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미국 영향력의 새로운 기준, 군사력 아닌 이행 능력
입력
수정
美 리더십 신뢰 약화, 아시아 안보 질서 재편 조짐 관세와 오커스가 드러낸 신뢰·공급 역량의 균열 중견국 협력 확대 속 역내 전략 다변화 가속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아시아 리더십에 대한 의구심이 동남아시아에서 확산되고 있다. 최근 실시된 동남아시아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1.9%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을 역내 주요 지정학적 불안 요인으로 평가했다. 이는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의 공세적 행보에 대한 우려보다 높은 수치다. 이 같은 인식 변화는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을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졌음을 시사한다. 이제 아시아 국가들은 동맹 관계나 군사력 규모보다 정책의 일관성과 공약 이행 능력, 이를 뒷받침할 산업·경제 기반을 더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뚜렷하다.
안보 공약보다 중요한 이행 능력
과거 아시아를 둘러싼 지정학적 논쟁은 각국이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편에 설 것인가에 집중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진영 선택보다 미국이 보유한 국력과 영향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역내 리더십은 정치적 신뢰성과 실질적 역량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미국의 안보 공약이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은, 동맹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동시에 이러한 공약은 국방 생산능력과 공급망, 조선산업, 재정 여력 등 강력한 물적 기반이 요구된다. 문제는 최근 이 두 요소가 동시에 시험대에 올랐다는 점이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동맹 체제의 안정성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조약과 연합 훈련, 외교 협력이 지속되더라도 정책 결정 과정에서는 미국의 지속성과 대응 역량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관세 압박이 키운 아시아의 전략 다변화
이 같은 변화가 가장 먼저 드러난 분야는 무역이다. 관세 정책은 동맹 관계의 안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핵심 경제 영역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혔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뒷받침하는 핵심 동맹국이다. 양국에는 대규모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산 무기 도입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고율 관세 부과 가능성에 직면했다. 대만과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비슷한 압박을 받았다.
이는 미국이 안보를 제공하고 중국이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는 구조 속에서 균형을 유지해 온 아시아 국가들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역내 다수 국가는 미국과 안보 협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중국 시장과 공급망에도 크게 의존한다. 미국이 안정적인 안보 파트너이자 예측 가능한 경제 협력국으로 기능할 때만 이러한 구조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관세 압박이 현실화되면서 각국은 대외 전략 다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부 국가는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다른 국가들은 한국과 일본, 인도, 호주, 유럽 등으로 협력 범위를 넓히는 모습이다. 에너지와 식량, 방위산업 분야에서는 러시아와 제한적 협력 관계를 유지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실제로 미국에 대한 전망이 악화될 것으로 응답한 동남아시아 전문가 가운데 43.4%는 제재와 관세 등 무역 조치를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응답자의 38.5%는 미국이 국제 규범을 존중하기를 원한다고 답했으며 24.9%는 징벌적 관세보다 자유무역과 전략적 협력을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공급 역량 시험대 오른 미국 안보 공약
관세 문제가 정책 선택의 영역이라면, 미국·영국·호주의 3자 안보협력체인 오커스(AUKUS)는 미국 방위산업 기반의 구조적 제약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미국 조선소의 버지니아급 핵잠수함 생산량은 연간 약 1.1~1.2척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는 미 해군 수요 충족에 필요한 연간 2척에 미치지 못하는 규모이며 오커스 이행에 필요한 연간 2.33척과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에 따라 호주는 당초 계획했던 신규 잠수함 확보 대신 기존 함정을 우선 도입하는 방향으로 사업 계획을 조정했다.
핵심은 잠수함 사업의 지연 여부가 아니다. 오커스는 미국의 안보 공약을 실제로 뒷받침할 산업 기반과 공급 역량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의 대표적 동맹국인 호주와의 대형 방산 사업조차 생산능력의 제약에 직면하면서 역내 국가들은 미국의 약속이 위기 상황에서도 계획대로 이행될 수 있는지 주목하고 있다. 이 같은 시각은 대만과 필리핀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두 지역 모두 중국과의 군사적 긴장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장기적 약속보다 즉각적인 지원 능력과 실질적 대응 역량을 중요하게 평가한다.
물론 잠수함 생산 차질만으로 미국의 영향력 약화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잠수함 운용 능력과 정보 자산, 광범위한 동맹 네트워크를 보유한 미국의 위상은 여전하다. 그러나 역내 국가들이 주목하는 것은 군사력 규모 자체보다 공약을 실제 전력과 물자로 연결할 수 있는 실행 역량이다. 이러한 인식 변화는 각국의 안보 전략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은 방산 경쟁력 확대로, 일본은 방위력 증강을 통해 저마다의 자구책을 마련하는 모양새다. 호주는 협력 채널을 넓히고 있고, 인도는 전략적 자율성 유지에 무게를 두는 중이다.

중견국 협력 확대되는 아시아 안보 지형
그렇다고 이러한 변화가 곧 중국 중심 질서의 부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동남아시아 조사에서 미국과 중국 가운데 한 국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가정했을 때 중국을 선택한 응답은 52%, 미국을 선택한 응답은 48%로 집계돼 양측이 팽팽한 균형을 이뤘다. 미국에 대한 전략적 신뢰도 역시 일정 수준 유지되고 있다. 미국을 신뢰하거나 강하게 신뢰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42.7%였으며 신뢰하지 않거나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2.3%였다.
이 같은 흐름은 안보 정책에서도 확인된다.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의 군사비 지출은 2025년 8.1% 증가했다. 역내 국가들이 자주적 대응 역량 강화에 나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 호주, 인도, 주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회원국의 역할도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같은 집단안보 체제로 발전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역내 국가들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다양하고 무역 의존도 역시 높기 때문이다. 대신 국방 기술 협력과 해양 안보 공조, 방산 공동 생산, 사이버 안보 협력, 핵심 광물 공급망 구축 등 분야별 협력이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일부 협력은 미국과 함께 추진되겠지만 다른 협력은 미국 참여 없이 진행될 수도 있다.
미국 리더십 회복의 조건
아시아 안보 지형이 변화하면서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에도 새로운 과제가 제기되고 있다. 무역과 기술, 국방은 더 이상 개별 영역으로 분리해 접근하기 어려운 사안이 됐다. 관세 정책은 안보 협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방산 생산 차질은 동맹국의 전략적 판단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한다. 방위비 분담을 둘러싼 갈등 역시 동맹 운영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부상했다. 이에 따라 미국 국무부와 재무부, 국방부 등 주요 부처 간 정책 조율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미국 정책 결정자들에게 제시되는 과제는 분명하다. 예측 가능한 시장 접근 환경을 제공하고 약속한 방산 협력 사업을 계획대로 추진하며 위기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군수·정비·물류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 또한 아시아 국가들의 전략적 자율성과 정책 선택을 존중하는 접근도 필요하다. 역내 국가들이 기대하는 것은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협력 관계다. 미국이 이러한 요구에 얼마나 부응하느냐에 따라 향후 아시아 질서에서의 영향력과 리더십의 지속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US Asia Trust Is Now a Test of Power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