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붙은 ‘정년 연장’ 논의, 청년 일자리 잠식에 고용시장 세대 갈등 격화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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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고령화로 청년 채용 여력 축소
세대 불균형 심화 속 생산성 논란도
청년들 “기회 박탈·좌절감 누적” 호소

정치권을 중심으로 정년 연장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청년 고용 축소 우려 또한 속속 현실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30대 이하 청년층 고용률은 연일 하락세를 거듭 중이며, 구직 활동조차 포기한 채 ‘그냥 쉰다’는 청년은 40만 명을 넘어섰다. 이에 학계에선 일자리 총량이 제한된 상황에서 고령층 고용 확대가 청년 세대의 기회 박탈로 이어질 것이란 비관적 전망이 주를 이룬다. 정년연장이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노동시장 불평등을 확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도 설계의 정교함이 요구되는 형국이다.
기업의 ‘총보수 한도’, 청년들에겐 장벽
11일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정년 연장과 주 4.5일제 도입을 국정과제로 추진 중이다. 올해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3%에 달하는 등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만큼 정년 연장 논의가 시급하다는 판단에서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법정 정년을 65세로 단계적 연장하고, 이를 위해 연내 입법 추진 및 범정부 지원 방안 마련을 약속한 바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법정 정년과 국민연금 수령 연령(65세) 사이의 ‘소득 공백’을 핵심 위험으로 지목하며 정책 논의를 부추겼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정책 변화가 청년 고용에 미칠 파급효과에 주목했다. 노동 수급이 빠르게 줄어드는 상황에서 정년을 앞세운 장기 재직이 표준이 되면, 기업이 신규 채용 여력이 제약되는 만큼 취업 시장에서 청년층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실제 정년 제도는 연금·복지와 직결된 사회안전망이지만, 기업의 총보수 한도라는 예산 제약 속에서 운영된다. 이는 동일 인원에게 더 긴 근속을 보장할수록 신규 채용을 위한 가용 재원이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장의 움직임은 이미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한다. 통계청이 10일 발표한 ‘2025년 8월 고용동향’에서 지난달 지난달 취업자 수는 2,896만7,000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수치만 보면 긍정적 변화로 읽히지만, 실상은 다르다. 연령계층별 취업자 수 변화에서 60세 이상(40만1,000명)과 30대(9만6,000명)는 증가세를 그렸지만, 20대(-19만5,000명)는 큰 폭의 감소세를 나타냈다. 특히 15~29세 취업자는 357만1,000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21만9,000명 줄어들며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중소기업의 고령화도 뚜렷하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조사에 의하면 지난해 중소기업 근로자의 48.6%가 50세 이상이었고, 신규 채용 계획이 없거나 줄이겠다는 응답은 44.4%에 달했다. 이는 기업들이 생산성 대비 인건비 부담과 교육·전환 비용을 함께 고려할수록 상대적으로 위험이 큰 미숙련 청년 채용을 후순위로 미루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년 연장 논의가 거세지면, 기업들로선 현행 인력의 고용 기간을 먼저 계산하고 청년 채용 규모를 줄여 총보수를 관리하는 수순에 접어들게 된다.
학계에서도 임금체계와 고용 유연성을 그대로 둔 채 정년만 늘리면 청년 고용 위축, 노동시장 이중구조 심화의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주를 이룬다. 대기업·공공부문 중심의 정년 연장 도입이 중소기업과의 임금 격차를 확대해 청년의 대기업 쏠림을 심화시키지 않도록 △청년고용 보조금의 성과 연동 △채용 의무 조건화 △산업별 인력 수급 전망에 맞춘 정원 관리 체계 등을 병행해야 하나는 조언이다. 이 같은 제도들은 정년 연장의 취지를 유지하되, 기업의 총보수 한도 안에서 청년 채용이 먼저 배제되는 구조를 차단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비효율적 인력 교체도 쉽지 않아
청년층의 취업 기회 축소와 직결된 또 하나의 논란은 생산성 문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3년 조사에서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44.4달러로 38개 회원국 중 33위에 머물렀다. 이는 미국(77.9달러)이나 독일(68.1달러), 일본(49.1달러) 등 주요국과 비교해 매우 뒤처지는 수준이다. 특히 연간 근로시간은 1,872시간으로 최상위권을 나타냈지만, 이 가운데 30%가량이 개인 용무와 잡담, 웹서핑, 흡연 등 이른바 ‘가짜노동’에 소비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실제 노동에 집중하는 시간은 1,367시간 수준에 불과했다. 이처럼 장시간 근무가 성과로 연결되지 않는 구조는 기업 생산성 악화는 물론 청년 고용 여력을 직접 잠식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생산성 대비 인건비가 높은 인력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신규 채용을 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저효율 구조가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경직된 노동시장과 강성노조의 영향이 있다. 해고가 쉽지 않은 고용보호 체계 속에서 기업들은 위험 분산을 위해 신규 채용보다 내부 전환·경력직 채용에 의존한다. 이때 일부 노조는 생산성과 무관한 일괄적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 등을 단행한다. 이러한 노조 중심의 이익 대립은 기업의 비용을 가중시키며 종국엔 청년 일자리를 좁히는 결과로 이어진다. 실제로 20여 년째 이어져 온 화물연대 파업은 지난 2022년 한 해에만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자동차 등 주요 산업에서 약 4조1,400억원의 손실을 초래했으며, 같은 해 20대 청년들의 임금 근로 일자리는 전년 대비 2.4% 줄었다.
세대 간 불균형도 심각한 문제로 지목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인구구조 변화를 고려한 임금체계별 사회적 비용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기업에서 30년 이상 근속한 근로자의 임금은 1년 미만 근속자의 4.4배에 달한다. 이는 유럽 평균(1.6배), 일본(2.4배)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50대 근로자의 생산성은 30대 이하 근로자의 60% 수준에 불과했다. 기여와 보상이 불일치한 임금 체계가 청년들의 기회를 또 한 번 짓밟고 있는 셈이다.
저성장 장기화에 일자리 총량 한계
정치권과 학계에서 여러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 한국은행도 이례적으로 우려의 메시지를 내놨다. 한은은 ‘초고령사회와 고령층 계속근로 방안’ 보고서에서 임금 조정 없이 법정 정년만 연장하면 청년 고용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2016년 정년을 58세에서 60세로 올린 이후 55~59세 임금근로자는 약 8만 명 증가한 반면, 23~27세 청년 근로자는 11만 명 감소했다는 점을 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은이 추정한 대체효과는 고령 근로자 1명 증가 시 청년 근로자 최대 1.5명 감소였다. 한은은 “연장이 내부 연공비용을 고정비로 만들면서 신규채용 여력이 줄고, 특히 신입·주니어 포지션이 먼저 줄었다”고 짚으며 “일본식 ‘퇴직 후 재고용’을 검토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일본은 2021년부터 개정된 고령자고용안정법을 시행, 기업이 정년을 연장하지 않더라도 퇴직자를 계약직이나 시간제 근로자로 다시 채용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재고용 시 임금을 평균 40%가량 낮추는 식으로 직무를 조정했다.
아울러 한은은 저성장 국면에서는 일자리 총량의 제약이 더 크다고 강조했다. 성장률이 0%대에 머무는 환경에서 정년만 늘어나면, 고용의 파이는 커지지 않은 채 장기 재직 인력의 비중만 높아진다는 지적이다. ‘그냥 쉬었음’ 인구의 누적이 이를 뒷받침한다. 고용노동부 조사에서 일도 구직도 하지 않는 청년은 지난 8월 기준 40만 명에 달했다. 특히 30대 쉬었음 인구는 32만8,000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청년들은 정년 연장이 직업 선택의 자유와 행복추구권을 침해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회적 약자인 고령자를 경제적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제도의 취지는 높이 사지만, 청년에게 돌아와야 할 기회를 고령세대가 독점하는 폐해는 피할 수 없다는 비판이다. 특히 정년 연장으로 정상적인 순환 채용이 둔화되면, 청년들의 첫 일자리 진입이 늦어지는 것은 물론 경력과 임금 궤적 또한 함께 낮아지는 ‘스캐링’ 효과가 심화할 것이란 관측이다. 노동 개혁의 핵심을 정년 연장 그 자체가 아닌, 세대 간 균형을 유지하는 데 둬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