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리스크에 활짝 열린 러시아 원유 시장, 해상 물량 풀리며 수요 확대
중동 리스크에 활짝 열린 러시아 원유 시장, 해상 물량 풀리며 수요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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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유가 대응 차원 제재 한시적 완화
“효과 제한적” 평가에도 물량 부족 심화
동남아시아 에너지 조달 전략 변화 가속

중동 전쟁의 여파로 원유 공급 차질이 확대되면서 기존 제재로 묶여 있던 러시아산 원유가 다시 시장에 유입되는 흐름이 나타났다. 미국이 운송 중인 물량에 한해 한시적 제재 완화 조처를 내리며 거래 조건이 달라지자, 이미 선적을 마치고 해상에 체류하던 원유를 중심으로 구매 협의가 이어지는 상황이다. 제재 완화의 효과를 둘러싼 회의적 시각과 일부 비판의 목소리에도 다수의 국가가 러시아산 원유 확보에 열을 올리는 모습이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는 수입선 전환과 소비 제한이 동시에 추진돼 눈길을 끈다.
대체 물량 필요성 커져
18일(이하 현지시각)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최근 브리핑에서 “미국의 제재가 완화된 이후 많은 국가가 우리 석유 구매를 타진 중이며, 이에 따라 광범위한 (원유) 시장이 다시 열렸다”고 말했다. 자국산 원유가 세계 시장으로 유입되면서 시장 안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설명도 뒤따랐다. 앞서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지난 12일 오전 0시 1분 이전 선박에 선적된 러시아산 원유와 석유제품에 대해 오는 4월 11일까지 판매를 승인하는 새로운 일반 면허를 발급한 바 있다.
면허 발급 이후 해상 물량을 대상으로 한 거래 협의가 이어지면서 러시아산 원유가 실제 유통 단계로 이동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 에너지 분석 업체 케이플러(Kpler)에 의하면 현재 약 1억3,000만 배럴의 러시아산 원유가 해상에 체류 중인데, 이 가운데 5,400만 배럴가량이 수에즈 운하와 싱가포르 사이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해당 물량은 이전까지 제재 환경으로 인해 거래가 제한됐던 구간이지만, 미 정부의 조치로 전부 선적 후 이동 중인 재고로 분류됐다.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조사에서 지난 2월 러시아의 원유 및 석유 제품 수출은 하루 660만 배럴로 2022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으나, 이후 곧바로 반등에 성공했다. 수요 측면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세 협상 이후 러시아산 구매를 줄였던 인도가 수입량을 하루 180만 배럴로 확대했다. 이달 11일 기준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량은 하루 150만 배럴로 집계되며 2월 초와 비교해 50% 가까이 늘었다. 여기에 시노펙, 페트로차이나 등 중국 국영 석유사들도 지난해 11월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산 원유 추가 구매를 위해 공급업체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제재 면제가 한시적이라는 점은 한계로 거론된다. 앞서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X를 통해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안정을 도모하고 가격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면서도 “이번 조치는 이미 운송 중인 원유에만 적용되는 좁은 범위의 단기적 조치”라고 못 박았다. 이어 베선트 장관은 “러시아 정부가 에너지 수익의 대부분을 추출 시점의 세금에서 얻는 만큼 제재 완화가 러시아에 유의미한 재정적 이익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요 수입국 간 선점 경쟁 격화
이와 함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존스법(Jones Act)’을 일시적으로 면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1920년 제정된 존스법은 미국 항구 간 운송되는 화물은 미국 소유 선박만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면제하면 에너지 운송 비용을 줄일 수 있어 치솟는 유가를 잡는 데 일정 부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미 정부의 설명이다.
다만 이러한 조치들이 유가를 안정화하기엔 역부족이란 지적도 적지 않다. 시장조사기관 제프리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역사적으로 수출 제한 조치나 존스법 면제, 전략비축유 방출 등 긴급 조치들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성격이었다”며 “정치적으로 장기간 유지하기도 어려웠다”고 짚었다.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제재 완화 조치에 대해서도 비판이 이어졌다. 미 상원 민주당 지도부는 성명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자초한 글로벌 에너지 충격은 푸틴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고, 그의 전쟁 자금을 불리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이들은 “러시아가 중동에서 미국인을 표적으로 삼는 이란을 지원한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 나온 대통령의 결정에 분개한다”며 “지금은 러시아 석유 대기업의 손을 잡을 때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뉴욕타임스(NYT) 역시 이번 결정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유로 러시아를 처벌하려는 미국의 노력이 무용해지는 조치”라고 꼬집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같은 비판 여론을 의식한 듯한 발언을 내놨다. 그는 트루스소셜에서 “미국은 세계에서 단연코 가장 큰 석유 생산국”이라며 “유가가 오를수록 우리는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통령으로서 나에게 훨씬 더 큰 관심사이자 중요 사안은 사악한 제국인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해 중동, 나아가 전 세계를 파괴하는 것을 막는 것”이라며 “나는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도록 두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중동 상황과 에너지 정책 대응을 동시에 언급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지역별 대응 속도 격차
이런 가운데 러시아산 원유 확보 경쟁은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한국 역시 물량 확보에 나섰다. 18일 산업통상부는 러시아산 원유와 나프타 수입 가능성을 기업과 함께 타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시에 정부는 자원안보 위기경보를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했다. 수입 원유의 약 70%를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들여오는 구조에서 해당 통로가 사실상 봉쇄되면서 원유 확보에 차질이 불가피해진 탓이다. 정부는 “산유국이나 외국 석유회사가 국내에 저장한 원유를 구매하는 방안과 국제에너지기구(IEA)와 공조한 2,246만 배럴 비축유 방출 등을 검토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더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필리핀은 16일 라파엘 로티야 에너지 장관이 성명을 내고 “러시아 측에 석유 수입 가능성에 대한 의사를 전했다”고 밝혔다. 필리핀국영석유공사(PNOC) 역시 러시아 석유회사들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구체적인 수입 규모나 계약 기간은 확정되지 않았으며, 현재 러시아 측의 답변을 기다리는 단계로 설명됐다. 필리핀 정부는 현재 보유한 재고로 최소 4월까지 대응이 가능하다고 밝히면서도 공급 불확실성에 대비한 추가 확보 필요성을 동시에 언급했다.
인도네시아 역시 러시아산 원유 도입을 위한 협의에 착수했다. 바흘릴 라하달리아 인도네시아 에너지광물자원부 장관은 “모든 국가는 (석유 공급원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공급 보장”이라고 밝혔다. 이달 들어 인도네시아의 원유 수입량은 하루 평균 2만3,000배럴로 전월(10만4,000배럴) 대비 78%가량 감소했는데, 사우디산 원유 200만 배럴을 실은 초대형 원유운반선 ‘페르타미나 프라이드’호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면서 공급 불안은 갈수록 심화하는 상황이다. 이에 인도네시아는 보르네오섬 산유국인 브루나이에서 원유를 조달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 중이다.
여타 동남아 국가도 공급 불안에 따른 대응에 한창이다. 베트남은 응우옌 호앙 롱 산업무역부 차관이 지난 14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에너지 안보 장관회의’에 참석해 김정관 산업부 장관, 마쓰오 다케히코 일본 경제산업성 차관을 만나 자국의 원유 자원 확보 지원을 요청했다. 또 태국은 지난 6일부터 미얀마와 라오스를 제외한 국가에 대한 정제유 수출을 차단했고, 러시아산 원유 도입 협상을 병행 중이다. 스리랑카 역시 17일부터 주4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자동차는 주당 15L, 대중교통은 주당 최대 200L로 연료를 배급하는 조치를 도입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지역 내에서 원유 확보와 소비 제한이 동시에 전개되는 흐름을 보여준다.