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최대 난제 발열 잡는 ‘유리기판’, 글로벌 주도권 경쟁 분수령
AI 최대 난제 발열 잡는 ‘유리기판’, 글로벌 주도권 경쟁 분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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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뜨겁고 커지는 칩 "플라스틱으론 못 버텨" 반도체 '유리기판' 상용화 경쟁 가열 중간 인터포저 필요 없어 더 얇은 패키징 가능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의 핵심 기술로 주목받는 유리기판(Glass Substrate) 상용화를 두고 국내외 기업 간 각축전이 치열해지고 있다. 고성능 인공지능(AI) 칩 수요가 급증하면서 기존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FC-BGA)의 물리적 한계가 부각됐고, 열 안정성과 미세회로 구현에 유리한 유리기판이 핵심 대안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장의 관심도 기술 경쟁을 넘어 양산 시점과 수익화 가능성으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엔비디아, 코닝과 ‘유리 동맹’ 체결
6일(현지시간) 엔비디아와 미국 유리·광섬유 제조기업 코닝은 차세대 AI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광학 연결 솔루션 공급을 위한 다년간의 상업·기술 파트너십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번 계약에 따라 코닝은 미국 내 광학 연결장치 생산 능력을 10배 확대하고, 광섬유 생산 규모도 50% 늘릴 계획이다. 이를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주와 텍사스주에 첨단 제조시설 3곳을 새로 구축하고 약 3,000개의 신규 일자리도 창출한다. 엔비디아는 이번 협력을 통해 코닝에 최대 32억 달러(약 4조6,000억원)를 투자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또 엔비디아는 코닝 주식 1,500만 주를 주당 180달러에 매입할 수 있는 신주인수권을 확보했으며, 별도로 5억 달러(약 7,240억원)를 선지급했다.
이번 파트너십의 핵심은 '구리의 퇴출'이다. 업계에서는 엔비디아가 AI 데이터센터 고도화 과정에서 기존 구리선 기반 연결 구조의 한계를 본격적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고 있다. AI 연산 규모가 급격히 커지면서 데이터 전송 속도와 전력 효율 개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기존 데이터센터는 구리 배선을 통해 전기 신호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AI 모델이 거대화하며 데이터 전송량이 폭증하자 구리선은 발열과 저항이라는 물리적 한계에 부딪혔다.
반면 유리기판과 광섬유를 활용한 광전송 체계는 기존 구리선 대비 데이터 전송 속도가 빠르고, 전력 소모도 5~20배 적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유리기판은 열 안정성, 표면 평탄도, 전송 특성 등에서 기존 플라스틱 계열의 기판을 크게 상회해 고성능 칩 패키징의 병목 문제 등을 해소할 수 있다. 이는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부담과 발열 문제를 동시에 줄일 수 있는 핵심 열쇠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GTC 2025에서 이 기술을 AI 인프라 확장을 위한 필수 요소로 지명한 바 있다. 엔비디아는 코닝의 광섬유를 칩 근처까지 끌어오는 '공동 패키징 광학(Co-Packaged Optics·CPO)' 기술을 차세대 시스템에 전면 도입한다는 방침이다.
인텔부터 애플까지 유리기판 상용화 경쟁
글로벌 빅테크들의 유리기판 투자는 이미 수년 전부터 본격화한 흐름이다. 인텔은 유리기판 분야의 선도 기업으로, 10년 넘게 연구개발(R&D)을 해왔다. 지난해부터는 다수의 반도체 유리기판 제조사 및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업체에 특허 라이선싱을 타진하고 있다. 특허를 일정 기간 및 조건 아래 사용하도록 허락하고, 로열티를 받는 것이다. 이어 지난달에는 미국 애리조나 챈들러 시설에 10억 달러(약 1조4,800억원) 이상을 투입해 R&D 및 파일럿 인프라를 구축했다. 인텔 기술의 핵심은 자체 첨단 패키징 솔루션인 'EMIB(Embedded Multi-die Interconnect Bridge)'와 차세대 기판 기술의 결합에 있다. EMIB는 서로 다른 칩을 고속으로 연결하는 인터커넥트 기술로, 일부 고성능 제품에 적용되며 성능 확장성을 입증한 바 있다.
AMD는 2026년 반도체 유리기판 시생산(파일럿), 2028년 제품 적용이라는 기술 로드맵을 수립한 상태다. 반도체 업계에서 유리기판 로드맵이 확인된 건 처음으로, AMD는 반도체 칩 인터포저에 유리기판을 첫 적용할 계획이다. 인터포저는 AI 가속기 등을 패키징할 때 쓰이는 것으로, 중앙에 위치한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주변부에 배치된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연결 통로 역할을 한다. 현재 인터포저는 실리콘 재질을 사용하는데, 가격이 비싸고 공정 시 워피지(휘어짐) 현상 등 난제가 많다. 유리기판은 워피지 현상이 실리콘보다 적다. 또 평탄화가 쉽고, 보다 미세한 회로를 구현할 수 있다.
테슬라와 애플도 유리기판 제조사들과 만나며 기술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자리에서 반도체 유리기판 기술을 소개받고 협력 방안을 찾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시장에선 애플이 AI 인프라인 서버와 데이터센터에 유리기판을 활용할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테슬라는 고온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완전자율주행(FSD) 칩, 인포테인먼트 칩 등의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 유리기판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제2의 엔비디아로 꼽히는 브로드컴도 반도체 칩에 유리기판을 적용하기 위해 성능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 브로드컴의 행보는 유리기판 시장 확대를 시사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브로드컴은 고객이 특정 용도로 반도체를 주문하면, 이에 맞게 설계·제작하는 ASIC 반도체 기업이다. JP모건에 따르면 세계 시장 점유율 55~60%에 달해 브로드컴이 본격 도입하면 반도체 업계에 유리기판이 빠르게 확산될 전망이다. 유리기판의 상용화 시기는 2027년 이후로 예상된다. 시장조사업체 마켓앤마켓은 오는 2028년 글로벌 유리기판 시장이 84억 달러(약 12조3,100억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SK·LG도 유리기판 주도권 잡기 승부수
국내 업체들도 유리기판 선점에 적극 나서고 있다. 현재 국내에선 삼성전기, SKC, LG이노텍 등이 유리기판 상용화를 위한 과정에 있다. 먼저 삼성전기는 기술 경쟁과 동시에 고객 실리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기는 최근 브로드컴에 이어 애플에도 유리기판 샘플을 공급하며 글로벌 빅테크의 검증 라인에 진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세종 사업장에 구축한 파일럿 라인을 통해 시제품을 생산 중이며, 올해 시생산을 거쳐 2027년 이후 양산을 목표로 한다. 인텔이 기술 방향성과 생태계를 앞세웠다면, 삼성전기는 애플 등 핵심 고객 접점을 선점해 상업화 성과를 먼저 확보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SKC는 자회사 앱솔릭스를 통해 미국 조지아주 코빙턴 공장을 구축하고 양산 준비를 진행 중이다. 앱솔릭스는 생산 인프라 측면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인 주자로 꼽힌다. SKC는 최근 유상증자로 확보된 자금의 60%가량인 5,900억원을 앱솔릭스의 제품 개발과 공정 안정화에 투입할 계획이다. 다만 현재는 글로벌 고객사 인증과 경제성 있는 수율 확보라는 과제가 남아 있으며, 상용화 속도는 시장 기대 대비 다소 신중해진 분위기다. 설비를 먼저 갖췄더라도 실제 경쟁력은 공정 완성도와 수율 확보 수준에 따라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LG이노텍은 시장 수요를 살피며 내실을 다지는 전략을 이어가고 있다. LG이노텍은 구미 공장에서 유리기판 샘플 생산 체제를 구축하고 2030년 상용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지난 1월 유리 정밀가공 업체 유티아이와 협력해 원천 기술을 강화하는 한편, 국내 사업장에 시범 생산 라인을 구축해 개발을 진행 중이다. 문혁수 사장이 양산 목표 시점을 2028년으로 제시하면서도 시장 수요 본격화 시점은 2030년 전후가 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무리한 속도전보다 기술 완성도와 시장 타이밍을 맞추겠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국내 부품 업체들도 공급망에 합류해 유리기판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가 투자한 JWMT는 TGV(유리관통전극)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TGV는 유리기판에 수직으로 관통하는 구멍을 뚫어 데이터가 오가는 통로를 만드는 핵심 공정이다. JWMT는 깨지기 쉬운 유리에 미세한 구멍을 뚫는 고난도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익스톨도 삼성전기에 투자를 받고, 유리기판에 필요한 도금 기술 고도화를 진행 중이다. 유리는 플라스틱과 달리 매끄러워 도금이 까다로운데, 익스톨은 TGV로 뚫은 통로에 구리를 채워 전기 신호가 흐르게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다.
유리기판의 핵심은 수율을 높이는 것이다. 깨지기 쉬운 유리의 특성상 운송이나 공정 과정에서 손상 위험이 높다. 특히 기판에 미세한 구멍을 수만 개 뚫어야 하는 TGV는 홀 위치·크기·형태·유리 손상 등 한 가지라도 문제가 생기면 수율이 떨어지게 된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유리기판 양산의 성패는 이 까다로운 TGV 공정에서 불량률을 얼마나 잡느냐에 달렸다”며 “특수 장비 등을 다루는 소부장 기업들과의 긴밀한 협력 생태계 구축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