성장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와 관련해 파이낸셜타임스(FT)는 “독일 재정적자는 2024년 333억 유로(약 56조원)에서 2029년 1,261억 유로(약 214조원)로 확대될 전망”이라고 내다보며 “방위비와 인프라 투자를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분석했다.
이들 국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재정 여력이 줄어든 상황이지만, 이를 공동으로 흡수할 장치는 전무한 상황이다. 여기서 연방의 가장 큰 공백으로 거론되는 지점은 EU의 예산 구조다. 2021~2025년 EU 예산은 국민총소득(GNI) 대비 1.14%에 불과했고, 코로나19 팬데믹 복구 기금을 포함해도 1.5% 수준에 그쳤다. 같은 기간 미국의 연방 지출이 GDP의 23%에 달하는 것과 대비된다. 위기 시엔 ‘차세대 EU’, 우크라이나 지원 기금처럼 한시적 금융 수단이 동원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재정 능력 회복에는 이르지 못했다.

안보 불확실성과 정치 변수
미국의 대서양 동맹 기조 변화는 유럽 내부의 연방 논의를 직접 자극한 외부 변수로 작용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재집권 이후 반복적으로 제기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역할 축소와 탈퇴 가능성, 방위비 분담 압박은 유럽 안보 질서의 전제를 흔들었다. 특히 미국이 동맹을 일종의 ‘거래 대상’으로 취급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유럽은 안보 문제를 개별 국가 차원이 아닌 집단적 권한과 재정 역량의 문제로 다시 인식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안보와 재정, 외교는 하나의 정책 묶음으로 논의돼야 한다는 주장에도 무게가 실렸다.
그린란드를 둘러싼 미국의 야욕 역시 유럽의 취약한 정치 결속을 노출한 사건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전략적 가치와 안보를 명분으로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에 대한 법적 지위를 요구했지만, 이 과정에서 유럽은 일관된 대응을 내보이지 못했다. 북극항로와 희토류 자원, 미사일 방어 체계 등 핵심 전략 자산을 둘러싼 문제임에도 EU 차원의 외교·안보 권한 부재로 회원국 개별 입장이 우선 노출된 것이다. 결국 유럽은 자국 영토와 안보 이해가 외부 강대국의 협상 카드로 오를 수 있다는 현실을 확인하게 됐다.
안보 불확실성은 에너지와 산업 정책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을 줄이는 과정에서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고, 이는 다시 에너지 가격과 공급 조건이 외교·안보 변수와 결합되는 구조를 낳았다. 미국은 자국 중심의 산업 정책과 기술 규제를 강화하며 유럽 기업과 시장에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개별 국가 대응 시나리오는 뚜렷한 협상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처럼 미국의 동맹 전략 변화와 돌발적 정치 행동이 유럽 내부의 저성장과 분열 문제 위에 추가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연방 차원의 정책 수단 필요성도 커졌다. 안보와 외교, 재정이 분절된 현재 구조로는 외부 충격에 일관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인식이다. 드라기 전 총재가 “각종 외부 변수 속에서 유럽이 집단적 권한과 책임을 재구성하지 않을 경우, 전략적 선택권을 상실할 수 있다”고 경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보 불확실성이 지속적인 압박으로 작용할 공산이 큰 만큼 유럽 국가들로서는 연방 논의를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는 현실에 처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