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미·중 경쟁이 다시 쓰는 세계 질서
입력
수정
美·中 전략 경쟁 확산으로 국제질서 재편 가속 다자주의 약화 속 복수 질서 공존 시대 부상 중견국 역할 확대에도 한계 뚜렷 충격 완화에 집중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냉전 종식 이후 국제사회는 규범과 제도를 중심으로 운영돼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강대국 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국제정치의 무게중심도 다시 국력과 영향력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물론 국제 규범과 다자 협력체제는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 역시 이를 뒷받침할 힘이 없으면 지속되기 어렵다. 실제로 전후 국제질서는 경제력과 군사력, 외교력을 갖춘 주요 국가들의 합의를 토대로 형성됐다. 문제는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이 확대되면서 기존 질서를 떠받치던 협력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질서의 출발점은 국력
1945년 이후 국제사회는 법과 제도,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운영됐다. 그러나 전후 질서는 국가 간 합의만으로 만들어진 결과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자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재정 능력을 보유한 국가들이 질서의 방향과 운영 원칙을 결정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다섯 개 상임이사국에 영구적인 거부권을 부여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브레턴우즈 체제와 자유무역 확대 역시 미국의 경제력과 안보 주도력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이 같은 구조는 과거 국제질서에서도 확인된다. 19세기 유럽협조체제는 모든 국가의 동등한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체제가 아니었다. 영국·오스트리아·러시아·프로이센 등 나폴레옹 전쟁 승전국들이 유럽 질서 재편을 주도했고, 이후 프랑스를 체제 안으로 편입했다. 새로운 국제질서의 방향을 결정하는 주체는 대체로 강대국이었다. 반면 중견국은 정당성과 기술, 자본을 제공하며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질서의 기본 구조를 설계하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국제사회는 국가 간 완전한 평등을 전제로 운영된 적이 없었다. 국제질서는 위계 구조 속에서 유지돼 왔으며, 각국은 그 틀 안에서 영향력과 역할을 배분받아 왔다.

미·중 경쟁에 흔들리는 다자질서
현재 국제사회가 직면한 갈등은 단순한 국가 간 마찰을 넘어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중국은 기존 제도에 참여하는 수준을 넘어 국가 금융과 산업정책, 거대한 내수시장, 수출 경쟁력, 군사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경쟁 환경 변화를 주도하는 흐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전략 산업 부문에 투입된 보조금 규모는 1,080억 달러(약 164조원)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중국 기업들은 대규모 지원을 바탕으로 시장 점유율을 확대했으며, 글로벌 점유율 증가분의 약 60%가 보조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도 관세 부과와 수출 통제, 산업 지원 정책, 투자 심사 강화, 기술 협력체계 구축 등을 통해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유지돼 온 다자무역 체제 역시 균열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지난해 최혜국대우(MFN) 원칙이 적용된 세계 무역 비중은 72%로 낮아졌다. 이는 국제질서의 붕괴보다 체제 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된다. 법과 제도는 유지되고 있지만 주요국들은 예외 조항과 자국 우선 정책을 적극 활용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는 규범 중심의 운영 체제에서 벗어나 경제력과 군사력, 기술력을 앞세운 영향력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강대국 경쟁 속 중견국의 현실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중견국의 역할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영향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국가 간 협력을 확대하고 공동 대응에 나설 수는 있지만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판단 자체를 바꾸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은 상당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다. 그러나 2024년 국방비는 각각 476억 달러(약 72조원), 553억 달러(약 84조원)로 미·중 군사비 합계의 8%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역 안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만, 국제질서 전반의 방향을 좌우할 수준은 아니라는 평가다.
외교 분야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중견국은 국제 현안을 제기하고 국가 간 협력을 이끌 수 있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제약하거나 초강대국의 핵심 이익이 걸린 사안에서 국제사법재판소(ICJ) 판결 이행을 강제할 수는 없다. 경제 규모 역시 현실적인 제약을 보여준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4년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9조 달러(약 4경3,800조원), 중국은 19조 달러(약 2경8,400조원)에 달했다. 두 나라의 경제 규모를 합치면 유럽연합(EU)을 웃도는 수준이다. 어느 중견국 연합도 이에 상응하는 영향력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중견국의 과제는 국제질서의 방향을 바꾸는 데 있기보다 충격을 완화하고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데 있다. 공급망 다변화와 전략 물자 확보, 경제안보 협력 확대, 외교 채널 유지 등이 대표적인 대응 방안으로 꼽힌다. 특히 강대국 간 갈등이 심화될수록 중견국의 조정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국제질서의 구조를 바꿀 수는 없더라도 협력의 공간을 유지하고 갈등의 파급효과를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질서가 끝난 세계
이 같은 변화는 무역과 안보, 기술, 금융 전반에서 확인된다. 과거에는 국가 간 갈등을 국제 규범과 제도를 통해 조정하려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최근에는 강대국 간 이해관계 충돌이 제도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지난해 무역정책 불확실성과 상호 관세 조치가 세계 상품무역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역시 강대국 간 이해관계 충돌이 심화되면서 의사결정 기능 약화가 두드러진다. 2024년 한 해 동안 결의안 초안에 대해 총 8차례 거부권이 행사됐으며 미국과 러시아, 중국 모두 이를 사용했다.
이 같은 흐름은 국제사회가 단일한 질서 아래 움직이기보다 여러 체제가 동시에 존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달러를 중심으로 한 금융체제와 중국 중심의 생산 네트워크, 서방의 제재 체계, 기후 협력체계, 지역 안보체제가 서로 교차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구조다. 과거 국제질서가 비교적 공통된 규범 아래 운영됐다면 앞으로는 국가별 동맹 관계와 경제적 영향력, 협상력에 따라 접근 가능한 시장과 협력 체계가 달라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새로운 질서에 필요한 현실 인식
국제질서 재편의 주도권이 여전히 강대국에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는 중견국의 역할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중견국들은 강대국 갈등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무역 협력과 기후변화 대응, 반도체 공급망 다변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축적해 왔다. 국제질서의 방향을 결정할 수는 없더라도 협력의 기반을 유지하고 갈등의 충격을 줄이는 역할은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 이는 강대국 경쟁이 심화될수록 더욱 중요해지는 기능이기도 하다.
반면 과거 질서가 원형 그대로 복원될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성이 높지 않다. 중국은 더 이상 기존 체제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위치에 머물지 않고 있으며 미국 역시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를 강화하고 있다. 중견국들 또한 완전한 중립 노선을 선택하기 어려운 데다 새로운 질서를 이끌기에는 영향력이 제한적이다.
결국 앞으로의 과제는 과거 체제를 되살리는 데 있지 않다. 변화한 환경에 맞춰 협력 구조를 재정비하고 갈등 관리 장치를 강화하는 데 있다. 국제사회가 단일한 규범 아래 움직이던 시대가 저물고 있는 만큼 각국은 새로운 현실에 맞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과거에 대한 기대보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실질적인 대응이 더욱 중요하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Power Writes the Rules of the Great-Power Order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