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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폴리시] WTO 공백 속 관세와 보조금, 중국·EU 통상 질서의 재편

[딥폴리시] WTO 공백 속 관세와 보조금, 중국·EU 통상 질서의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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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months 1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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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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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과학의 언어로 읽고, 사실 위에 통찰을 더하는 글을 전합니다. 복잡한 현상 속에서 본질을 찾아 독자와 함께 사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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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분쟁 해결 정지 이후 정책 수단이 통상을 주도
보조금·금융 지원 누적이 공급망 이동을 가속
보조금 규모를 기준으로 한 상계 대응 필요성 부각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25년 현재 미국은 중국산 수입품 전반에 평균 47.5%의 관세를 적용하고 있다. 이는 특정 분쟁의 결과라기보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분쟁 조정 기능이 약화된 이후 통상 질서가 제도 중심에서 정책 수단 중심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관세는 확대되고 보조금은 누적되면서, 주요 경제권의 산업정책은 상호 대응 국면에 들어섰다.

자동차와 알루미늄에는 고율 관세가 부과되고, 반도체·배터리·태양광 분야에는 대규모 재정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공급망은 규칙보다 정책 신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통상의 핵심 쟁점도 달라졌다. 관세나 보조금을 사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이를 어떤 기준과 절차로 통제할 것인가로 논의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WTO 분쟁 해결 정지 이후의 중국·EU 통상 마찰

현재의 통상 환경은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Appellate Body)가 2019년 말 이후 사실상 기능을 멈춘 데서 비롯됐다. 미국이 신규 위원 임명을 거부하면서 상소 절차가 작동하지 않게 됐고, 그 결과 분쟁에서 승소하더라도 상대국이 상소를 제기하면 판정이 확정되지 않는 구조가 굳어졌다. 규칙은 남아 있지만 집행 수단은 사라진 셈이다.

이로 인해 보조금 경쟁을 억제해 온 보조금 및 상계조치 협정(SCM Agreement)의 실효성도 크게 약화됐다. 협정은 여전히 존속하지만, 위반 여부에 대한 최종 판단을 받기 어려워지면서 억제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제도적 공백이 장기화되자 각국은 다자 규범보다 자국 법과 정책을 앞세운 대응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국은 무역법 301조와 232조를 활용해 중국산 제품은 물론 철강·알루미늄·자동차 등으로 관세 적용 범위를 확대했다. 중국은 이에 맞서 WTO 제소를 이어가는 동시에 보복 조치와 산업 정책을 병행했다. 유럽연합(EU) 역시 규범 준수 중심의 접근에서 벗어나, 보조금 조사를 제도적으로 강화하며 통상 방어 수단을 적극 가동하고 있다.

개별 조치는 각각 법적 근거를 갖추고 있지만, 전체 흐름은 분쟁을 규칙으로 조정하던 단계에서 정책 수단으로 관리하는 국면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가 중국과 EU 간 통상 마찰을 구조적 문제로 만드는 배경이 되고 있다.

미·중 상호 관세, 전면적 고율 구조로 고착
주: 2025년 11월 기준 미국의 대중 평균 관세율은 47.5%로 가장 높았고, 중국의 대미 관세는 31.9%, 미국의 대세계 평균 관세는 18.5% 수준을 보였다.

보조금·금융 지원의 누적 구조

표면적으로는 관세가 주목을 받지만, 산업 구조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보조금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MAGIC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 세계 산업 보조금 규모는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인 1,080억 달러(약 151조원)에 달했다. 단순한 현금 지원을 넘어 세제 감면, 정부 보증, 정책 금융을 통한 저리 대출이 핵심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금융 비용을 낮추는 방식은 기업의 생산비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 과정에서 중국 기업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금융 조건을 활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OECD는 중국 기업들이 시장 금리보다 낮은 이자율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해 왔으며, 이것이 가격 경쟁력뿐 아니라 설비 확장 속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유럽연합(EU)이 중국산 전기차 배터리를 대상으로 불공정 보조금 여부를 조사하고 최대 40%대 관세를 부과한 배경에도 이러한 금융 지원 구조가 산업 경쟁을 왜곡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보조금의 영향이 개별 기업을 넘어 공급망 전반으로 확산된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동시에 미국은 반도체과학법(CHIPS Act)과 청정에너지 분야 세제 혜택을 통해 자국 보조금을 확대하는 한편, 관세 정책도 병행하고 있다.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기보다 전략 산업에 대한 지원과 방어를 동시에 강화하는 방향이다. 제도적 중재가 작동하지 않는 환경에서 주요 경제권은 보조금 확대와 관세 대응을 함께 선택하고 있으며, 이러한 누적 구조는 산업정책 경쟁을 상시적 국면으로 고착시키고 있다.

수치로 확인되는 산업정책 경쟁

통상 정책의 변화는 구체적인 수치로 드러난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eter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에 따르면 2025년 11월 10일 기준 미국의 대중 평균 관세는 47.5%에 이른다. 중국의 대미 평균 관세는 31.9% 수준이며, 철강·알루미늄·자동차 관련 조치로 미국의 비(非)중국 수입품 평균 관세도 18.5%까지 상승했다. 이는 개별 보조금 규모를 정밀하게 상쇄하기 위한 조치라기보다, 광범위한 보호 장벽이 형성된 상황에 가깝다. 관세가 정책 신호로 작동하면서 시장 전반의 비용 구조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반면 보조금 및 상계조치 협정(SCM Agreement)은 보조금의 존재와 규모,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해를 입증한 경우에 한해 해당 범위 내에서 상계관세를 허용한다. 이 기준에서 보면 중국의 산업 지원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평가된다. 독일 킬세계경제연구소(Kiel Institute for the World Economy)의 바우어(Bickenbach) 등은 인터이코노믹스(Intereconomics)에 게재한 연구에서 2019년 기준 중국의 산업 지원 규모를 2,213억 유로(약 330조원), 국내총생산(GDP)의 1.73%로 추산했다. 이는 녹색 산업 육성이 본격화되기 이전의 수치라는 점에서 이후 확대 가능성도 함께 시사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태양광(PV) 공급망에서 폴리실리콘부터 모듈까지 전 단계에 걸쳐 중국의 점유율이 80%를 넘고, 2023~2024년 신규 설비의 약 95%가 중국에 집중됐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수치는 보조금이 단순한 가격 경쟁을 넘어 생산 역량의 집적과 기술 학습 효과까지 이동시켰음을 보여준다. 산업정책 경쟁이 이미 수치로 확인되는 구조적 단계에 들어섰다는 의미다.

EU, 중국산 전기차에 기업별 상계관세 적용
주:  2024년 10월 기준 EU는 중국산 전기차(BEV)에 대해 기업별 보조금 수준에 따라 상계관세를 차등 부과했으며, 테슬라는 7.8%, 비와이디(BYD)는 17.0%, 지리(Geely)는 18.8%, 기타 협조 기업은 20.7%가 적용됐다.

보조금 규모를 기준으로 한 통상 대응 방향

현재의 통상 환경에서 핵심 대안은 보조금 규모에 연동된 대응이다. 포괄 관세는 국가 전체로 비용을 확산시키는 반면, 보조금 및 상계조치 협정(SCM Agreement)은 왜곡의 원인이 되는 보조금 수준에 대응을 한정하도록 설계돼 있다. 보조금을 입증하고 규모를 산정한 뒤, 그 범위 안에서만 조치를 취하는 구조다. 대응의 기준을 정책 의지보다 증거에 두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원칙을 실행할 수 있는 데이터 환경도 과거보다 크게 개선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MAGIC 데이터베이스는 보조금, 세제 혜택, 저리 금융을 정량적으로 포착하고 있으며, 각국 경쟁 당국은 수입 가격과 설비 투자, 생산 능력 확대 흐름을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있다. 이를 활용하면 특정 제품에서 외국 기업이 x%의 보조금 우위를 가질 경우, 해당 기간에 한해 최대 x%의 상계관세를 적용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대응의 상한과 근거가 동시에 명확해진다.

상소기구가 정지된 상황에서는 다자간 임시 상소중재(MPIA)를 활용하거나, 이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는 엄격한 기한과 공개적 판단을 포함한 대체 절차를 마련할 수 있다. 여기에 일몰 조항과 정기 재검토를 결합하면, 보조금 규모가 줄어들 때 관세도 함께 낮아지는 경로를 만들 수 있다. 통상 조치가 장기적 봉쇄 수단이 아니라 조정 장치로 기능하게 되는 셈이다.

통상 갈등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다. 다만 보조금 규모를 기준으로 관리하는 접근은 현실적인 선택지다. 중국·EU 통상 질서의 핵심 과제는 정책 수단을 얼마나 많이 동원하느냐가 아닌, 이를 어떤 논리와 수치로 묶어 관리하느냐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Tariffs Without Truth: Turning the Industrial Policy Arms Race into a Rules-Based Truce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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