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피로감에 ‘에너지 독자노선’ 구축하는 각국, 트럼프가 마주한 외교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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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해협 위기로 에너지 공급망 타격 글로벌 에너지 질서 '효율→안보' 대전환 각국 앞다퉈 탈미국·탈중동 움직임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이 미국의 통제권을 벗어나 독자 노선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란 전쟁 종전 이후 공급 정상화를 기대하던 전망이 후퇴하자, 주요국들은 자국의 에너지 안보 역량 강화에 우선순위를 두는 모습이다. 중동 질서 안정에 대한 기대가 약화되는 가운데, 미국의 협상력과 영향력 역시 새로운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길어지는 공급 회복 시계, 에너지 시장 불안 가중
8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은 영국 정부의 미공개 보고서를 인용해 "영국은 이란발 에너지 공급 회복이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이러한 분석은 에너지 가격에 대한 압박이 더 오래 지속될 것이며, 세계 경제 전망 또한 악화되고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영국은 애초 종전 이후 전 세계 에너지 시장의 공급난이 6개월 정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며, 페르시아만 석유 공급이 빠르게 회복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이번 보고서에서는 공급난이 해소되기까지 최대 14개월이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호언장담해 온 중동 평화 내러티브가 급격히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영국 에너지안보탄소중립부가 작성한 것으로, 이란 전쟁의 경제적 영향에 대한 영국 정부 차원의 평가다. 해당 보고서에서 최상의 시나리오는 미국과 이란이 올해 안에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다. 다만 원유 공급 회복이 늦어지면서 연말까지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150달러 수준을 이어 2028년까지 100달러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전쟁이 재개돼 지역 기반 시설에 새로운 피해가 발생하고 에너지 공급 회복이 수년간 지연되는 상황이다. 이 경우 국제유가가 배럴당 210달러까지 급등하고, 2028년까지 150달러 수준을 지속할 전망이다.
이란 전쟁은 액화천연가스(LNG) 시장의 취약성도 동시에 부각시켰다. 이란 전쟁이 LNG 시장에 미친 충격은 원유 시장보다 더욱 복합적이다. 원유는 전략비축유 방출과 생산 증대를 통해 일정 부분 공급 공백을 완화할 수 있지만, LNG는 액화설비·수출터미널·전용 운반선·재기화 설비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산업 구조를 갖고 있다. 공급망 어느 한 지점만 흔들려도 전체 물류 체계가 마비될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카타르는 전 세계 LNG 공급의 약 20%를 차지하는 핵심 수출국이며, 대부분의 물량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이란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LNG 시장이 원유 시장보다 더 큰 불확실성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배경이다.
더 큰 문제는 LNG 시장이 이미 공급 여력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다. 유럽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미국·카타르산 LNG 수입 비중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왔다. 여기에 아시아 국가들까지 중동 리스크에 대응해 LNG 확보 경쟁에 뛰어들 경우 현물 시장은 급격한 가격 상승 압력에 직면하게 된다. 실제로 글로벌 가스 시장에서는 전쟁 발발 이후 LNG 운임과 보험료가 상승했고, 일부 선사들은 호르무즈 통과 리스크를 반영해 운항 전략을 재조정하고 있다. 공급 부족보다 공급 차질에 대한 우려가 먼저 가격을 끌어올리는 전형적인 위험 프리미엄 국면이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美 주도 에너지 질서에만 맡길 수 없다" 각국 에너지원·공급망 다변화
이 같은 흐름은 각국 에너지 정책의 우선순위를 바꾸고 있다. 단기적으로 많은 국가가 가능한 모든 곳에서 에너지 확보에 열을 올리는 분위기다. 먼저 카타르에서 천연가스 대부분을 수입하는 태국은 전력 수급 안정 대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태국 전력공사(EGAT)는 북부 람팡주에 위치한 매머(Mae Moh) 석탄화력발전소의 가동률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으며, 국영 에너지기업 PTT그룹에는 국내 천연가스 생산량 확대와 추가 LNG 조달 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태국 정부는 LNG 수입 물량 확보를 위해 미국과 호주, 말레이시아 등 기존 공급국들과의 계약 상황을 재검토하고 있다.
대만의 행보도 비슷하다. 대만 경제부와 국영 전력회사인 타이파워(Taipower)는 중동발 LNG 공급 차질 가능성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됐던 마이랴오(Mailiao) 석탄화력발전소 일부 발전기를 재가동하기로 결정했다. 당초 탄소배출 감축과 에너지 전환 정책에 따라 단계적 퇴출 수순을 밟던 설비들이지만, 에너지 가격 급등과 공급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전력 수급 안정성이 정책 우선순위의 최상단으로 이동했다. 대만 정부는 이와 함께 LNG 비축 물량 관리도 강화하고 있다. 경제부는 주요 발전소와 LNG 수입 터미널의 재고 현황을 매일 점검하는 비상 모니터링 체계를 가동했으며, 국영 석유기업 CPC에는 추가 LNG 물량 확보와 장기 공급계약 이행 상황을 집중 관리하도록 지시했다.
유럽연합(EU)도 에너지 안보 강화를 위한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회원국들과 함께 천연가스 저장시설 충전 목표를 유지하는 한편, 각국 가스 비축 현황에 대한 점검을 강화했다. 또한 비상 상황 발생 시 회원국 간 가스 공급을 우선 배분하는 공동 대응 체계도 재가동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구축한 위기 대응 매뉴얼을 중동발 에너지 리스크에도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방침이다. 개별 국가들의 움직임도 가파르다. 독일은 국영 에너지 기업을 중심으로 LNG 수입 터미널 운영 계획을 재점검하고 있으며, 가스 저장시설 충전 속도를 높이기 위한 추가 조치도 검토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알제리와 아제르바이잔 등 비중동 지역으로부터의 가스 도입 확대 방안을 추진하고 있고, 프랑스는 원자력발전소 정비 일정을 조정해 전력 공급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주력 중이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과 일본도 중동 리스크에 대한 대응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원유·가스 비축 물량과 수입선 현황에 대한 전면 점검을 실시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정유사와 가스공사, 발전사들과 연쇄 회의를 열고 호주산 LNG 도입 확대와 해외 자원개발 사업 지원을 다시 정책 전면에 배치하기로 했다. 또한 한국석유공사와 한국가스공사를 중심으로 비상 대응 체계를 가동했으며, 필요 시 추가 물량 확보와 대체 조달 방안을 즉시 실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일본도 국가 비축유 운영 계획을 재점검하고 주요 전력회사와 LNG 재고 상황을 매일 점검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특히 일본 정부는 원자력발전을 안정적 전력 공급의 핵심 수단으로 재평가하며 원전 재가동 절차를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또 시험대 오른 트럼프식 일방주의
이 같은 각국의 움직임은 미국의 중동 전략에 새로운 부담을 안긴다. 각국이 비축 확대와 공급망 재편, 대체 조달선 확보에 속도를 내는 이유는 명확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력을 낮게 보기 때문이다. 중동 안정화를 강조해 온 트럼프 행정부의 구상과 실제 정책 현장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형성된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적 부담으로 연결된다. 미국은 이란과의 군사적 긴장을 관리하면서도 국제 에너지 시장의 안정성을 유지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이후 미국의 에너지 정책 비전도 '에너지 자립(Energy Independence)'이라는 방어적 구호에서 '에너지 지배(Energy Dominance)'라는 슬로건으로 바꿨다. 하지만 가뜩이나 관세 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동맹국들의 경계심을 키운 상황에서 중동 위기까지 장기화될 경우 미국이 확보할 수 있는 외교적 지렛대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1기 행정부 시절 경험했던 외교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관세 압박과 방위비 분담금 갈등, 동맹국을 향한 공개적 압박은 협상력 강화 수단으로 활용됐지만 동시에 전략적 거리두기를 촉발했다. 당시에는 무역과 안보가 중심이었다면, 이번에는 에너지 안보가 새로운 시험대로 부상했다. 국제유가와 LNG 가격이 급등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정책이 자국 이익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인식이 확산될수록 동맹국들은 공동 대응보다 독자 대응에 무게를 둘 가능성이 높다.
국제질서에서 영향력은 군사력과 경제력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위기 발생 시 동맹국들이 공동 대응에 참여할 유인과 명분이 함께 형성돼야 한다. 동맹국이 미국의 판단을 신뢰하면 군사·외교·경제 비용을 분담할 여지가 커지지만, 반대로 미국의 정책이 예측하기 어렵고 자국 이익 중심으로만 작동한다는 인식이 강해지면 각국은 자체 방어 체계 구축을 우선하게 된다. 실제로 지난 3월 트럼프 대통령이 호르무즈 해협 안전 확보를 위한 국제 공조를 요구했을 당시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요국들은 직접적인 군사 개입에 선을 그으며 참여를 거부했다. 에너지 공급 안정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적 해법에는 동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최근 에너지 시장에서 벌어지는 각자도생 역시 미국에 대한 신뢰의 균열을 여실히 보여주는 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