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노동의 공식, 조용한 퇴사부터 파이어족까지 ‘일의 재설계’ 확산
흔들리는 노동의 공식, 조용한 퇴사부터 파이어족까지 ‘일의 재설계’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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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조기 퇴사 확산, 3년 내 회사 떠나 파이어족으로 이어지는 근로 방식의 변화 장기근속 모델에서 자기 주도 근로로 전환

노동시장에서 신입사원이 입사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조직을 떠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퇴사 이후의 선택지도 과거와 달라졌다. 전통적인 이직 대신 프리랜서, N잡, 반퇴 등 보다 유연한 경로를 택하는 흐름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이는 조직이 설계한 장기근속 모델에 개인을 맞추기보다, 일의 방식과 강도를 스스로 선택하려는 ‘자기 주도적 근로’로의 전환으로 읽힌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누적된 근로자의 인식 변화로 인해 노동의 초점이 ‘어디서 일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일할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다고 분석한다.
퇴사 이후 N잡·프리랜서 택하는 근로자들
28일 취업 컨설팅 전문기업 인크루트가 발표한 '신입사원 조기 퇴사 현황 조사'에 따르면 기업 10곳 중 6곳은 신입사원의 조기 퇴사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446개 기업 인사 담당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이번 조사에서 퇴사한 신입사원의 평균 근속 시간은 '1~3년'이 60.9%로 가장 많았다. 다음은 '4개월∼1년 미만' 32.9%, '3개월 이하' 6.3% 순으로 나타났다. 인사 담당자들이 생각하는 신입사원의 조기 퇴사 이유로는 '직무 적합성 불일치'가 58.9%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어 낮은 연봉(42.5%), 맞지 않은 사내 문화(26.6%), 상사 및 동료 인간관계(23.4%), 워라밸 부족(17.1%)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실제 퇴사를 경험한 근로자의 인식은 다소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일자리 앱 벼룩시장이 직장인 1,72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56.3%가 '최근 1년간 퇴사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는데, 퇴사 사유로 '열악한 근무 환경과 복리후생'이라는 응답이 21.1%로 가장 많았다. 이어 △상사·동료와의 갈등 14.1% △회사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13.9% △낮은 연봉 9.2% △과도한 업무·잦은 야근 8.2% 순으로 나타났다. 이 외에도 '기업 문화가 맞지 않아서'(6.2%)',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아서(5.7%)' 등이 언급됐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인식 차이가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 출생자)의 이직·퇴사 트렌드를 넘어 근로 방식 전반에 대한 인식 전환을 반영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겉으로는 ‘직무 적합성 불일치’가 퇴사 사유로 가장 많이 언급되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역량이나 태도보다는 직장이 제공하는 근무 환경과 보상 구조, 조직 문화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결과라는 해석이다.

조직에 과잉 투입하지 않으려 일과 거리두기
이 같은 문제 인식은 퇴사 이후의 선택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문가들은 최근 청년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N잡, 프리랜서, 반퇴 등의 경로를 근로자가 스스로 일의 방식을 재설계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성장 국면이 장기화되면서 더 이상 장기근속을 통해 보상을 기다리는 전략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됐고, 노동시장 전반에서는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흐름도 뚜렷해졌다. 조직이 설계한 직무와 보상 체계에 자신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역량과 목표에 맞춰 일의 형태와 강도를 선택하려는 ‘자기 주도적 근로’에 대한 수요가 확대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자기 주도적 근로 흐름의 초기 단계로 주목받은 현상이 바로 ‘조용한 퇴사’다. 팬데믹 이후 등장한 조용한 퇴사는 일을 완전히 그만두지는 않되, 조직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역할만 수행하는 태도를 말한다. 일각에서는 이를 개인의 무기력이나 책임 회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과도한 업무 부담과 불투명한 보상, 성장 경로의 불확실성 속에서 더 이상 조직에 자신을 과잉 투입하지 않겠다는 자기보호적 선택에 가깝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최근에는 조용한 퇴사가 하나의 종착지가 아니라 전환 과정으로도 기능하고 있다. 조직 안에서의 거리두기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현실 속에서 근로자들은 자신의 생애 근로를 보다 주도적으로 재설계하려는 움직임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조용한 퇴사 개념을 대중화시킨 조직심리학자 앤서니 클로츠는 “조용한 퇴사는 일을 덜 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일이 삶을 잠식하지 않도록 경계를 다시 설정하는 행위”라고 설명했고, 하버드 경영대학원 린다 힐 교수는 “오늘날 근로자들은 직무가 아니라 일의 경험을 선택한다”고 평가했다.
'일에 얽매이지 않는 삶' 택한 파이어족
이 같은 자기 주도적 근로 흐름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사례는 ‘파이어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FIRE)’이다. 파이어족은 30~40대에 경제적 자립을 이뤄 조기 은퇴를 목표로 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파이어 운동은 1990년대 미국에서 처음 등장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영국, 호주, 네덜란드, 인도 등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장기 불황과 경기 침체 속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밀레니얼 세대(1981~1996년생)를 중심으로 관심이 커진 것도 이 시기다. 이들은 부모 세대가 은퇴 이후에도 경제적 불안을 겪는 모습을 지켜보며, 전통적인 근속과 은퇴 모델에 대한 회의를 공유한 세대로 평가된다.
파이어족 내부에서도 지향점에 따라 다양한 유형이 나뉜다. 대표적인 형태는 린(Lean)과 팻(Fat) 파이어족이다. 린 파이어족은 극도의 절약과 최소한의 소비를 통해 낮은 생활비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소득이나 자산 규모보다는 시간의 자율성과 삶의 여유에 가치를 둔다. 반면 팻 파이어족은 은퇴 이후에도 현재 수준 이상의 생활을 유지하거나 보다 풍족한 삶을 추구한다. 이들은 높은 자산 축적을 전제로 은퇴 이전의 소비와 생활 수준을 적극적으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린 파이어족과 대비된다.
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 아니라 일정 수준의 노동을 병행하는 형태도 있다. 사이드(Side) 파이어족은 본업에서는 은퇴하되, 부수적인 활동을 통해 생활비 일부를 충당하는 유형이다. 유튜브, 강의, 투자 관련 활동 등이 대표적이다. 바리스타(Barista) 파이어족도 자산 수익을 기반으로 생활하되, 건강보험료나 생활비 보완, 개인적 만족을 위해 하루 몇 시간 정도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한다. 이들 역시 노동을 완전히 중단하기보다는, 자신의 생활 리듬에 맞는 최소한의 일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처럼 파이어족은 '일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일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지향한다. 임금노동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근로에 대한 선택권을 개인이 확보하는 전략에 가깝다. 다만 현실적으로 파이어족이 보편적인 해법이 되기는 어렵다. 높은 초기 소득과 강도 높은 저축을 전제로 하는 만큼, 소득 격차가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자산 형성의 출발선이 다른 경우 적용하기 어렵고, 금융시장 변동성에 따라 흔들릴 수 있다는 구조적 취약성도 안고 있다. 은퇴 이후의 삶이 안정과 만족으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일에서 벗어난 이후 정체성 상실, 사회적 고립, 의미 있는 활동의 부재라는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